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녀석, 제법 많이도 읽었구나. 벌써 소우주라…….”
소요자는 처음과 달리 지저분해진 책을 살피며 붓을 들었다.
수많은 이들이 도전했다 포기한 심득이다.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창천은 아직 어린아이.
소요자는 그가 읽을 뒷장을 넘겨 글을 덧썼다. 이해하기 쉽도록 어려운 말들을 풀어 놓았다.
소요자는 조심스레 오두막을 나섰다.
이미 해가 진 늦은 저녁.
검게 물든 하늘 위로 별무리가 아름답게 흩어져 있었다.
과거 하늘도 베어 보겠다며 호언장담하던 시절, 그때의 하늘도 저리 아름다웠을까?
소요자는 조용히 자리에 앉아 흘러가는 별과 구름을 보았다. 그리고는 휘익! 검을 풀어 던졌다.
촤아악!
풀어 던진 검이 날개라도 달린 듯 허공으로 날아올라 달빛을 흘리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내 한평생 춤을 추어본 적이 없으니, 네가 대신 추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래, 학이 먼 늪가에서 우니 그 소리 하늘 높이 퍼지고, 현자(賢者)는 아무리 숨어 있어도 그 평판은 스스로 세상에 알려지는 것이라. 현인(賢人)을 구하는 길을 가르친 시라고 했던가? 현인이라…… 현인.”
소요자는 기쁘게 춤추는 검을 바라보며 털썩 자리에 누웠다.
이제는 나이를 먹어 밤바람이 시리기도 하련만, 웃음을 입에 문 몸은 시릴 줄을 몰랐다.
“소우주에 접어들었으니…… 내일부터는 또다시 말이 많아지겠구나. 소우주라…… 소우주.”
책상 위에 덮어 놓은 혜광심어가 머릿속에 흘렀다.
소우주.
무도의 시작이라는 심법의 문 앞에 서 있는 창천이었다.
* * *
창천은 책에 나와 있는 그대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아직은 무겁고 어색한 만년한철이 거슬렸지만 크게 문제가 되진 않았다.
‘……후웁.’
가슴을 크게 펴고 숨을 들이켰다.
선선한 산 공기가 폐를 가득 채우며 아랫배 깊숙이 쌓였다.
단전.
인체의 중심이 되는 그곳에 꽁꽁 숨을 몰아넣고 꾹 입을 닫았다.
‘숨을 유영하는 우주와 같이 일주천시킨다.’
책에 적힌 말을 되뇌며 집중했다.
숨이 막혀 닫힌 입이 열리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중요한 것은 생각이다.
아무것도 느껴지는 것은 없지만 상상을 멈춰서는 안 된다.
숨이 움직인다는 듯이, 숨이 생각대로 일주천할 거라 믿고 호흡을 옮긴다.
‘후우…….’
오래 참은 숨을 내뱉었다.
일주천이 잘 이루어졌는지, 과연 호흡이 단전을 지나 전신의 혈을 따라 흘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길게 참은 호흡을 뱉어 냈을 때 그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좋아. 그럼 다시!’
길게 뱉은 숨을 다시 삼키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들이마시고 회전시켜 내뱉는다.
단순했던 숨쉬기가 땀이 흐를 만큼 고단해지기까지…….
창천은 반나절이 넘도록 그렇게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제법, 나쁘지 않은 모양세구나.’
소요자는 오두막에 틀어 박혀 호흡에 집중하는 창천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글을 덧대어 쉽게 풀어 놓았다고는 하나, 혜광심어는 어려운 공부다.
궁금한 것을 묻거나 도움을 청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다.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앞서 나간다.
순풍을 만난 배처럼 빠르게 앞으로 흘러나간다.
“천성이구나. 천성이야.”
발갛게 달아오르는 창천의 얼굴을 쳐다보며, 소요자는 기분 좋게 웃음 지었다.
힘들 거라 생각했던 무도의 첫걸음이 달음질이 되어 나아가고 있다. 마치, 그를 위해 존재한다는 듯이 그렇게 혜광심어는 창천에게 꼭 맞는 옷이 되어 가고 있었다.
아득한 기분이 들어 눈을 떴을 때, 창천은 세상이 어두워졌음을 느꼈다.
‘꼬박 하루를 보낸 것인가?’
놀란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복이다.
아무것도 먹지 않은 배가 그제야 허기져 요동쳤다.
한 번만 더 한다는 것이 두 번, 세 번이 되었다.
얻은 것이라고는 숨을 쉬는 박자뿐이었지만, 새롭게 익힌 호흡은 그렇게 단시간에 버릇이 되어 남았다.
눈을 떠 걸음을 옮기면서도 호흡의 박자를 잃지 않는다.
하나, 둘, 셋, 넷…….
크게 들이마신 숨을 전신으로 골고루 돌린다.
별들이 하늘을 돌듯이…….
창천은 체내를 유영하고 있는 한줌의 숨을 들여다보며 주린 배를 잡고 개울가를 찾았다.
찰팍!
물이 튀어오르는 소리가 귓가로 들려왔다.
높은 산의 계곡.
큰 물고기는 없겠지만 바위 틈을 뒤져보면 분명 먹음직한 녀석이 살고 있을 것이다.
뒤척뒤척, 바지를 걷어 붙여 계곡 안으로 들어섰다.
차갑게 닿는 계곡물이 오랜 집중으로 어지러워진 정신을 맑게 일깨움과 동시에 잔뜩 몸을 웅크리게 만들었다.
오감이 날카롭게 섰다.
추위에, 잔뜩 웅크린 몸에 바짝 날이 섰다.
‘저 바위가 좋을까?’
창천은 계곡 위 큼지막한 바위를 바라보며 물을 거슬러 올라갔다.
만년한철 덕에 몸의 무게가 늘어서일까?
콰곽!
다리를 때리는 물살이 버겁지 않았다.
“……!”
호흡을 깊게 들이마시며 바위를 잡았다.
천천히, 허리를 이용해 굴리듯 바위를 들었다.
쿠르룩!
바위가 돌 틈을 구르며 커다란 소리를 토해냈다.
‘있다!’
창천은 파르르르 다리를 타고 전해지는 물의 움직임에 잽싸게 들어올린 바위에서 손을 놓았다.
파앗!
미약하게 요동치는 계곡물의 흐름을 따라 손을 뻗었다.
펄떡!
그러자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물고기가 튀어올랐다.
놓치기에는 아까운, 소중한 저녁밥이다.
훌쩍 튀어오른 물고기를 향해 몸을 날렸다.
‘어, 어……!’
순간, 잠시 허공에 떠 있던 몸이 빠르게 계곡물 아래로 처박혔다.
‘무겁다!’
생각했던 것보다 만년한철이 걸쳐진 몸은 무거웠다.
꾸루루룩!
물속으로 처박힌 입에서 기포가 솟아올랐다.
어째서 생각하지 못했을까?
다리가 무거워 물의 흐름이 약하게 느껴진 만큼 움직임도 둔해졌다는 것을…….
벌떡 일어나 흠뻑 젖은 옷을 보았다.
어차피 버린 옷.
창천은 신중한 얼굴을 하고 계곡의 바위를 하나하나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펄떡 뛰어오르는 고기를 다시는 놓치지 않았다.
“허, 좋은 냄새가 나는구나.”
나뭇가지를 긁어모아 지핀 모닥불에 잡은 생선을 꿰어 굽자, 산행을 즐기고 있던 소요자가 다가왔다.
<오셨어요?>
창천은 웃으며 소요자를 반갑게 맞았다.
“그래, 고기는 많더냐?”
<예, 좋은 계곡이에요. 고기도 많고, 물도 차고 맑아요.>
“그렇구나. 그런데 너무 많이 잡은 것은 아니냐?”
<아, 그게…….>
창천은 오기로 낚아 올린 고기들을 바라보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꿰어진 것이 다섯, 아직 꿰지 않은 것이 다섯, 도합 열 마리다.
소요자는 파닥파닥 튀어오르는 물고기를 나무에 꿰며 자리에 앉았다.
“남는다면 내가 먹어도 되겠지?”
<아, 네!>
소요자는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창천을 보며 미약한 불가에 마주 앉았다.
“불은 어찌 피웠느냐?”
<가지고 있던 부싯돌로…….>
“부싯돌을 가지고 있었느냐? 값어치가 나가는 물건인데 용케 가지고 있구나.”
창천은 소요자의 물음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싯돌은 보석만큼이나 값비싼 돌이다. 불이 귀한 시대, 불을 만드는 돌은 가치가 높을 수밖에 없다.
<아자가 된 뒤로 불이 소중해져서요. 어머니께서 주셨어요. 저는 불이 없으면 한 마디도 할 수가 없으니까요.>
“…….”
소요자는 그제야 빛 아래서 글을 써내려 가는 창천을 볼 수 있었다.
빛이 없으면 말을 할 수 없는 아자.
허공으로 흩어지는 연기처럼 옅게 흩어지는 창천의 웃음에 소요자는 머쓱해졌다.
티가 없는 아이가 아니다.
오히려 티가 많아 더욱 환하게 보였을 빛을 잃은 아이다.
“곧 빛이 없이도 이야기할 수 있을 때가 올게다. 그때까지…… 포기하지 말거라.”
<예! 포기하지 않아요. 말하고 싶으니까요. 꼭 불러보고 싶은 말이 있거든요.>
“불러보고 싶은 말?”
창천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 소요자의 말에 환하게 웃었다.
불러보고 싶은 말.
마음속으로 뇌까리는 그 말을 곱씹으며 창천은 잘 익은 물고기를 베어 물었다.
생에서 잡을 수 없는 단 한 번의 시간.
삶이 물처럼 곧고 바르게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