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연재 > 무협물
은거기인
작가 : 건아성
작품등록일 : 2016.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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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화
작성일 : 16-11-17     조회 : 437     추천 : 0     분량 : 4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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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화

 

 

 

 

 

 ‘이놈 봐라?’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는다.

 한치의 물러섬도 없이, 오히려 장창을 쥐고 다가서는 창천을 보며 염왕은 얼굴을 찌푸렸다.

 도를 휘두르는 기세가 약했던가?

 받은 고통이 덜했던가?

 도망쳐도 시원치 않을 판에 창을 쥐고 달려드는 창천을 보며 염왕은 으드득 이를 갈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는 놈이다.

 스팟!

 거대한 염왕의 참마도가 다시금 푸른 호를 그렸다.

 부서지는 달빛 속에 피어오르는 한 줄기 푸른 바람!

 조금 전 그 자신이 당했던 것과 같은 것이다.

 창천은 몸을 휘감는 날카로운 바람을 맞으며 손에 쥔 장창을 내질렀다.

 발끝부터 손끝까지 긴장을 풀고 유연해진 근육 위로 찌릿한 호흡이 관통했다.

 퍼엉―!

 내지른 장창이 폭발하듯 공간을 꿰뚫었다. 그와 동시에 참마도가 뿜어 내는 예기에 베인 창천의 몸이 바닥으로 나가 떨어졌다.

 “……큭!”

 도를 내지른 찰나의 순간.

 염왕은 도를 내린 직후 공간을 관통해 들어오는 거대한 장창을 보며 황급히 몸을 굴렸다.

 애송이의 몸을 베었다고 생각한 직후다.

 사선을 넘나들며 날카로워진 오감이 경고음을 울렸다.

 휘이익!

 꿰뚫은 공간을 메워 넣기라도 하듯 창 그림자가 거센 돌개바람같이 따라붙었다.

 “네놈이…… 네깟 놈이!”

 한껏 바닥을 나뒹군 염왕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수치심이다.

 한낱 벙어리의 창에 몸을 굽혀 바닥을 나뒹굴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울컥!

 창천은 진득하게 흘러나오는 핏물을 토해내며 차가운 바닥에 얼굴을 박았다.

 온몸의 힘이 피와 함께 흘러나가는 것만 같았다.

 손가락 하나, 눈꺼풀 하나 까딱할 힘이 없었다.

 그때였다. 염왕이 일어나 천천히 창천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는 냉혹한 눈빛으로 쓰러진 창천을 보았다.

 “나를 만난 것을 후회하며 영원히 구천을 헤매어라, 벙어리!”

 쇄엑―!

 쓰러진 창천의 목 위로 염왕의 거대한 도가 떨어져 내렸다.

 순간.

 움찔, 도를 날리는 염왕의 손이 굳었다.

 죽음!

 피할 수 없는 어두운 기운이 몸을 감쌌다.

 촤악―!

 휘두른 도가 비껴 나갔다.

 단순한 일이었다.

 그것은 도를 들어 내밀고 있는 목을 치면 되는 간단한 일이다.

 그야말로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쉬운 일!

 헌데, 염왕은 그리하지 못했다.

 잘라 내지 못하고 목 언저리를 깊게 스친 도상을 끝으로 더는 도를 밀어넣지 못했다.

 피분수 사이로 번쩍이는 것.

 염왕은 치솟아 오르는 피분수 사이로 번쩍이는 무언가에 경악했다.

 생각할 것도 없이 등을 돌려 그대로 미친 듯 내달렸다.

 도를 잡을 기운도, 생각도 나지 않는다.

 의식을 잠재울 만큼의 본능!

 철렁 내려앉은 가슴이 멈춰 섰다.

 뒤를 돌아봐서도 안 된다.

 걸음을 멈춰서도 안 된다.

 도망쳐야 한다.

 최대한 여기서 멀리 떨어져야 한다.

 그것은 무인의 본능을 뛰어 넘은 생명체로서의 본능이다.

 도조차 쥘 수 없게 만드는 이 압도적인 존재감과 피분수 사이에서 번뜩였던 그것!

 그것은 과거, 무의식 속에 깊이 새겨진 그것!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그것!

 도귀는 확신했다.

 그것은 바로 무존의 신검이다.

 

 “천아!”

 놀란 가슴에 서둘러 몸을 날렸다.

 신검을 던진 직후.

 소요자는 창천의 목을 스치는 참마도에 두 눈을 부릅떴다.

 욕심이 화를 불렀다.

 처음부터 상대가 안 되는 싸움이었거늘…… 무엇을 바랐던 것일까.

 소요자는 솟아오르는 피보라를 가르며 창천의 혈을 짚었다.

 투둑, 투둑!

 미친 듯 솟아오르던 피가 멈추며 자욱하게 깔린 피 안개를 지웠다.

 처참한 모습.

 피안개 사이로 드러난 창천의 상태는 좋지 않다.

 스친 도가 경동맥을 잘랐다.

 피를 너무 많이 쏟았다.

 이 정도라면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목숨을 잃을 지 모른다.

 “아…… 아, 아!”

 소요자는 파리해진 창천을 자리에 주저앉혔다.

 이대로 보낼 수는 없다.

 자신의 욕심에, 앞선 조바심 때문에 생긴 일이다.

 결코 창천을 먼 곳으로 보낼 수는 없다.

 “…….”

 창천은 흐릿해진 세상을 바라보며 힘겹게 손을 들어올렸다.

 차가워진 등 뒤에 닿는 따스한 손길.

 언젠가 느껴본 적 있는 온기다.

 그가 온 것이다.

 세상 누구보다도 자애롭고 소중한 사람.

 꼭 한 번 소리 내어 불러보고 싶던 사람.

 “됐다. 무리하지 마라. 괜찮아, 이 정도쯤은 일도 아니다. 내…… 결코 너를 보내지 않는다.”

 힘겹게 들어올리는 창천의 손을 보며 소요자가 황급히 말했다.

 지금은 작은 힘도 쓰게 해서는 안 된다.

 생과 사의 갈림길이다.

 일말의 힘이라도 아껴 삶의 끈을 붙잡아야 한다.

 ‘그렇지만…….’

 창천은 힘겹게 들어올린 팔을 내리는 소요자의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스스로의 상태는 스스로가 가장 잘 안다고 했다.

 죽음의 향기가 반갑지는 않지만 친숙한 냄새다.

 아버지의 뒷모습이 그러했고, 어머니의 웃음이 그러했다.

 창천은 힘겹게 전신을 타혈해 나가는 소요자의 모습을 그리며 눈을 감았다.

 모든 것이 아득해지고 있다.

 “안 돼!”

 툭, 떨어져 내리는 창천의 목에 소요자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추궁과혈(推宮過穴)로는 부족하다.

 아무리 내공을 쏟아 부어도, 이대로라면 창천을 놓칠 것만 같다.

 ‘절대…… 절대로 이렇게는…….’

 소요자는 희미해져 가는 맥을 느끼며 허공을 향해 던진 검을 회수했다.

 쇄엑―!

 허공을 떠돌던 검이 그대로 소요자의 손에 빨려 들어가듯 쥐어졌다.

 이 아이를 살리는데 필요한 것이 있다면 준다.

 무엇이든 내어 줄 수 있다.

 스윽!

 손에 쥔 검을 들어 소요자는 팔뚝을 그었다.

 푸확!

 붉은 피가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소요자는 팔뚝 위로 솟아오르는 핏줄기를 바라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줄기차게 솟아오르는 핏줄기를 보며 한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하지만 이대로 멈출 수는 없다.

 이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피.

 그렇다면 준다.

 스화악!

 분수처럼 솟아오른 핏물이 창천의 미약한 호흡을 타고 흘러들었다.

 그러자 파리하게 메말라가던 창천의 입술에 생기가 돌았다.

 사그라지던 생이 흘러드는 핏물에 다시금 불을 지핀다.

 식어가는 심장을 다시금 불태울 뜨거운 피!

 창천은 아득해져 가는 정신이 맑아짐에 따라 반쯤 떨어졌던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종잡을 수 없는 상황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혼미했던 의식이 서서히 돌아왔다.

 짙게 느껴지던 죽음의 향기도 더는 느껴지지 않는다.

 ‘설마……!’

 코끝을 스치는 피 냄새에 고개를 들었다.

 붉게 허공을 유영하는 핏물.

 창천은 단박에 그 피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

 등 뒤로 느껴지던 따스함이 식어가고 있다.

 “정신이…… 드느냐?”

 희미하게 귓가를 울리는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잔뜩 힘이 빠진 목소리다.

 어둠이 짙게 내리깔린 목소리다.

 “너무 욕심을 부렸어. 한 걸음 물러서서 지켜본다는 것이 그만 그렇게 되었다. 시간을 넉넉히 두고도 충분히 넘을 수 있는 벽이었는데 말이야.”

 창천은 끊임없이 흘러드는 핏줄기에 이를 꽉 깨물었다.

 그가 하고 있는 일이 무슨 일인지 안다.

 더 이상은 안 된다.

 이 이상은 위험하다!

 “가끔은…… 그렇더구나. 나보다 더 나같이 느껴져서 더욱 소중한 것들이 가끔씩 생기더구나. 내게는 네가 그러했다. 나보다 더 나 같고, 그래서 더 욕심이 나고 조바심이 난 게야.”

 ‘그만…… 그만!’

 창천은 점점 더 작아지는 소요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세차게 고개를 휘저었다.

 점혈된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손도 발도 움직이지 않는다.

 ‘아…… 아, 아!’

 창천은 점점 사그라지는 소요자의 존재감을 느끼며 질끈 눈을 감았다.

 말이 나오지 않는다.

 아무리 악을 써 봐도 죽어 버린 목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예전에 떠나는 아버지를 잡지 못했다. 그저 떠나가는 아버지 등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가슴으로 소리쳤다.

 가지 말라고…… 그만 하고 돌아서라고, 울고 또 울었다.

 “보고 싶었다. 나를 넘는 너를! 그것을 지켜보는 나를…….”

 털썩!

 힘겹게 버텨 오던 소요자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소요자는 보았다.

 창천의 눈을…… 그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보았다.

 그렇기에 멈추지 않았다.

 그 모습에, 눈물 흘리는 창천에게 모든 것을 주고 싶었다.

 자신의 실수로 인해 일어난 모든 것들을 덮을 만큼 큰 것을 주고만 싶었다.

 『사……, 사부님!』

 소요자의 사그라진 기운과 더는 흐르지 않는 핏물을 보며 창천은 마음으로 소리쳤다.

 왜 목소리를 잃었을까.

 어째서 또 이렇게 붙잡지 못한 것일까.

 창천은 주룩, 두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떨구며 말 한 마디 할 수 없는 자신을 원망했다.

 전하고 싶었다.

 다시금 말을 하게 된다면, 가장 처음으로 가장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꼭 불러보고 싶었다.

 “사부님이라…… 허허. 사부님이라…….”

 ‘아……!’

 “좋구나. 너는 네 마음만큼이나 맑고 좋은 목소리를 가지게 되었구나. 나의 제자 창천아.”

 절망과 원망 때문에 망연해졌던 창천의 가슴에 꽃이 피었다.

 소요자.

 힘겹게 검을 의지하고 앉아 있는 그의 미소가, 눈물로 흐릿해진 창천의 눈에 가득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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