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서(序)
젊은 사내들이 죽창을 들고 떠나고 없는
늙고 병약한 이들만 힘없이 떠도는 흉흉한 마을을 지나
모래 바람 이는 벌판에 들어섰을 때
눈가가 얼룩진 그 아이가 보였습니다.
―소요자의 <벌판에서의 탄식> 중
난이 일었다.
헐벗은 농민들의 봉기였다.
아버지는 굶주린 몸으로 낫 대신 창을 들고 봉기에 참가하였다.
가지 말라 소리쳤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 이미 말을 잃었다.
전날 무엇을 잘못 집어 먹었는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아자(啞子; 벙어리)가 되었다.
울다 지친 내게 몸져누운 어머니가 말했다.
의레 있는 일이라 했다.
곧 나을 거라 했다.
그 말을 믿은 것은 아니지만, 눈물을 닦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이 다가온 것 같았다.
어머니는 눈물을 닦은 내 머리를 대견한 듯 쓰다듬고는 곤한 잠에 들었다.
그리고는 다시는 눈 뜨지 않았다.
야윈 손으로 어머니가 좋아하던 들판에 흙을 팠다.
손 껍질이 벗겨져 나가도 아픈 것을 몰랐다.
잃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고통도, 눈물도…….
모든 것을 잃었다.
힘겹게 파낸 구덩이에 어머니를 누였다.
그렇게 한참을 멍하게 앉아 어머니를 보았다.
잠시 같이 누울까, 생각이 들었다.
혼자 된 몸…….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구덩이에서 나왔다.
그 안에 같이 누울 수 없다.
군데군데 썩어 문드러진 어머니의 품을 마지막으로 안아보고는 파헤친 흙을 덮었다.
짐승들이 손 대지 못하게 꼼꼼히 덮었다.
땀인지 눈물인지 피인지 모를 것이 흘러내렸다.
닦지 않았다.
흐르는 대로 두었다.
사실 그것을 닦아 낼 힘이 없었다.
힘이 다했다.
내 메마른 몸뚱이는 죽어가고 있었다.
도움을 청하고 싶었지만, 여전히 말은 나오지 않았다.
체념했다.
삶을 놓으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웃음이 나왔다.
내 몸은 짐승들에게 찢겨질 지라도 어머니의 몸은 고이 잠들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죽는가?
푸르른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그야말로 높고 푸른 창천(蒼天).
문(文)이 모자란 아버지가 발품을 팔아 지어 주신 이름을 곱씹으며 눈을 감았다.
하늘아, 여기 창천이 진다!
울리지 않는 목을 대신해 마음으로 소리쳤다.제1장 붉은 하늘 아래 서다
사람의 자취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황무지.
사내는 불어오는 모래 바람을 맞으며 걸음을 멈추었다.
“아이……?”
거짓말처럼 황무지 한가운데에 아이가 쓰러져 있었다.
어른도 견디기 힘든 삭풍이다.
탈진해 쓰러진 것이 오래 되었다면 목숨을 장담할 수 없다.
사내는 훌쩍 한걸음에 아이가 쓰러져 누운 곳까지 날아올랐다.
누군가 그 모습을 본다면 새라고 오해할 만큼, 신묘한 신법이었다.
“허…….”
쓰러진 아이에게 다가선 사내의 얼굴에 안도감이 스쳤다.
살아 있다.
미약하지만 맥이 살아 요동치고 있다.
‘살릴 수 있다!’
사내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인명은 재천이라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렸으나, 그렇다고 두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투둑, 투둑―
사내는 성심을 다해 상한 아이의 몸을 타혈해 나갔다.
주룩, 흘러내린 땀방울에 흙먼지가 엉겨 붙었다.
단아하던 행색이 순식간에 거지꼴이 되어감에도 사내는 상관치 않았다.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의식을 잃고 앞에 있는 소년.
사내는 서서히 돌아오는 아이의 혈색을 바라보며 안도했다.
“……헉!”
단말마와 함께 거친 숨을 토해내는 것을 마지막으로 사내는 소년의 몸을 두드리던 타혈을 멈췄다.
큰 상처 없이 지쳐 쓰러진 소년이었다.
영약도 치료약도 필요 없이 그저 기운을 돋우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새근새근 잠이 든 아이를 바라보며 사내는 씩 웃었다.
좋은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입술 끝에 달린 희미한 미소를 쳐다보며 홀가분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중중무진이라…….
인연은 겹겹이 겹쳐 있으니, 오늘의 일도 언젠가 쌓아둔 인연의 조각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아이를 등에 걸쳐 업고 일어서니 그제야 아이가 쓰러진 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흙을 헤치고 덮은 자국이 선명하다.
묘비도, 다듬어진 묘도 보이지 않았다. 하나 그것은 누군가 흉내내어 만든 묘가 분명했다.
“설마…….”
사내는 아이의 손에 엉겨 붙은 피딱지와 토사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망자를 보내는 길이 곤해 배를 얻어 타고 이승의 강을 건너려 한 것일까?
등에 업은 아이를 내려 삭풍이 미치지 않는 바위 뒤에 앉혔다. 그리고는 가볍게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보던 사내는 품에 안을 만큼 커다란 바위를 하나 가지고 돌아왔다.
쿵!
커다란 소리가 울릴 만큼 무거운 바위를 허름한 묘 앞에 세워두고 아이의 곁으로 갔다. 그리고 그는 아이가 눈을 뜨기를 기다렸다.
꿈틀.
그렇게 몇 시진이 지났을까?
중천을 넘은 해가 서산으로 넘어갈 때쯤, 아이의 감긴 눈이 떠졌다.
“그래, 일어났느냐?”
아이는 인자한 미소로 인사를 건네는 사내의 모습에 놀라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쳐 쓰러진 기억이 선명한데 이렇게 멀쩡하게 눈을 뜨다니, 놀랠 노자다.
“그리 놀랄 것 없다. 노부가 이곳을 지나며 쓰러진 너를 보고 기운을 돋아 주었다.”
“…….”
아이는 다시금 말을 건네는 사내의 말을 들으며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그가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지금 앉아 있는 자리도 자세히 보니 쓰러진 곳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아이는 상황을 이해했다.
그는 구명(求命)의 은인이다.
“그래, 아이야. 내 네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도 되겠느냐?”
“…….”
아이는 사내의 말에 조심스레 자리에 앉아 글을 적었다.
<글이 부족해 긴 말씀은 드릴 수가 없으니 양해해 주세요. 아버지는 난에 참가하여 집을 떠나셨어요. 그와 함께 마을 사람들도 모두 떠나갔죠. 따라가고 싶었지만 병드신 어머님 때문에 그 긴 행렬에 참가할 힘이 없었어요. 결국 저와 함께 마을에 홀로 남았고, 결국 오늘…….>
“허, 아자인 게냐?”
사내는 엉성한 글을 적어 내려가는 아이를 보며 물었다.
<네, 굶주림에 아무거나 집어 먹다가 그만 독초를 먹어 버려서요. 그렇게 되었어요.>
“허…….”
아이는 사내의 동정어린 눈빛을 보며 씩 웃었다.
<그리 보시지 않으셔도 되요. 괜찮아요. 이미 후회를 털어 버릴 만큼 울었어요.>
“그래……, 그렇구나.”
사내는 웃으며 글을 적는 아이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겪었던 고초가 컸기 때문일까?
아이는 어린 나이에 들꽃처럼 빠르게 피었다.
생각이 깨고, 순응하는 법을 배웠다.
“저 묘가 어미의 묘인 게냐?”
<네, 가시는 길이나마 넓은 땅에 누이고 싶어서요. 저곳에 땅을 파고 어머니를 모셨어요. 제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니까요.>
“허…… 어째서 버려두지 않았느냐? 스스로도 몸을 가누지 못하는 아이가 아니더냐? 내가 보지 않았더라면 모친을 따라 눈을 감을 뻔했느니라. 어째서 그리도 무모하고 무리한 짓을 벌였더냐.”
<그게…….>
아이는 사내의 말에 잠시 글을 적던 손을 멈췄다.
생각할 것이 있는 듯 보였다.
<잘 모르겠어요. 마을에 작은 글방이 있어 인을 배우고 효라는 것을 배워 그런 것인지, 아니면 마음이 시려 그런 것인지 모르겠어요. 다만, 그때는 그리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요…….>
“그래…….”
사내는 방긋 웃는 아이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 엉성한 묘 앞에 섰다.
“어미의 이름이 무엇이냐?”
<여정(餘情).>
파앗!
아이의 손에서 미끄러진 글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내의 허리춤에 걸린 검이 하늘을 갈랐다.
까가가가강!
검끝이 바위와 부딪쳐 불꽃을 피워올렸다.
큰 바위가 순식간에 검에 깎이고 잘려지며 보기 좋은 묘비가 되어 남았다.
“노부는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검파의 장문인 소요자다. 노부와 함께 가겠느냐? 내 너에게 새로운 목소리를 주겠다.”
아이는 손을 내밀며 말하는 사내의 말에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이름은?”
<창천(蒼天)!>
말이 나오지 않는 입을 벌려 소리치는 아이의 마음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