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제3장 물아일체를 궁리하다
“만병(萬兵)은 권과도 같다.”
이른 아침, 창천은 소요자의 목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그것은 혜광심어의 심득에 취해 산 지 삼 년, 작은 소년의 몸이 제법 단단해져 갈 즈음의 일이다.
<그 말씀은 권을 배우면 만 가지 병기를 배우는 것과 같다는 말씀이십니까?>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그렇다. 권을 배우는 것은 만 가지 병기를 배우는 것과 같다. 이것은 셈을 배우기 전에 수를 헤아리는 것을 먼저 배우는 일과 같이 당연한 일이다.”
초롱초롱한 창천의 눈을 보며, 소요자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삼 년이라는 시간 동안 많은 것이 변했다.
소년은 여름날의 풀처럼 자라 제법 씨알이 굵어졌다.
겉모습만 변한 것이 아니다.
어리기만 하던 말투도 변했다.
심취한 혜광심어의 고어처럼 창천의 말은 두터워져 갔다.
품위와 격이 생겼다.
지식을 배우고 지혜를 익혀 어른이 되어 가는 것이다.
‘권이라…….’
창천은 꾹 주먹을 쥐어 보며 뇌까렸다.
손에서 혜광심어를 놓은 지 하루.
텅 빈 손에 새로운 것이 쥐어졌다.
권.
소요자는 주먹을 쥐고 선 창천에게 다가섰다.
그간 알게 모르게 자라난 그의 단전을 재 보기 위함이다.
“타합!”
가볍게 손을 쥐어 권을 뻗었다.
매섭고 빠르게!
창천은 노도와도 같이 쏟아져 들어오는 권풍에 놀라 몸을 뒤로 퉁겼다.
사람의 주먹에서 저런 바람이 쏟아져 나올 수도 있는 것일까?
파악!
축을 삼은 뒤꿈치가 바닥을 패고 발자국을 남겼다.
“흐음…….”
소요자는 깊게 남은 창천의 발자국을 살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순하고 깊은 기운이 용솟음치는 것이 보였다.
버릇처럼 녹아든 호흡이 몸과 하나가 된 것이 분명하다.
“제법이구나.”
창천은 흡족하게 웃는 소요자를 바라보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스승이 무엇을 하고 있고, 무엇을 제법이라 말하는 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무엇이…… 말입니까?>
“네 공부 말이다. 시간을 헛되이 보내진 않았구나.”
“……?”
창천은 웃으며 말하는 소요자의 말을 다시금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공부를 말하는 것일까?
소요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창천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지금껏 배우고 익힌 것은 혜광심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호흡, 움직임, 네가 가진 모든 것에 깃들어 상승작용을 한다. 모르겠느냐? 네 움직임은 이미 범인의 경지를 초월해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
창천은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범인의 움직임을 넘었다는 것이 참말일까?
어렸을 적, 힘깨나 쓴다던 장사들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커다란 바위와 쌀가마니를 한 손으로 옮기던 그들…….
소요자는 자신의 능력에 대해 갈피를 잡지 못하는 창천을 보더니 멀찍이 떨어진 바위를 가리켰다.
“저것을 한 번 들어 보겠느냐?”
창천은 소요자가 가리키는 거대한 바위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눈에 봐도 커다란 바위다.
어렸을 적이라면 감히 들 엄두도 내지 못했을 바위.
창천은 마주 선 바위를 감싸안고는 두 팔에 힘을 쏟았다.
왠지 못 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
힘을 다한 기합은 흘러나오지 않았지만, 앙다문 입술과 이마 위 혈관이 잔뜩 부풀어 올랐다.
힘을 준다.
허리와 다리, 두 팔의 힘을 고루 사용해서 밀듯이 들어올렸다.
우둑, 우둑.
땅속에 깊게 박힌 바위가 먼지를 피워올렸다.
바스스스―
창천은 떨리는 몸으로 바위를 들고 일어섰다.
들었다.
두 팔로 다 감싸안을 수도 없는 거대한 바위를 들어올렸다.
“이제 알겠느냐?”
멍한 얼굴로 바위를 들고 선 창천을 보며 소요자가 물었다.
그의 내공은 미미한 것이나, 그의 몸은 호흡과 일주천이 하나 된 진정한 소우주다.
저런 거대한 바위를 드는 일쯤이야 손바닥을 뒤집는 일보다 쉬운 일.
창천은 바위를 내려놓으며 멍한 눈으로 소요자 앞에 섰다.
<제가…… 역사가 된 것입니까?>
“아니, 아니. 그보다 더한 것이 된 것이지. 네 몸은 진정한 물아일체를 이루기 위한 초석이 되었다.”
<물아일체(物我一體)……?>
소요자는 멍하니 말을 되뇌는 창천을 보며 바닥에 원을 그렸다.
“네 머리는 이미 혜광심어의 심득을 독파한지 오래다. 허나 지금의 너는 혜광심어를 사용할 수가 없다. 왜일까?”
<깨달음이…… 부족해서가 아닐까요? 단순히 읽고 외웠을 뿐 저는 아직 심득에 대해 구체적인…….>
“갈!”
변명을 쏟아 내려는 창천을 향해 소요자가 호통을 쳤다.
“자고로 정신과 물질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 했다. 물아일체. 내 언젠가 말하지 않았더냐? 네가 배울 것은 강맹한 문이다. 나약한 몸으로는 절대 그것을 헤아릴 수 없음이야.”
<그럼 저는…….>
“강해져야지.”
소요자는 큰 눈을 끔뻑이는 창천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바닥 위로 그려 놓은 커다란 원.
그 안에 슬쩍 몸을 밀어넣어 족적을 새겼다.
“혜광심어는 이미 오래 전에 외웠을 터, 오늘부터는 내 네게 직접 혜광심어의 외적인 부분을 가르쳐 주겠다. 권, 창, 도, 검. 앞으로 네가 배울 것은 병기술이다. 할 수 있겠느냐?”
웃으며 말하는 소요자의 말에 창천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목적을 위한 배움은 피하지 않는다!
삼 년 동안 혜광심어의 심득과 마주해 얻은 지론이 그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 * *
파악!
기합보다 빠른 파공성이 터져 나왔다.
입을 꾹 닫은 채, 호흡을 단절하고 온몸의 근육을 이완시킨다.
파바바박!
빠르게 내지르는 주먹에 전신으로 흘러내린 땀방울이 비가 되어 튀어올랐다.
‘제법…….’
소요자는 그려 놓은 원 안에 서서 연신 주먹을 내지르는 창천을 보며 수염을 쓸어 만졌다.
자로 잰 듯 정확한 자세이다.
너무나도 완벽한 이상적인 자세!
당기고 내지르는 근육에 탄성이 붙었다.
“흐음…….”
몇 시진이 지나도 변함없는 자세를 보며 소요자는 나뭇가지 하나를 꺾어 들었다.
권을 익힌 지 이제 보름.
빠른 성장이다.
“할 만하느냐?”
‘……!’
귓가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창천이 내지르던 주먹을 멈췄다.
<예, 이제야 뜻대로 몸이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주먹을 뻗는 것도, 발을 딛는 것도 모두 하나.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하느냐?”
소요자는 기쁨에 찬 창천의 얼굴을 바라보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은 개의치 말고 계속하라는 신호였다.
<그럼…….>
창천은 그런 소요자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자세를 다잡았다.
살짝, 말아 쥔 주먹과 곧게 편 허리가 가볍게 흔들렸다.
파악!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곧게 뻗어진 주먹이 호를 그렸다.
위에서 아래로, 아래서 위로.
자유자재로 호를 그리며 날아드는 주먹이 빨라졌다.
‘이 정도인가?’
소요자는 휙휙, 바람 가르는 소리를 내지르는 창천의 주먹을 보며 손으로 꺾은 나뭇가지를 슬쩍 뻗었다.
헉! 놀란 숨소리가 튀어나오며 주먹을 뻗던 창천의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따악!
따가운 소리와 함께 슬쩍 뻗은 나뭇가지가 창천의 몸을 때렸다.
“무엇을 보고 주먹을 질렀느냐?”
<……예?>
“무엇을 보고 주먹을 질렀느냐 물었다.”
“…….”
창천은 온몸의 털이 쭈뼛 일어서는 느낌에 가늘게 몸을 떨었다.
몸을 때린 나뭇가지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몸을 묶었다.
<보고 친 것은 없습니다. 일전에 보여주신 그대로…….>
“질렀다?”
소요자는 동그랗게 눈을 뜨고 고개를 끄덕이는 창천을 보며 그의 앞에 마주섰다.
“빠르고 자세도 좋다. 권에 실린 힘도 있다. 모르긴 몰라도, 웬만한 장정 한두 명 정도야 주먹 한 방에 날려 보낼 수 있겠지. 헌데…… 위기감이 없어.”
<예……?>
“되물을 것 없다. 말 그대로야. 위기감이 없어. 맞을 것이 없으니 피할 것도 없고, 피할 것이 없으니 맞을 것도 없겠지. 그렇게 위기감이 없어서야…… 어디 실전에 써먹을 수나 있을까.”
소요자는 자신의 말에 고개를 숙이는 창천을 보며 나지막이 자세를 잡았다.
“나와 싸워라. 내가 지르는 권의 속도와 자세, 위치, 그 모든 것을 기억하고 주먹을 뻗어라. 따라 뻗으라는 것이 아니야. 날아오는 주먹을 보고 숙지하고 피하면서 주먹을 뻗어내라는 말이야. 알겠느냐?”
<예! 알겠습니다.>
소요자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이는 창천을 쳐다보며 주저 없이 권을 내뻗었다.
파악!
바람이 일렁이고 공기가 바스러지는 권 중의 권!
창천은 쩍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게 하는 소요자의 권을 머릿속에 새기며 자리에 굳었다.
과연 저 주먹을 피해 주먹을 뻗어낼 수 있을까?
움찔거리는 근육이 곧게 펴지지 않고 굳었다.
격이 다른 속도와 움직임.
저것을 피하며 주먹을 뻗기 위해서는 무언가 다른 방법이 필요할 것만 같았다.
“후우…….”
오랜만에 신나게 주먹을 내질렀다.
그것은 옷이 젖고 긴 수염이 젖을 만큼 긴 시간이었다.
‘궁량에 빠진 모양이군.’
곧게 멈춰 선 창천을 바라보며 소요자는 웃었다.
뻗은 주먹을 내리기 무섭게 눈이 감겼다.
그 어떤 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의 머릿속에 담긴 것이라고는 오직 날아오는 권을 피할 궁리뿐…….
소요자는 그렇게 자리에 선 창천을 놓아 둔 채 산자락 아래로 걸음을 옮겼다.
곧 창이 필요할 때가 올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