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第5章 식인고양이에 얽힌 민담
절벽 밑에서 감상할 수 있는 하늘의 풍경이라곤 기다란 협곡 틈으로 보이는 구름이 전부였다. 줄곧 그 틈으로 뻗어 들어오는 광양과 월광은 한곳만을 비추고 있었다.
주위는 어두웠으며 적막했다. 아무도 살지 않는 것 같은 무생물적인 기운이 물씬 감돌았다. 풀들도 모조리 시들어버린 것처럼 흑빛을 띠었다.
백호영은 그곳에 앉아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적당히 치켜올린 턱과 눈은 절벽의 노목(老木)을 향해 있었다. 그의 입은 연신 똑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배워야 돼, 그것을…….”
칼과 총 중 어떤 게 더 위력적이냐고 한다면 당연히 총이겠지만, 한 자루의 총만으로 수십 명을 상대할 순 없다. 그러나 몇 시간 전에 목도한 노인과 침입자들의 몸놀림이라면 총보다 더 위력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실제로 총을 쏘기도 전에 미친 노인에게 빼앗긴 적이 허다했지 않은가. 그 민첩한 행동은 흡사 야수와 같아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가득했다.
백호영은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미친 노인을 치료하는 수고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노인처럼 민첩한 몸놀림을 지녀야한다는 생각만이 그를 잠식해가고 있을 뿐이다.
그의 뒤로 멀찌감치 보이는 가옥 안은 분주했다. 군데군데 혈흔이 가득했고, 노인네의 미약한 숨소리와 걱정 어린 소녀의 음성이 분분했다.
부용설리는 가만히 앉아만 있는 낭군이 야속했다. 평소 느낀 바에 따르면 낭군은 사부를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니, 증오한다고 해야 할까? 그런 태도로 이 어르신을 대한 게 사실이었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사제지간이 이토록 비뚤어져버렸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비뚤어진 건 비뚤어진 것이고 사부는 사부인 것이다. 아무리 싫어하는 사부라지만 이렇게 목숨이 경각에 달해 있는데 한 번쯤 들여다보기는커녕 딴청만 피우다니. 낭군에겐 감정 따윈 없는 것처럼 보였다.
“쿨룩!”
즉살마가 숨넘어갈 듯한 기침과 함께 피를 토했다. 새빨간 선혈. 그리고 섞여 있는 굳은 흑혈. 관통당한 어깨에선 계속해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안절부절못하던 부용설리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그녀는 비 오듯 눈물을 흘리며 백호영에게 달려갔다.
“정말 너무 하시는군요, 낭군님. 그분은 당신의 사부인데……!”
괜한 피를 뒤집어쓴 것만도 짜증 나 죽겠는데! 백호영은 인간이 지을 수 있는 가장 귀찮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표정을 본 부용설리의 눈물이 폭포수로 변했다.
“사부인데, 흑! 사부인데, 흐흑!”
“우라질! 시끄러워 죽겠네.”
백호영은 얼굴이 구겨질 정도로 귀를 틀어막으며 일어섰다. 부용설리가 깜짝 놀란 듯 울음을 멈췄다. 그의 눈은 분명 무서웠지만 낯익었다. 그녀의 연약한 손이 백호영의 검정 쫄티를 잡아당겼다.
따악
“뭐하는 짓이야!”
백호영이 그녀의 손을 쳐내며 차갑게 소리쳤다.
“쳇! 정말 재수 더럽게도 없는 날이군. 미친놈들투성이야. 미친놈 네놈이 와서 지랄을 떨더니 이젠 네년까지!”
그의 차가운 음성은 백 년설한에 몸을 파묻는 것 같은 한기를 가져다주었다. 그는 그대로 자리를 떠나버렸다. 터벅터벅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부용설리는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을 때쯤 즉살마에게 달려갔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자신의 옷자락을 뜯어 즉살마의 어깨를 감싸주는 것뿐이었다.
평상시 광인 같던 사람, 몸속의 폭발성을 어쩌지 못해 이리저리 날뛰던 어르신이 이렇게 죽은 듯 누워 있으니 눈물이 솟는 건 당연했다. 어쩌면 죽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무서운 생각에 잠겨 울면서 잠들어버렸다.
불복폭포 아래 공터의 밤은 깊었다.
부용설리는 느닷없이 자신의 머리맡에 뭔가가 떨어지는 듯한 소리에 깜짝 놀라 일어났다. 얼핏 보기에 방금 나간 사람은 낭군이었다. 그녀는 낭군이 떨어뜨리고 간 물건을 주워들었다. 주먹만한 호리병으로 백색 광택이 감돌았다. 속에 든 액체도 고체도 아닌 진흙 같은 것은 흑광을 발했다. 그녀는 금세 짐작할 수 있었다.
금창약이다! 그녀는 등잔을 밝히고 금창약을 보았다. 명쾌한 흑광으로 보아 효험이 뛰어난 금창약이 분명했다. 그녀는 탄성을 토하며 즉살마에게 다가갔다.
다행히 아직 숨은 붙어 있었다. 울다가 지쳐 잠들어버린 후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나 서둘러 치료해야 했다. 즉살마의 어깨에 감싸두었던 천을 벗겨냈다. 굳은 피들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었다. 금창약을 손에 가득 부어 상처 부위에 골고루 발랐다. 노인이 ‘크윽!’ 하며 눈을 부릅떴다가 다시 혼절했다.
‘역시 낭군님도 사부를 걱정하는 모양이야.’
백호영이 늦게나마 약을 가져다준 사실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노인의 병세가 호전될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냥 경과를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무위가 걸출한 고수임을 감안한다면 그리 쉽게 생명의 불을 꺼뜨리지는 않으리라.
그녀는 즉살마의 상처를 다시 천으로 동여맨 다음 밖으로 나왔다. 저 멀리 바위 위에 등을 돌린 채 앉아 있는 백호영이 보였다. 그녀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백호영은 그녀가 다가오자 침을 퉤 뱉으며 도망치듯 재빨리 동쪽으로 향했다. 부용설리가 그 뒤를 쫓아 달렸다. 한참을 달리다가 그녀는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동쪽으로 가면 갈수록 썩은 피 냄새가 진동했다. 멀리 백호영이 보였다. 그녀는 조금만 더 가면 된다는 생각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곧 소름 끼치는 끔찍한 장면에 비명을 질러야 했다.
“꺄악!”
백호영은 그녀의 비명 소리에 무엇이 그리 좋은지 배시시 웃고만 있었다.
주위는 시체로 즐비하였다. 사지가 절단되고 거기에 또다시 목까지 절단당한 끔찍한 시신들이었다. 상상할 수도 없는 잔인한 손속! 부용설리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다리의 힘이 쑥 빠져나가면서 더 이상 서 있을 기력조차 없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그녀도 시체들처럼 기운을 잃고 쓰러져버렸다.
끈적끈적한 웃음기를 머금은 백호영이 그녀에게 다가섰다. 그는 부용설리를 등에 업었다.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계집들이란, 크크!”
이깟 시체를 보며 ‘꺄악!’ 하고 비명을 지르던 모습이 우스웠다. 그는 기분이 한결 좋아진 듯 밝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히 해두고 싶었다. 지금 발밑에 깔린 시체들은 자신이 총을 쏴서 만든 것도 있지만, 나머지는 모두 미친 노인의 솜씨였다. 이들은 미친 노인의 원수인 것 같았다.
인간이 인간의 육체를 어찌 이렇게 깨끗하게 잘라 버릴 수 있는 것인지 신기했다. 그가 원하는 게 이런 힘이었다. 분명 이 침입자들도 미친 노인처럼 대단한 힘으로 맞서 싸웠다. 때론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때론 호랑이처럼 맹렬하면서도 폭발적이었다. 섣불리 인간으로 간주할 수 없는 몸놀림! 그런 자들 셋을 미친 노인이 혼자의 몸으로 처치했다.
“후훗! 하긴 내 SIG P―305로도 한 놈을 죽였으니 나도 대단하지.”
자화자찬이라도 하지 않으면 왠지 기분이 씁쓸할 것만 같았다. 발밑의 단백질 고깃덩어리로 변해버린 시체를 보고 있자니, 처참하게 죽은 들개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가 원하는 복수가 바로 이런 것이다. 들개 그놈을 수천만 조각으로 찢어발긴 다음 잘근잘근 씹어서 삼켜버려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배워야 돼. 미친 노인의 모든 것을!
“하긴, 배워야 하니까 그 약을 건네준 것이기도 하고. 죽으면 섭섭하지. 나한테 모든 걸 전수해야 할 것이고…… 또 그 미친 늙은이가 죽어버리면 이곳에 영영 못 나갈지도 모르니까.”
그런 까닭에 치료약을 부용설리의 머리맡에 놓았다. 무덤가 옆 가옥에서 찾아낸 것으로 이전에 미친 노인이 자신에게 발라주었을 때 그 효능을 직접 체험한 적이 있었다.
‘특허라도 내버릴까? 아니, 이미 먼저 냈을지도 모르지.’
백호영은 픽 웃어버렸다.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묻어버려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잊은 채 그는 부용설리를 업고 가옥으로 향했다. 머리 위에서 내리비치는 한줄기 빛이 그에게 그림자를 선사했다. 짧은 그림자가 그의 뒤를 따라다녔다. 마치 죽은 네 명의 원혼이 붙은 것처럼.
하지만 그 그림자보다 더 음침하고 무서운 건 백호영의 눈이었다.
‘미친놈의 모든 것을 전수받아야겠어!’
결심을 되새겼을 때 그의 눈은 뱀의 눈보다 차가웠고, 먹이를 노리는 호랑이의 눈보다 강령했다. 어찌 보면 악마의 눈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사기를 발하는 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공포 그 자체였다.
눈보다 그의 입꼬리는 더욱 가관이었다. 비웃듯 꾸물꾸물 올라간 입꼬리와 그곳에 진 입주름은 사람의 심장을 태워버릴 것만 같은 기분 나쁜 것이었다. 슬며시 올라간 입꼬리를 보고 있노라면 부처라 해도 모멸감을 감출 수 없으리라.
“흐흐.”
괴소가 점점 짙어졌다.
단단하게 굳어버린 대석(大石).
즉살마의 모든 것을 전수받아야겠다고 결심한 그의 가슴은 차돌처럼 단단해졌다. 그 무엇도 그의 가슴을 꿰뚫을 수 없으리라. 설사 만년한철로 명창을 만들어 수백 번을 찌른다 할지라도.
그의 눈은 한결 성숙해진 듯 깊었다. 단지 그 깊은 우물 속에 차곡차곡 채워진 것이 사기와 살심 그리고 마기라는 게 불안할 따름이었다. 그 깊은 눈을 보고 있으면 미궁 속으로 한없이 빠져드는 것 같았다. 미궁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치다 수백 마리의 뱀에 휩싸여버리는 환각을 가져오는 그런 눈!
투벅 투벅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그의 어깨까지 내려오는 금발머리가 출렁거렸다. 이미 앞머리는 턱에 닿을 만큼 자라 있어 눈이 찔리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는 길을 걸으며 중얼거렸다. 자신감에 넘치지도, 그렇다고 풀이 죽어 있는 목소리도 아니었다. 그저 자연스러운 소리로 몇 번이고 반복했다.
“石(석), 石, 石…….”
그의 시선은 어느 바위에 맺혀 있었다. 이전에 부용설리가 저것을 ‘石’이라 발음했다.
미친 노인의 모든 것을 전수받기로 결심한 이상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말문을 터야 한다는 것이었다. 말문을 트지 않고 어찌 무공을 배울 수 있는가. 갑갑하고 억양이 강한 중국말지만 거의 본토인처럼 말할 수 있는 독일어와 비슷한 어순이기에 도전해볼 만했다.
“老公(노공?), 老公, 老公.”
마피아 딸년이 자신을 이렇게 불렀다. 억양이나 그 눈빛으로만 보면 ‘애인’이나 ‘남편’ 혹은 ‘여보’ 같은 뜻임을 짐작하겠는데, 왜 자신을 그렇게 부르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쳇, 귀찮군.”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은 상당히 성가시고 까다로운 일이다. 그는 욕과 침을 연달아 내뱉으면서도 계속 중얼거렸다.
“?好(니호), 老公.”
‘안녕하세요, 여보’란 뜻인가? 그의 입가에 슬그머니 미소가 걸렸다. 약간 올라간 입꼬리는 웃음을 지울까 말까 망설이는 듯했다.
“?好, 老公.”
백호영이 한 말은 아니었다. 어느새 등 뒤로 쫓아온 부용설리가 그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며 오밀조밀한 분홍 입술을 달싹거리고 있었다. 백호영은 뒤돌아서서 한참이나 그녀의 눈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멋쩍어 고개를 돌리려 했을 때 전혀 뜻밖의 음성이 들려왔다.
“?好, 老公.”
‘아, 드디어 낭군님이 중원말을 하시는구나! 헌데 잘못된 말이지.’
그녀는 백호영을 가리키며 ‘老公’이라 발음했고, 반대로 자신을 가리키면서는 ‘老婆(노파)’라 말했다.
백호영은 즉시 뭔가 잘못 알고 있었구나, 생각하면서 그녀가 말한 대로 시정했다. 그러자 근래 들어 거의 웃어본 적이 없던 그녀의 얼굴에 만화가 활짝 피어났다. 너무나 해맑아 향기라도 나지 않을까 싶었다.
‘덮쳐버리고 싶군. 요즘 너무 참았어.’
백호영은 그녀의 붉은 입술을 보며 갈등했다. 그는 간신히 참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를 볼 때마다 생각하는 것이지만, 정말 죽은 여동생만 안 닮았어도 백 번은 덮치고도 남았으리라.
그제와 어제는 참 이상한 일이 벌어졌지요. 아니, 그제의 일은 이상하다고 말하기보단 끔찍하다고 말해야겠어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제 낭군님의 사부님께서 큰 봉변을 당하셨지요.
그제 소리가 들렸어요. 굉장한 소리였죠. 어떻게 들으면 소름 끼치는 소리였는데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와 신음 소리가 뒤섞여 있었어요. 나는 겁을 먹고 그곳으로 살금살금 다가갔지요.
그런데 갑자기 빠앙 하고 엄청난 굉음이 들렸어요. 그때 나는 머리가 굉장히 아팠죠. 잃어버린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는 것 같기도 했어요. 내가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고, 또 어떤 집안의 자손이었는지 정말 궁금했지요. 그런데 머리만 아프면서 뭔가 떠오르려다가 말았어요. 정말 이상하죠?
나는 굉음이 들려온 쪽으로 정신없이 달렸어요. 그곳에서 낭군님과 낭군님의 사부님을 보았지요. 나는 괜스레 반가워 그쪽으로 향하다가 ‘악!’ 하고 비명을 질러버렸어요.
어르신의 어깨에서 피가 콸콸 흘러나왔고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낭군님께선 그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어요. 어르신을 지혈할 생각은 안 하고 그냥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어요. 참으로 야속하다고 생각했죠.
처음엔 어르신의 어깨를 낭군님이 찌른 줄 알았어요. 낭군님의 손에 든 괴상한 단검에서 핏물이 떨어지고 있었거든요. 한 방울씩 뚝뚝 떨어지며 대지를 적셔갔지요. 그래서 나는 그렇게 단정 지으려 했으나 낭군님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주위를 둘러보았어요.
저 멀리 쓰러져 있는 사람이 보였어요. 물론 죽었다고 생각했지요. 나는 놀라기보다는 오히려 안심이 되었어요. 낭군님이 어르신을 찌른 게 아니었구나, 하면서 말이죠.
난데없는 봉변에 어르신이 죽어가고 있었어요. 더욱 슬펐던 것은 감정이라곤 전혀 없는 메마른 나뭇가지처럼 우두커니 앉아 먼 하늘만 바라보는 낭군님의 모습이었어요. 나는 평소에 응어리졌던 말을 낭군님에게 해버렸지요. 정말 야속하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말이죠.
같이 가자고 옷을 잡아끌었는데 낭군님은 내 손을 때리고 어디론가 가버렸어요. 나는 울지 않으려고 꾹 참고 있었어요. 낭군님은 정말 야속했지요.
낭군님이 어르신을 가옥 안으로 옮길 생각을 안 하고 어디론가 가버려 내가 업었지요. 정신을 잃어서인지 어르신의 무게는 천근만근이었어요. 어르신의 어깨에서 뿜어져 나온 핏물이 내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렸어요. 정말이지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어요.
가옥 안에 당도한 후 눈물이 폭발해버렸어요. 일다경 이상을 펑펑 울었어요. 바닥에 눕힌 어르신의 숨소리는 너무 약해 곧 돌아가실 것만 같았어요. 가끔씩 헐떡거리며 피를 토할 때마다 나도 똑같이 그런 고통을 겪는 것만 같았지요.
아마 그렇게 끙끙 앓는 어르신을 바라보며 울다가 지쳐 잠들었나 봐요. 내가 다시 잠을 깬 것은 머리맡에 뭔가가 툭 하고 떨어지는 소리 때문이었어요. 낭군님이 웬 호리병을 하나 던지고 도망치듯 빠져나간 것이었어요. 척 보기에도 진귀한 것인 줄 알겠더라고요. 아, 낭군님도 어르신을 걱정하고 계시는구나! 나는 그렇게 생각했죠. 그제야 눈물을 멈출 수 있었어요.
낭군님이 가져온 약은 향까지 좋아서 나는 그만 어르신이 아프다는 것을 깜빡하고 한동안 그 향에 취해버렸어요. 그러다가 어르신의 어깨에 약을 바른 후 가옥에서 나왔어요. 조금은 안심이 되었어요. 평소에 워낙 억셌던 어르신이라 그런지 숨소리와 혈색이 조금씩 회복되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요.
그래서 고맙다는 말도 할 겸, 오해해서 미안하다는 말도 할 겸해서 낭군님을 찾았어요. 낭군님이 평소에 즐겨 찾는 바위가 있어요. 그 바위는 나보다도 크고 넓었고, 둔탁한 색깔이 고풍스러운 그런 바위였지요.
그곳으로 향한 나는 낭군님을 볼 수 있었어요. 내가 다가가자 낭군님은 나를 피하며 어디론가 가버리더라고요. 마치 따라오라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따라갔는데…….
나는 거기서 못 볼 것을 보고야 말았어요. 보자마자 힘이 쑥 빠져버려 주저앉아 펑펑 울고 싶었어요.
낭군님 주변엔 시체들로 가득했어요. 어르신에게 검상을 입힌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어요. 불쌍했어요.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고, 난자당해 팔과 다리가 떨어져 나간 사람도 있었어요. 어떤 부위인지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짓이겨진 것도 있어 나는 마치 열화지옥에 떨어진 것만 같았어요. 있잖아요. 염라께서 심판을 내려 악인들을 떨어뜨린다는 열화지옥 말이에요.
말하기 정말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는 또다시 정신을 잃어버렸어요. 당시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고 오직 두렵기만 했어요. 핏물이 혈강을 이루었고, 혈강은 악몽을 가져다주었지요.
악몽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가옥 안의 어르신 옆에 누워 있었어요. 아마 낭군님이 나를 옮겼을 거예요. 평소에 무뚝뚝하고 화를 잘 내는 낭군님이지만 나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게 분명해요. 나는 다시 잠들면서 생각했죠. 낭군님께서 잃어버린 중원말을 어서 되찾았으면 좋겠다고요.
이튿날이었어요. 천상님이 제 소원을 들으셨나 봐요. 침상에서 일어나 낭군님을 찾았을 때 낭군님께서 나에게 ‘안녕하시오, 여보’라고 하셨어요. 비록 호칭은 잘못되었지만 정말 기뻤어요. 그 기쁨을 어떻게 말로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야말로 형용할 수도 없는 기쁨이었어요.
나는 즉시 낭군님께 잘못된 호칭을 시정해드렸어요. 낭군님이 저를 부를 땐 이렇게 불러야 하고 저는 낭군님을 이렇게 불러요, 라고 말이지요.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일까요? 낭군님이 내 말을 따라해 주시는 거예요. 표정엔 불만이 섞여 있기는커녕 진지함이 가득했어요. 낭군님의 눈이 말해주고 있었어요. 이런 말 하면 안 되지만, 낭군님의 눈은 정말로 무서워요. 마치 사람을 꿰뚫어 발가벗겨놓는 것 같다고나 할까요?
하지만 낭군님에게 무서운 건 눈뿐이에요. 어찌 보면 낭군님은 나보다도 더 불쌍한 사람일 수도 있어요. 나는 기억을 잃었지만, 낭군님은 무공과 말을 잃었지요. 또 지금 낭군님은 당신의 사부님을 억지로 잃으려 하고 있어요. 평소부터 알 수 있었어요. 낭군님이 어르신을 얼마나 싫어하는지를요. 어르신이 낭군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시는지도 모르고…… 낭군님이 어르신을 향해 인상을 찌푸리고 침을 뱉을 때마다 내 가슴도 미어지죠.
그건 그렇고 말이 빗나갔네요. 낭군님은 아마 중원말을 찾고 싶은가 봐요. 평소에 없던 열의를 보여주시거든요. 지금 나는 무척 기뻐요. 낭군님과 대화를 할 수 있을 날도 머지않은 것 같아요.
아, 가봐야겠어요! 죄송해요. 낭군님께서 나를 부르세요. 아마 또 궁금한 게 있는 모양이에요.
잠깐만요. 부탁드릴 게 있어요. 낭군님을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낭군님은 정말이지 불쌍한 사람이에요. 나와 어르신이 그동안 차마 생각하지 못했던 건데요. 내 생각대로라면 낭군님은 무공과 말뿐만이 아니라 나처럼 기억까지 잃어버렸을지도 몰라요. 그래서 사부님과 나를 멀리하려고 하는 것일 수도 있어요.
그러니 부탁드려요. 제발 불쌍한 우리 낭군님을 미워하지 말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