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제2장 배움
하루가 짧아졌다 생각했다.
길기만 하던 시간이 반 토막이 되었다 믿었다.
처음 배우는 검에, 처음 배우는 도리에, 처음 배우는 정의에 해가 잘렸다. 창천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는 하루를 되뇌며 자리에 앉았다.
조용히 일어나 창을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낡은 오두막 사이로 흘러들며 상쾌함을 더했다.
“오늘도 종일 공부에 매진한 것이냐?”
“…….”
창천은 오두막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소요자를 보며 웃었다.
저 아이는 마치 투명한 계곡물을 보는 것 같았다.
즐거우면 웃고 피곤하면 고개를 숙이며 곤란하면 어깨를 으쓱인다.
좋은 사람이다.
솔직한 사람이다.
소요자는 그리 생각하고 웃는 창천을 보며 허허롭게 웃었다.
한눈에 보아도 소년 창천은 배움에 뜻이 있었다.
그와 더불어 잃어버린 말을 되찾으려는 욕망도 있었다.
그렇기에 빨랐다.
배움의 진척이 남달랐다.
지금껏 가르쳐온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재목이다.
소요자는 창천이 천재라 믿었다.
하나를 가르치면 둘을 알고 셋을 헤아리는 천재.
생의 황혼기에 크나큰 복을 얻었다.
소요자는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입을 열었다.
“공부라는 것은 시기가 있는 법. 네 머리와 몸이 굳어지기 전에 나를 만난 것은 정말 천운일지도 모르겠구나. 좋아, 아주 좋아.”
그런 소요자를 창천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엇이 좋다는 것인지, 무엇이 기쁜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녀석. 아직도 사람 말귀를 잡는 법을 모르는구나. 내가 웃는 것이 그리 궁금한 것이냐?”
창천은 마음을 꿰뚫어 본 듯 물어오는 소요자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네게 준 것은 매우 어려운 심득이다. 이해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익히기도 어렵다. 세상에서 잊혀진 것도 그 때문이지. 어려운 것은 좋지 않아. 사람을 지치게 하고, 의욕을 깎아 먹지.”
소요자는 조용히 경청하는 창천을 보며 책상 위에 놓인 낡은 책자를 집어 들었다.
겉장은 수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치는 동안 낡아 바스러졌지만, 속장은 누구 한 사람도 손을 대지 않은 듯 깨끗했다.
“혜광심어는 소림에서조차 잊혀진 마음의 말이다. 천 리 밖에서도 뜻을 통할 수 있다는 신묘한 불도임과 동시에 강맹한 무도이다. 많은 사람이 탐욕을 부렸지. 허나, 그 깊이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깊어 감히 누구도 넘보지 못했다. 커다란 절벽에 선 사람들마냥, 앞으로 나아가길 포기한 게야.”
“…….”
소요자가 덧붙인 말에도 창천은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하는 말이 통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려운 만큼 재미가 있어요. 아직 사서조차 떼지 못한 제가 하는 말이라 우습게 들리실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정말 그래요. 그 책은 매우 흥미 있고 재미있는 책이에요. 다들 포기했다니, 믿을 수가 없어요.>
“그러하느냐?”
<네.>
고개를 갸웃하는 창천을 바라보며 소요자는 가볍게 웃었다.
이토록 순수하게 학문에 대한 열정으로 빛나는 눈을 본 것이 얼마만이던가.
소요자는 허공에 그어진 창천의 글을 되뇌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것은 이 책을 손에 쥐었던 많은 사람들의 머리가 굳었기 때문이다. 그들 자신이 능력의 한계를 맛보았기 때문에 일찌감치 손을 뗀 것이다. 더 나아가봐야 익힐 수 없다, 배울 수 없다 섣불리 단정을 내려 버린 게지. 내 그렇기에 이 책을 반기는 네가 기쁜 것이다. 높은 절벽은 오를 수 없다 물러서는 이들과 달리, 순수하게 그 끝과 앞만을 보고 오르는 네가 대견스러운 게지.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느냐?”
창천은 다시금 말을 묻는 소요자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얼추 알 수는 있었지만, 이해한다 말할 수는 없었다.
“흐음…… 그렇다는 말이지. 으음…… 어디 보자.”
창천의 반응에 소요자는 낡은 오두막을 뒤졌다.
말로써 이해시키지 못했으니, 직접 겪게 해 줄 요량이었다.
뒤적뒤적.
오두막을 뒤지는 소요자의 손길에 수북이 쌓인 먼지가 날아오르며 퀴퀴한 냄새를 뿜어냈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물건이 생각난 것이다.
“오! 찾았구나.”
한참 오두막을 뒤적이던 소요자가 낡은 상자 하나를 들고는 씩 웃으며 걸어 나왔다.
“잠시 이것을 받아 주겠느냐?”
창천은 소요자가 건네는 먼지 묻은 상자를 바라보며 냉큼 손을 뻗었다.
쿠웅!
순간 가볍게 건네받은 상자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다시금 바닥에 가득 쌓인 먼지를 뿌옇게 일으켰다.
<이, 이게…… 뭐예요?>
창천은 바닥에 떨어진 상자에 놀라, 더듬더듬 허공에 글을 남겼다.
“생각보다 무겁지? 아마 지금의 네 근력으로는 절대로 들 수 없을 게다. 이 상자 안에 든 쇳덩이는 만년한철이라는 질 좋은 광석이 든 원석으로, 무게가 30관은 족히 넘는 물건이지. 자, 그럼 내 다시 한 번 이 상자를 들어 건넨다면 너는 또 다시 넙죽 받겠느냐?”
<아니요, 못 받겠어요. 저는 그런 무거운 물건을 아직 들 수가 없어요.>
“그래, 바로 그것이다. 지금 너는 네 근력의 한계를 안 것이야. 그것이 바로 상황에 대한 학습이라는 것이지. 모를 때야 넙죽 손을 뻗어 물건을 받아 들겠지만, 안다면 그것을 다시 받으려 하겠느냐?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게다. 못 한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스스로를 굳혀나가는 것은…… 그렇기에 무섭고도 위험한 일인 게지.”
<하지만…….>
소요자는 애써 말을 생각해내려는 창천을 보며 휘휘 고개를 저었다.
“굳이 그 좋은 책을 버린 이들을 변호하지 않아도 좋아. 나는 그들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야. 그들의 판단이 옳아. 무모한 것에 시간을 버리는 것은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니까. 하지만 말이다. 노부는 그런 바보들이 좋더구나. 무모함을 넘어서는 이들이 좋아. 스스로의 한계점을 정해 놓지 않고, 할 수 있다, 없다를 떠나, 그 자체를 즐기는 이들이 좋아. 그래서 네 모습이 흡족하고 기쁘단다.”
“…….”
창천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하는 소요자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전하고자 하는 뜻이 무엇인지, 하고자 했던 말이 무엇인지 확실히 가슴에 닿았다.
<지금 들 수 없는 그 상자는 언젠가는 꼭 제 힘으로 들어 볼게요. 언젠가는 할 수 있겠죠? 이 책의 끝을 보는 일도…… 상자를 드는 일도요.>
씩 웃으며 글을 적는 창천을 바라보며 소요자는 바닥에 떨어트린 상자를 힘껏 집어 들었다.
“허허, 그래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니 잘 되었구나. 생각보다 이르게 되었지만, 오늘 대장간에 들러야겠구나. 암, 그래야지. 이 정도 상자와 책은 들고 읽어야지. 그래야 다시금 말을 찾을 수 있지.”
웃으며 오두막을 나서는 소요자의 걸음이 빨라졌다.
천운 중에 천운이다.
게으른 천재가 아닌 노력하는 천재를 만났다.
하루라도 빨리, 한시라도 빨리…….
다시는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용솟음치는 그의 시간을 다잡아 줘야 한다.
* * *
“…….”
창천은 거친 숨을 내쉬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대장간을 찾아 나선 지 하루.
소요자가 손에 쥐고 온 물건은 과연 만년한철이었다.
‘무겁다.’
혀를 길게 빼고 헉헉거려야 할 만큼 몸이 지쳤다.
무겁다.
양팔과 다리에 족쇄처럼 찬 만년한철은 원석의 군더더기를 털어냈음에도 충분히 무거웠다.
“그래, 이제 좀 살 만해졌느냐?”
빠끔히 혀를 빼고 앉은 창천을 보며 소요자가 물었다.
<아뇨. 아직 많이 무거…… 워요.>
“그래? 그런데 어찌 그리도 부단히 움직이려 애를 쓰느냐?”
<책은 읽을수록 느는 만큼, 이 일도…… 하는 만큼 늘 테니까요.>
“허허…….”
소요자는 간간히 만년한철의 무게에 흘러내리는 글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아자다.
귀로 듣고 손으로 말한다.
때문에 처음 족쇄를 채웠던 날 그의 말수는 절반 가까이 줄었다.
책장을 넘기는 일도, 책을 보다가 그 속에 나오는 어려운 말들도 묻지 못했다.
답답했을 게다.
손으로 말을 할 수 없음에, 무기력한 몸에 스스로가 답답했을 게다.
“문무는 언제나 같은 것이다. 나약한 몸에 강맹한 문은 어울리지 않는 법. 네가 배우려 하는 강맹한 문을 위해 너는 강해져야만 한다. 알겠느냐?”
<예, 알겠어요. 꼭……! 강해질 테니 두고 보세요.>
바르르 떨리는 손을 들어 간신히 답했다.
피로한 몸이 한계를 토해냈다.
족쇄를 달지도 않은 눈꺼풀이 천근 같은 무게로 두 눈을 가려왔다.
배워야 할 것들이 많은데, 해야 할 일이 태산 같은데 잠이 쏟아진다.
“…….”
안간힘을 다해 떨어지는 눈꺼풀을 잡으려 했으나 잡지 못했다.
스르륵 감긴 눈꺼풀은 그렇게 다시 떠질 줄을 몰랐다.
“굳건한 녀석이야. 창천이라는 이름이 아깝질 않아. 허허…….”
소요자는 의자에 앉은 채로 잠이 든 창천을 바라보며 기분 좋게 웃었다.
시키는 일에 군말이 없다.
이렇게 하라면 이렇게, 저렇게 하라면 저렇게 한다.
이토록 잘 따라오는 아이를 어디 가르쳐 본 적이 있던가?
가르침의 기쁨에 빠진 소요자의 웃음은 부처마냥 보기에 좋았다.
“그럼 이제부터 나도 일을 할 때인가.”
잠이 든 창천의 몸을 조심스럽게 자리에 눕혔다.
딱딱하게 굳어진 근육들이 내지르는 비명소리가 들린다.
제법 아프고 힘들었을 텐데 안색 한 번 바꾸지 않고 잘도 참았다.
파앗!
상의를 벗겨 등 뒤로 늘어선 혈을 두드렸다.
툭툭, 툭툭.
창천의 등 뒤로 쏟아져 내리는 소요자의 손길이 바빠졌다.
어린 몸을 혹사시키는 일은 성장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는 것을 소요자는 잘 알고 있었다.
허나, 그럼에도 이런 일을 시키는 것은 다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심허운진(心許運盡) 타혈법.
소요자는 몸의 내기가 빠져나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기분 좋게 웃었다.
한때는 목숨보다도 소중했던 내공이, 이제는 한 번의 웃음만큼이나 가벼워졌다.
좋은 제자.
좋은 학생.
곤히 잠든 창천을 바라보며 소요자는 조심스레 벗겼던 상의를 다시 입혔다.
이마 위로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지만, 어째서인지 곤하지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