11화
“아직 살아 있었군. 그동안 돌아오지 못한 무림동도들은 네놈이 죽인 것이냐?”
미친 노인과 네 명의 중국 청년들이 뭐라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음기가 실린 목소리는 결코 평범한 대화라고 볼 수 없었다. 백호영은 나름대로 짐작하고 있었다.
즉살마가 말을 내뱉은 건 그것뿐이었다. 그는 화살이 튕겨져 나가듯 즉시 매화 문양이 새겨진 옷을 입은 청년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손엔 어느새 검이 쥐어져 있었다. 높게 치솟은 그의 검극에서 백호영은 야생고양이의 이빨을 보았다.
“아!”
즉살마의 검이 벼락 같은 속도로 화산의 명의진검을 찔러 들어갔다. 마치 성난 고양이가 달려드는 모습과 같았다.
“헉!”
명의진검은 신음을 흘리며 가까스로 피했다. 고개를 돌렸기에망정이지 잘못했으면 방심한 사이에 목숨을 잃은 뻔했다. 즉살마가 연이어 그에게 검을 내찌르려 하자 무당의 벽장청력, 소림의 사멸쌍장, 곤륜의 오의청검이 한꺼번에 덤벼들었다.
놈들의 복장을 보면 알 수 있다. 모두들 각 문중의 절기를 이어받은 일제자들이다!
그들의 안광이 맑은 청색을 발하고 있었다. 마인을 처리하는 숭고한 일! 세 명은 동시에 즉살마를 향해 쇄도해 들어갔다. 벽장청력과 사멸쌍장은 얼굴과 가슴을 향해 장력을, 오의청검은 하반신을 향해 검초를 발출했다.
‘저런 개자식들! 한꺼번에 세 놈이!’
백호영은 괜히 울컥했다. 잠시 주춤거리던 명의진검도 다시 오행매화보의 신법을 밟으며 공세의 권역으로 달려들었다.
백호영의 눈엔 모두 사람이 아닌 듯 보였다. 공격하는 자들도 그렇고, 그것을 방어하는 미친 노인의 동작은 더더욱 사람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저것은 사람을 넘어선 동물적인 감각이다!
뒤늦게 달려든 명의진검은 복수라도 하듯 양오검법을 시전했다. 뒤이어 벽장청력의 폐목환장, 사멸쌍장의 전배산운장, 오의청검의 태청검법이 쇄도했다. 과연 일제자들의 합공은 그 위력이 대단했다. 즉살마는 가까스로 뒤로 튕기듯 피했다.
“전배산운장, 태청검법, 폐목환장, 양오검법! 크크.”
즉살마의 입에서 사문의 절기가 새어 나오자 네 명의 소협들은 놀란 듯 두 눈을 부릅떴다. 그 짧은 순간에 저 마인이 자신들의 초식을 읽어버린 것이다. 그들은 즉살마에게 쉴 틈을 주지 않기로 하였다. 혼연일체가 되어 미끄러지고 날아들며 정신없이 공격을 퍼부었다. 각각 얼굴, 목, 어깨, 가슴을 맡아 합공했다. 그 덕분이었을까?
즉살마는 벽장청력과 오의청검, 명의진검의 공격은 피했으나 마지막 사멸쌍장의 전배산운장에 그만 가슴을 노출시키고야 말았다. 곧바로 한 움큼의 피를 토하며 뒤로 튕겨 나갔다.
“크윽! 이 정파 놈들!”
그의 목소리엔 살기가 가득하였다.
정신없이 그들의 움직임을 쫓던 백호영의 눈동자가 뚝 멈추었다. 손놀림과 몸동작이 보이지 않다가 한순간 미친 노인이 피를 토해내며 뒤로 떨어져 나갔다.
‘이런 시팔!’
백호영은 곧바로 뛰어들 것처럼 흥분했다가 다시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내가 무슨 상관이지? 크크.’
과연 소림의 전배산운장은 일품이구나! 즉살마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달려드는 네 명의 일제자들을 노려보았다. 몸을 웅크리며 검을 가슴에 품었다. 흡사 고양이가 이빨과 발톱을 숨긴 채 잔뜩 웅크리고 있는 모습과 같았다.
두 명은 공중에서 뛰어들고 나머지 두 명은 밑에서 달려든다. 즉살마의 눈에서 시뻘건 안광이 폭사되었다. 가슴에 품었던 검은 어느새 오른손에 쥐어져 있었고, 신형은 공중으로 솟구쳤다. 그의 입에서 광음이 흘러나왔다.
“크크크! 정파 놈들은 다 죽여 버리지.”
‘파육정묘검법 묘치(猫齒)!’
즉살마의 검은 십자형으로 휘둘러졌다. 그 속도가 너무나 빨라 순식간에 두 명의 어깨를 베고 지나갔다.
검상을 당해 그대로 바닥에 떨어진 오의청검과 명의진검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그들은 이제껏 패배를 경험해보지 못했다. 문중의 일제자로서 무재(武才)란 소리를 듣고 자란 이들이었다. 따라서 자존심 역시 대단하여 자신이 저런 마인에게 검상을 입었다곤 믿고 싶지 않았다.
“오의청검! 명의진검! 크윽! 이…… 노옴!”
무당의 벽장천력이 성난 소리와 함께 즉살마에게 뛰쳐나갔다. 그가 제운종을 발하자 신형이 동서로 번쩍번쩍했다.
“크크. 제운종이란 말이지. 파육정묘검법 묘안(猫眼 : 고양이의 눈)!”
즉살마의 눈에서 적광이 흘러나왔다. 그는 갑자기 검을 뒤로 꽂았다. 검에서 묵직한 육감이 느껴졌다. 그는 광기 어린 웃음을 흘리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검을 돌렸다. 바람개비처럼 돌리다가 위로 찢듯이 치켜 올리자 벽장천력의 가슴부터 어깨까지 검상이 이어졌다. 어깨는 덥석 잘려나가 버렸다. 피분수가 콸콸 넘치며 혈강을 이루었다.
“죄, 죄송합니다. 태, 태…… 부님!”
그는 믿지 못하겠다는 눈빛을 띠며 뒤로 쓰러져갔다.
“정파 놈들! 다 죽여주마.”
지켜보고 있던 백호영은 통쾌한 나머지 박수라도 치고 싶었다. 갑자기 뒤에서 나타나더니 어깨가 잘려 죽어버리다니! 역시 저 미친 노인은 대단한 늙은이다. 그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장면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쌍심지를 켜고 있었다.
즉살마 뒤로 벽장천력이 쓰러지자 세 명의 소협은 흠칫했다. 무당의 일제자 벽장천력이 죽은 것도 충격이었지만, 저 마인의 검법은 생전처음 보는 것이다. 저런 잔인한 검법이 있다니!
오의청검과 명의진검은 이미 어깨의 검상을 지혈한 상태였다. 그들은 치명적인 실수를 하였다. 혈수장의 사부인 즉살마, 그 마인을 너무 우습게보았다.
저토록 무위가 출중하다니. 잔인한 마공! 세 소협은 점점 불타오르고 있었다. 반드시 저 마인을 죽여 세상으로 못 나오게 해야 한다. 또한 무림의 삼대기보 중 하나인 검환을 마인의 손아귀에서 빼내야 해야 한다.
“벽장천력이 저리 쉽게 죽다니. 저놈의 마인! 어쩔 수 없소. 삼성진법을 펼쳐야겠소.”
명의진검이 뇌까렸다. 삼성진법은 무림에 널리 알려진 진법으로 세 명이 합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비록 널리 알려졌다 하나 그 위력은 대단하다. 진법은 진법일 뿐이지만 그 진법을 행하는 무인이 누구냐에 따라 위력은 배가된다.
화산의 명의진검, 소림의 사멸쌍장, 곤륜의 오의청검이 진법에 따라 움직였다. 명의진검은 매화검법의 초식을 따랐고, 사멸쌍장은 항마복호장법의 초식을, 오의청검은 낙화검법을 발출했다. 진법에 따라 즉살마의 전후좌우 사방을 움직였다.
“크큭. 삼성진법?”
즉살마는 사방으로 집중하였다.
‘크크. 돌고 돌아, 돌고 돌아…… 보이는군.’
이번에는 백호영의 안력으로도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었다. 삼성진법이라는 것이 물 흐르듯 부드러운 움직임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각 절기가 방출될 때는 그 위력이 배가되는 것이었으니.
매화검법! 명의진검이 어깨의 검상을 참아내며 공격에 들어갔다. 즉살마는 몸을 돌려 반격하려 하였으나 오의청검의 낙화검법이 뒤이어 들어와 허리를 구부려야 했다. 즉살마는 사멸쌍장 한 사람에 초점을 맞췄다. 삼성진법을 깨는 파훼법은 한 명의 움직임을 긴밀히 관찰하여 그 빈틈을 공격하는 것이다.
이번엔 사멸쌍장의 항마복호장과 오의청검의 낙화검법이 시작되었다. 낙화검법은 워낙 변초가 많았고, 항마복호장은 그 심후한 내력에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즉살마가 낙화검법을 막으며 하늘로 치솟았다. 항마복호장이 뒤따라 쫓아왔다. 능공천상제의 신법으로 즉살마와 똑같은 높이로 치솟은 소림의 사멸쌍장이 방심한 그의 가슴을 쳐냈다.
“쿨럭!”
즉살마는 피를 토하며 고통을 참았다. 기다렸다! 소(小)를 내주고 대(大)를 얻는 것이다.
‘파육정묘검법 만육시식(萬肉試食 : 고기를 만 조각내어 먹다)!’
그의 검이 횡으로 들어올 때 비로소 사멸쌍장은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중으로 치솟을 때 소림의 능공천상제만큼 위력을 발하는 경공은 없다. 오의청검과 명의진검이 저만큼 뒤처져 있었다.
“마인! 열화지옥이 너를 반길 것이다.”
유언과도 같았다. 즉살마의 검이 그의 허리를 깊숙이 베어가고 있었다. 허리가 잘려나가자 몸이 두 개로 양단되었다. 그것도 모자라 즉살마는 쉴 새 없이 검을 움직였다. 철천지원수가 아니라면 차마 행하지 못하리라! 초식 이름대로 육체를 만 조각으로 낼 심산이었다.
“크크크! 정파 놈들은 다 죽어버려! 다 씹어주마!”
사멸쌍장의 피가 얼굴에 잔뜩 튀긴 즉살마는 광포했다. 그의 눈은 이미 이성을 잃은 듯했다. 오의청검과 명의진검이 뒤에 바짝 따라붙었다는 것도 모르고 갈라진 사멸쌍장의 육체를 계속해서 찢어발기고 있었다.
“이런 지독한! 크윽!”
오의청검은 차마 사멸쌍장의 시신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분노가 극에 다다른 오의청검의 검이 즉살마의 등을 향했다. 그럼에도 즉살마는 사멸쌍장의 시신에만 집착하고 있었다. 상대의 검이 막 등판에 도달한 후에야 눈치를 챘다. 고개를 돌렸을 땐 이미 늦은 뒤였다. 오의청검의 검이 그의 육신을 꿰뚫어갔다. 다행히 급박하게 신형을 돌린 덕분에 단전과 치명적인 부위는 비껴지나갔다.
“크억!”
즉살마의 신음이 허망하게 울렸다. 그때 백호영이 갑자기 바위 뒤에서 튕기듯 쏘아져 나왔다. 참을 수 없었다. 미친 노인이 저 땡중의 시신을 조각조각 낼 때 자기도 모르게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속으로 ‘더! 더! 더 잘라!’ 하고 부르짖었다. 그러다 상대의 검이 즉살마의 어깨를 관통하는 순간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왜 내가 저런 미친 노인을?’
백호영은 갑자기 치미는 분노에 자문해보았다. 하지만 그는 이미 오토잭나이프를 빼 든 채 오의청검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그의 지금 행동이 자문에 대한 답이었다.
“이런 시팔! 다 죽여 버릴 거다! 네놈들은 마피아보다 더 더러운 개자식들이야!”
그는 광인처럼 외쳐댔다. 그 소리에 즉살마가 눈을 번쩍 떴다. 연속된 오의청검과 명의진검의 공격을 피했다. 이번에 막지 못했다면 정말 치명적인 중상을 입었거나 목숨을 잃었으리라.
명의진검과 오의청검은 뒤를 돌아보았다. 웬 광인이 이쪽을 향해 뛰어오는 게 아닌가. 금색 머리에 괴기한 옷차림. 마인이구나! 명의진검과 오의청검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 암묵적인 대화였다. 명의진검은 즉살마를, 오의청검은 저 광인을 공격하기로 한 암시!
명의진검이 즉살마를 향해 이미 검을 날렸고, 오의청검 역시 백호영을 향해 용형보를 밟으며 달려들었다. 용이 꿈틀거리는 듯한 경공이었다. 백호영의 눈에 그는 거인으로 보였다. 다가서면 죽는다. 강맹한 위엄이 느껴졌다. 그러나 백호영은 악으로 깡으로 소리를 지르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오토잭나이프의 손잡이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챙
경쾌한 마찰음과 함께 날카로운 칼날이 튀어나왔다.
“악! 시팔! 죽어!”
바로 눈앞에 오의청검의 신형이 나타났다. 백호영은 반사적으로 오토잭나이프를 휘둘렀다. 그러나 헛손질에 불과했다. 짧은 칼날을 가볍게 피한 오의청검은 비소를 흘리며 그를 발로 차버렸다.
‘훗! 무공도 익히지 못한 사인이군.’
백호영은 가슴에 큰 고통을 느끼며 완전히 큰대자로 드러누워 버렸다. 백호영의 명줄을 따기 위해 높이 치솟은 오의청검이 그의 눈을 보며 흠칫 놀랐다. 가슴을 바싹 옭아매는 사악한 기운이 찔러 들어왔다.
‘무공은 익히지 못했으나 사기가 대단하군. 지금 죽이지 않으면 후환을 남기겠어.’
오의청검은 검을 수직으로 찔러갔다. 백호영의 목을 향해서였다.
챙
“큭 !”
백호영은 눈을 부릅뜨며 가까스로 상대의 검을 막아냈다. 기적이라고 해야 옳은 표현이리라. 오토잭나이프를 타고 흘러드는 강한 타격감에 뼈마디가 절단되는 것만 같았다.
“이런!”
더욱 놀란 쪽은 오의청검이었다. 그의 검이 동강나버린 것이다. 그의 시선은 백호영의 오토잭나이프에 맺혀 있었다. 날카롭게 선 저 예기를 명검이라 하지 않으면 어떤 것을 명검이라 할 것인가!
“크큭. 오 억이라는 거금을 괜히 처바른 게 아니라고.”
백호영은 몸을 일으키며 뇌까렸다. 그러고는 갑자기 몸을 돌려 뒤로 뛰어갔다.
“도망친다고 마인을 살려둘 것 같으냐?”
오의청검이 즉시 뒤쫓았다. 따라잡히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경공에서 차이가 워낙 심했기에 성인과 아기를 비교하는 것과 같았다. 그가 백호영의 등을 베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백호영이 고개를 팩 돌렸다.
‘뭐, 뭐야!’
오의청검은 흠칫 놀랐다. 상대의 미소가 음흉하기 짝이 없었다. 얇게 올라간 입꼬리는 비웃는 듯했고, 웃느라 주름진 눈가는 뱀 꼬리 같았다.
“이놈! 마인 주제에!”
놀란 자신을 책망하듯 소리친 다음 막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 고막을 꿰뚫어버리는 굉음이 들렸다. 천지가 무너지고 개벽하는 소리였다.
빵!
오의청검은 백호영의 가슴에 기대어 쓰러져갔다. 그의 심장에 뚫인 작은 구멍에서 피가 끊임없이 흘러나와 백호영의 옷을 적셨다. 백호영이 어깨를 비스듬히 비껴내자 그는 이내 풀썩 쓰러져버렸다. 꿈틀거리는 그의 손가락. 눈을 감지 않으려 부르르 경련하는 눈썹.
백호영은 야릇한 미소를 흘리며 오토잭나이프를 내리찍었다. 뒤집힌 채 쓰러진 오의청검의 목덜미에 은도의 칼날이 깊숙이 박혀 들어갔다. 꿈틀거리던 오의청검의 손가락이 미동을 멈추었다. 백호영은 오토잭나이프를 빼내 그의 옷에 피를 닦았다. SIG P―305의 총구는 이미 열이 식어가고 있었다.
“아!”
백호영은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시선을 멀리 돌렸다. 미친 노인! 그는 즉살마가 있는 쪽으로 재빨리 달려갔다. 달리기 시작한 지 삼십 초도 되지 않아 맞은편에서도 웬 시커먼 인형이 엄청난 속도로 마주 달려왔다. 마치 자동차가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것 같았다.
백호영은 제자리에 멈춰 서서 SIG P―305를 상대에게 겨눴다. 바람에 펄럭이는 허연 백발, 쭈글쭈글한 피부, 낯익은 얼굴. 스르륵 SIG P―305를 내려놓으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하, 하하. 내가 왜 저런 미친 노인을…….”
그는 온몸의 힘이 쑥 빠져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앞에서 달려오는 자는 즉살마였다. 전신에 피를 흠뻑 뒤집어쓴 그는 어깨를 부여잡은 채 달리고 있었다. 백호영 앞에 이르러서야 무섭게 일그러져 있던 그의 얼굴이 편안하게 바뀌었다.
“미친놈. 웃음이 나오냐?”
백호영은 웃고 있는 늙은이를 향해 뇌까렸다. 즉살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맥없이 백호영을 향해 쓰러질 뿐이었다. 즉살마의 숨소리는 매우 미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