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제5장 하늘을 꿰뚫다
창을 쥔 손이 물집이 잡혀 터졌다.
따끔.
터져 버린 살점을 바라보며 창천은 조용히 계곡물에 손을 담갔다.
사악.
차가운 한기가 터진 상처 위로 스며들며 몸을 찔러왔다.
따갑고 아프고 시리다.
언젠가 잃어버린 줄만 알았던 고통이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
바닥에 놓은 장창을 쳐다보며 개울물에 두 발을 담갔다.
시원하다.
땀에 젖은 몸의 피로가 청량한 찬물에 씻겨나가는 것 같았다.
쿠웅!
창천은 그대로 발을 들어 바닥을 찼다.
둥근 것은 바닥을 따라 구른다.
바닥에 놓인 장창이 또르르 계곡물 쪽으로 굴러갔다.
사아악―!
묵빛 장창이 계곡물로 파고들며 튀어올랐다.
창천은 그대로 손을 뻗어 창을 잡았다.
낯설기만 하던 창이, 이제는 제법 익숙해졌다.
주욱―!
전방을 향해 창을 길게 찔렀다.
자고로 창이란 손이 닿을 수 없는 거리를 뛰어 넘기 위한 병기.
찌르기야말로 창의 본질이 아닐까?
파앗!
내찔렀던 창을 빠르게 회수하여 그대로 다시 찔렀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창천은 튀어오르는 계곡물을 전신으로 맞으며 그렇게 기분 좋게 창을 휘둘렀다.
그때였다.
“네놈이…… 그 호호백발의 은거기인은 아닐 터. 말해 보아라. 그는 어디에 있느냐?”
흠칫!
창천의 몸이 깜짝 놀랄 만큼의 차가운 목소리.
창천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싸늘한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이곳은 그들이 둥지를 튼 이후 누구도 발을 들여놓지 않은 금지(禁止).
창천은 누군가 자신의 등 뒤에서 말을 걸어오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또 두려웠다.
달빛이 주변을 환하게 밝혀주는 밤.
<누구…… 십니까?>
창천은 조심스레 손을 들어 허공에 글을 남겼다.
소요자와의 대화는 막힘이 없다.
그는 눈이 좋았고, 무엇보다 부족한 창천의 글을 있는 그대로 헤아릴 수 있는 지혜가 있었다.
하지만 세상 모든 사람이 소요자와 같지는 않다.
“……벙어리로군.”
어둠 속의 상대는 짧게 말을 씹어 뱉으며 얼굴을 구겼다.
상대는 창천이 빠르게 써내려 간 글을 눈으로 따라잡지 않았다.
글을 읽고 답할 충분한 능력이 있지만 그리하지 않았다.
아자와의 대화로 쓸데없이 심력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도귀 염왕.
그는 겹겹이 쌓인 운무진을 뚫고 선인곡이라 불리는 이곳에 처음으로 발걸음을 한 외지인이 되었다.
‘아…….’
창천은 얼굴을 구기며 다가서는 염왕을 보며 들어올린 손을 내렸다.
그 낯선 이의 눈빛과 행동은 익숙했다.
몇 년 전.
아자가 된 뒤로 숱하게 겪어 왔던 사람들의 일관된 반응이 아니던가.
염왕은 손을 내리는 창천을 쏘아보며 슬쩍 도를 들이밀었다.
“그를 불러라. 벙어리라 해도 그에게 통하는 방법은 없지 않을 터! 나는 한시가 바쁜 사람이다.”
섬뜩한 기운이 몸에 닿았다.
<통하는 법은 따로 없습니다. 걸음이 닿으면 만날 일이 있겠지요. 계곡은 그리 크지 않으니 직접 둘…….>
파악!
길게 흘러내리는 창천의 글을 염왕의 도가 단번에 갈랐다.
염왕은 빠르게 내리그은 도를 피해 쏜살같이 몸을 퉁기는 창천을 쏘아보며 말했다.
“제법, 반응이 빠른 놈이구나. 멍청하지 않다면 그 반응만큼 상황파악도 빠를 터. 두 번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를 불러.”
<무, 무슨 짓을!>
창천은 말을 적는 자신의 팔을 그처럼 무자비하게 대하는 것에 놀랐다.
상대는 노골적인 적의를 숨기지 않는다.
“말은 더 필요 없다.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 따위가 그를 부를 리 없지. 그를 부를 방법이 정녕 없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죽어라. 피 냄새는 사람을 부르는 법이니까.”
“……!”
염왕의 눈에서 줄기줄기 뻗어 나오는 살의.
창천은 태어나 처음으로 맞는 강렬한 살기에 바짝 긴장해 창을 쥐었다.
그가 고수라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도를 쥔 모습, 도를 휘두르는 자세, 그 모든 게 완벽해 보인다.
‘하지만…….’
창천은 도귀 염왕의 모습이 어째서인지 기울어져 보였다.
거대한 무를 포용하지 못할 만큼 문이 부족한 것일까?
아니, 분명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는 계곡 전체에 펼쳐진 운무진을 뚫고 들어왔다.
그것은 힘만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창천은 자세를 다잡는 염왕을 바라보며 휘휘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은 그가 기울어져 있다, 아니다를 따지며 허튼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살기가 서릿발같이 뻗어 나왔다.
거대한 염왕의 도는 목전에 섰고, 창천 스스로의 몸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손에 쥔 장창 하나뿐이다.
사악.
땅을 밟는 두 발에 힘이 들어갔다.
마음 같아서는 힘껏 등을 돌리고 뛰어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리하면 단칼에 목을 베일 것 같았다.
지난날부터 지금까지 인내하며 배웠던 억지 호흡 덕분에 날카로워진 오감이 그리 전하고 있었다.
파앙―!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한 치.
날렵하게 휘둘러진 대도가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빠르다!’
창천은 생각하기도 전에 목전까지 날아든 대도를 창으로 쳐내며 휙 몸을 날렸다.
“제법, 하는구나.”
도와 창에서 튀어오른 불똥이 밤하늘 위로 사라지기도 전, 염왕의 도가 도약한 창천을 향해 재차 쏟아져 들어왔다.
캉―!
황급히 창을 뻗어 막았지만 참마도는 불꽃을 일으키며 창천의 목을 향해 흘러들었다.
철갑옷을 입은 기마병도 단숨에 잘라 낸다는 참마도다.
거대한 크기만큼이나 투박하고 다루기가 까다로워 제대로 사용하는 이가 없는 대도.
염왕은 그러한 참마도를 마치 자신의 수족처럼 다루고 있었다.
으득!
창천은 창을 타고 흘러드는 참마도를 향해 이를 악물며 창을 밀었다.
투웅―!
장창이 쇳소리를 울리며 찰싹 달라붙은 염왕의 참마도를 쳐냈다.
이화접목의 수다.
조금이라도 밀어 내는 순간이 늦었더라면 그대로 창과 함께 자신의 목을 쳐냈을 것이다.
팍!
떨어져 나가는 참마도와 염왕을 보며 창천은 힘껏 장창을 휘둘렀다.
부웅―!
쇳덩이를 녹여 만든 장창이 한순간 활처럼 휘어지며 튕겨 나가는 염왕의 몸을 뒤쫓았다.
콰앙!
사람의 몸을 때리는 것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괴음이 터졌다.
장창을 잡은 두 손이 저릿저릿해져 올 만큼 매서운 강수!
바닥에 처박힌 염왕의 그림자 위로 부스스 먼지가 피어올랐다.
“참마도를…… 받아 넘겼다?”
참마도를 바로 세우며 일어서는 염왕의 눈에 귀기가 서렸다.
애송이라고 우습게 본 것일까?
다 잡았다고 생각한 순간 튕겨 나온 참마도를 떠올리며 염왕은 얼굴을 붉혔다.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다.
현 무림의 검은 하늘을 지배하는 염왕의 도가 듣도 보도 못한 한낱 벙어리에게 튕겨 나오다니, 인정할 수 없는 일이다.
우웅―!
바닥으로 낮게 내리깔린 참마도가 울음을 터트렸다.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지독한 살기가 염왕의 몸을 휘감았다.
도귀!
그는 말 그대로 도에 미친 귀신이었다.
“죽은 것도 모르는 아둔한 잡귀마냥 구천을 떠돌게 만들어 주마.”
파스스슥!
내딛은 염왕의 걸음 위로 내리깔린 돌멩이가 바스러져 먼지로 화했다.
“……!”
창천은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적셨다.
눈앞에 서 있는 거대한 존재감.
차가운 땀방울이 이마와 등줄기를 타고 흐르자 비로소 눈앞에 선 이가 바로 보였다.
고수!
아니, 그는 이미 수를 넘어선 사람이었다.
파악!
한순간 넋을 잃고 쳐다보던 염왕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이형환위!
염왕은 지르밟은 창천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껍질부터 벗겨주마.”
창천은 한순간 바닥에서 솟아오른 염왕의 모습에 기겁하며 몸을 퉁겼다.
사악!
얇게 올려친 참마도가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날카로운 호를 그렸다.
즈팟!
높게 뻗어 오른 참마도의 날 끝에 달빛이 갈라졌다.
달빛을 벤 것일까?
창천은 눈앞에서 갈라지는 푸른 달빛을 바라보며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무언가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호를 그리며 날아오른 날 끝으로 흘러나오는 푸른 달빛!
사악.
달빛에 깃든 찬바람이 몸을 감싸는 듯싶었다.
울컥!
진탕된 가슴이 피를 토했다.
길게 베어진 가슴팍을 따라 흘러내리는 붉은 선혈.
창천은 스치는 바람에 난도질당한 몸을 내려다보며 눈을 부릅떴다.
“제법 질긴 가죽이구나.”
염왕은 피를 흘리며 물러서는 창천을 쳐다보며 웃었다.
오랜만에 피를 맛본 참마도의 도신이 부르르 떨렸다.
마치 피 맛이 감질난다는 듯이.
조금 더 깊게 베어 버릴 것을.
후둑, 참마도에 묻은 피를 털어 내며 재차 도를 쥐었다.
“…….”
창천은 참마도를 고쳐 잡는 염왕을 노려보며 손에 쥔 장창에 힘을 주었다.
쿵쿵! 쿵쿵!
심장이 벼락처럼 요동친다.
고통을 느낄 틈도 주지 않는 차가운 바람.
창천은 가닥가닥 끊어져 나가는 호흡을 가까스로 붙잡아 숨을 삼켰다.
두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느껴진다.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어머니를 떠나보낼 때 느꼈던 그 느낌.
턱까지 차오른 죽음의 물길이 눈앞에 일렁이고 있었다.
‘꼭 한 번…… 해 보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창천은 귀신과도 같은 염왕을 노려보며 겁먹은 다리를 흔들어 깨웠다.
죽음도 배움이라, 마지막 숨쉬는 순간까지 배움을 놓지 말라 배웠다.
“…….”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두근두근.
심장이 달음질치며 숨을 빨아들였다.
온몸으로 고루 뻗어 나가는 편안한 기분.
창천은 그제야 지금껏 억지 버릇을 만들었던 호흡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물아일체라, 따로 돌던 몸과 마음이 만났다.
따악―!
돌멩이가 튀어오르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창천은 한순간 빛살처럼 빠르게 뻗어 나오는 염왕의 도를 바라보며 손에 쥔 창을 들었다.
다각!
굳어졌던 다리가 물 흐르듯 유연하게 흘렀다.
아직 멈추지 않은 핏물을 바라보며 창천은 손에 쥔 장창에 몸을 맡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