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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거기인
작가 : 건아성
작품등록일 : 2016.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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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화
작성일 : 16-11-21     조회 : 518     추천 : 0     분량 : 46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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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화

 

 

 

 

 

 부글부글!

 창천은 곱게 연기를 피워 올리는 탕약기를 정성스레 부채질했다.

 좋은 산에 살고 있었다.

 책으로 확인한 것만을 가지고도 그리 어렵지 않게 약초를 구할 수 있는 명산이다.

 다행이다.

 탕약기 속에서 달여진 탕약이 사부님의 회복에 도움을 줄 것을 생각하니 흐뭇해졌다.

 잠시 후, 탕약기에서 탕약을 걸러 사발에 따랐다. 그리고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그래, 왔느냐?”

 쇠약한 목소리가 열린 오두막 문 틈으로 흘러나왔다.

 창천은 반갑고 정겨운 웃음을 마주하며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약을 다려 왔습니다. 일전에 후일을 생각해 한 번은 읽어 두는 것이 좋다던 책자에서 찾은 것들을 토대로 만들어 보았습니다.』

 “허허, 그러하느냐? 내 괜한 수고로움을 끼쳤구나.”

 『아니, 아닙니다. 사부님.』

 소요자는 가만히 고개를 흔드는 창천을 바라보며 기분 좋게 웃었다.

 맑은 소리가 마음을 울려온다.

 혜광심어다.

 말을 못해 애를 태우던 그가 결국 혜광심어를 익혔다.

 혜광심어의 본질은 내공의 강함이나 광범위한 지식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부가적인 요인일 뿐이다.

 순수한 갈망과 내면의 진심이야말로, 진정한 혜광심어의 본질이다.

 소요자가 그러했고, 지금 눈앞에 있는 창천이 그러했다.

 『…….』

 창천은 힘겹게 약사발을 받아 마시는 소요자를 걱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소요자는 수십 사발은 족히 될 자신의 생피를 뽑아 창천에게 먹였다.

 진혈이라 하던가?

 고수는 그러한 피를 아낀다.

 소요자와 같은 절정 고수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고수의 진혈은 영약보다 더욱 구하기 힘들고, 누구도 내어 놓지 않는다는 내공보다 더한 생명이다. 힘겹게 구해 마신 영약의 힘이 있고, 영기의 맥이 숨쉬는 것이 바로 진혈이다.

 그런데 그것을 아낌없이 내주었다.

 왜, 어째서?

 창천은 묻고 싶던 그 말을 가슴에 묻었다.

 초췌해진 소요자의 모습이 가슴을 후벼 판다.

 아프다.

 가슴이 미어지게 아프다.

 창천은 그 아픔 때문에 제대로 고개를 들어 사부를 볼 수 없다.

 그에게 있어 소요자의 쇠약해진 모습은 칼로 가슴을 후비는 것보다 더한 상처였다.

 “무엇을 그렇게 걱정하고 미안해하고 있는 것이냐, 천아.”

 『아…….』

 소요자는 제대로 고개를 들지 못하는 창천을 보며 툭툭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비틀!

 전과는 다른 몸뚱이가 잠시 중심을 잃었지만 소요자는 개의치 않았다.

 소요자는 한순간 수십 년을 늙어 버렸다.

 과도한 추궁과혈로 단전이 비고, 빠져 나간 진혈에 지금껏 쌓아온 많은 것들을 잃었다. 무인으로서 이보다 큰 상실감은 없을 터였다.

 헌데, 소요자는 아무 말없이 웃었다. 그 큰 상실감이 나쁘지 않았다. 이렇게 두 발로 서서 보고 싶었다.

 새로운 말에 눈을 뜬 창천을 보고 싶었다. 그랬기에 나쁘지 않다. 고강했던 무공은 사그라졌지만 마음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득하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잘 안다. 허나, 그것이 최선이었어. 내게도 네게도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욕심을 부려 화를 얻었다. 허나,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아. 결과적으로 나는 내가 바라던 것을 얻었고, 너 역시 바라던 것을 얻지 않았느냐.”

 『하지만…….』

 소요자는 습관적으로 올라서는 창천의 팔을 잡은 채 말했다.

 “나는 네 목소리가 듣고 싶었고, 너는 내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너는 내 욕심에 목숨을 내어 놓았고, 나는 내 욕심과 네 바람에 내 목숨을 내어 놓았어. 그것이면 충분하지 않느냐. 우리는 서로 원하는 것을 얻었어. 후회할 필요도, 감정을 삭여야 할 이유도 없다. 잃지 않고 얻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잃은 만큼 얻는 것이 나쁘지는 않지 않느냐. 좋은 것은 좋은 눈으로만 바라보면 되는 게야.”

 『아…….』

 창천은 맞잡은 손으로 느껴지는 따스한 온기에 차마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왜 잊고 있었을까?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소요자가 눈앞에 살아 숨쉬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부님……, 사부님…….』

 소요자는 고개 숙여 우는 창천의 어깨를 다독이며 웃었다.

 중중무진이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소요자에게 있어 창천은 주변이 아닌 중심이었을지 모른다.

 

 * * *

 

 “……그분이 그곳에 있었단 말인가?”

 하늘에서 가장 가까운 누각 마천루.

 검귀 혈마소는 전서구가 가져온 소식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글에 적힌 이름만으로도 전신이 떨려온다.

 “하지만 그분은 돌아올 수 없다. 아니,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다만, 다만…….”

 혈마소는 떨리는 몸을 추스르며 조용히 뇌까렸다.

 무림을 버리고 도망친 그다.

 이렇게 떨고 있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만에 하나라는 것이 있다.

 절대 말한 바를 어길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은 두려움은 쉽사리 가시지 않는다.

 믿는다.

 허나, 그래도 두려운 것은 그의 절대적인 힘 때문이다.

 이전에도 그랬고 절대자의 자리에 올라 하늘에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은 지금도 그렇다.

 그는 무섭고도 존경스러운 사람이다.

 스윽.

 구구구 울고 있는 전서구(傳書鳩)를 바라보며 붓을 들었다.

 일단은 지켜본다.

 아니, 차후에도 지켜보아야만 할 인물이다.

 무존 소요자.

 빠르게 써내려가는 붓끝으로 조바심이 흘렀다.

 계획을 수정해야 한다.

 “후우, 도귀 염왕이 거처를 옮겨야겠군. 그놈들이 냄새를 맡지 못해야 할 텐데……. 선인곡이라, 골치 아프게 되었구나.”

 화르륵.

 염왕이 보내온 전서가 한줌의 재로 화해 바람에 날렸다.

 

 

 

 제6장 검(劍)

 

 

 

 

 

 새벽닭조차 아직 울지 않은 이른 새벽.

 창천은 어둑한 하늘을 바라보며 창을 집어 들었다.

 투웅!

 가볍게 들어 바닥을 퉁겼다.

 그리하자 그 소리가 쇳소리답지 않게 맑게 울려 퍼졌다.

 푸드득!

 징처럼 울려 퍼지는 소리에 놀란 새들이 날아올랐다.

 대나무처럼 곧게 뻗은 창신과 송곳처럼 날카롭게 이를 세운 창머리.

 창천은 손에 쥔 장창을 들어 주욱 내질렀다.

 파앙―!

 힘껏 뻗은 장창이 바람을 때리듯, 명쾌한 소리가 갈라진 바람을 타고 흘렀다.

 좋은 느낌이다.

 곧게 뻗은 창끝에는 거침이 없다.

 호흡을 따라, 생각을 따라 마치 내 몸처럼 흘러나간다.

 “좋구나.”

 『아……!』

 작게 울리는 목소리에 창을 뻗던 창천의 몸이 돌아섰다.

 몰래 오두막을 나섰는데, 그 소리가 들린 모양이다.

 “나이를 먹으면 밤잠이 짧아지는 법이지.”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이는 창천의 모습에 소요자가 웃으며 말했다. 검을 지팡이 삼아 서 있는 소요자의 모습에는 흔들림이 없다.

 피죽도 못 먹을 만큼 초췌했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는 거악같이 살아온 사람이다.

 높게 살았다.

 험난한 길을 홀로 개척하며 걸어왔다.

 팔다리를 모두 잃은 것이 아닌 이상, 다시 일어서는 것은 일도 아니다.

 남의 손을 빌 것 없이 스스로의 손으로, 스스로의 의지로 섰다.

 “호흡은 많이 맑아졌느냐?”

 『아, 예. 전과 같이 억지로 숨을 붙이지 않아도 이제는 자연스레 몸에 붙는 느낌이 듭니다.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이제는 호흡법을 떼는 것이 더욱 불가능할 듯싶습니다.』

 “허허…… 벌써 그리 되었느냐. 그래, 좋은 일이구나.”

 창천은 기쁘게 웃는 소요자의 모습에 방긋 따라 웃었다.

 더는 입을 열지 않아도, 손을 들지 않아도 말할 수 있다.

 혜광심어는 단순한 공부가, 단순한 전음이 아니다.

 마음을 전하는 것이다.

 육신을 벗어나, 생각을 공간의 제약 없이 전할 수 있다.

 그렇기에 불도이고 해탈이며 신기이고 심어(心語)인 것이다.

 “흐음…… 그렇다면 도는 따로 쥘 필요가 없겠지?”

 『예?』

 “도, 칼 말이다.”

 『아…….』

 창천은 소요자의 말에 잠시 뒷머리를 긁적였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망설였다.

 “꼭 몸으로 익혀야 하겠느냐?”

 『그게…….』

 소요자는 뒷머리를 긁적이는 창천을 바라보며 웃었다.

 “이미 머릿속에 다 가지고 있지 않느냐. 도의 움직임과 모습, 사용법과 효과, 모든 것이 네 머릿속에 있을 터인데 무엇을 그리 생각하느냐. 도를 전문적으로 잡고 싶은 게냐? 네 머릿속에 있는 그의 도는 한 자루의 완성된 도. 그 이상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도수(刀手)가 되어야 할 게다.”

 『…….』

 바람을 가르고 날아들던 염왕의 매서운 도가 창천의 머릿속을 스쳤다.

 달빛을 가르고 바람을 타고 쏟아져 들어오던 도의 예기가 다시금 떠오르자 몸이 오싹해졌다.

 아름답고 신기한 광경이었지만, 결코 다시 겪고 싶지는 않은 일이다.

 “흠, 그리하면 이제 그만 검을 쥐어 보는 것이 어떠하냐. 본 적도 잡아 본 적도 없지만, 지금의 너라면 깊이 궁리를 하지 않아도 검에 대해 느끼고 다룰 수 있을 터. 어디 한 번 잡아 보겠느냐?”

 창천은 넌지시 말을 묻는 소요자를 보았다.

 『검을 잡게 하고 싶으십니까?』

 “험……! 그게,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길게 자란 수염을 쓸어 만지며 당황하는 소요자의 모습에, 창천의 얼굴에 웃음이 피었다.

 『잡겠습니다. 처음부터 잡으려고 했던 일. 조금 일찍 잡아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요.』

 “그리 하겠느냐?”

 『예, 사부님.』

 소요자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안심했다.

 처음으로 돌려 말해 보았다.

 조바심이 이는 것을 알면서도 감추지 않았다.

 보고 싶다.

 창천이 검을 잡은 모습을, 자신의 제자가 검도에 닿는 모습이 궁금해 견딜 수가 없다.

 “그럼, 두 팔을 이리 주겠느냐?”

 『팔 말씀이십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소요자를 바라보며 창천은 조심스레 두 팔을 모아 뻗었다.

 어찌해 그가 팔을 달라 말하는 지는 몰라도, 그의 말이라면 의심치 않고 내어 줄 수 있다.

 “좋은 팔이 되었구나. 잘 견디어 주었어.”

 까앙!

 팔뚝에 걸린 만년한철 위로 소요자의 검이 닿았다.

 스친 것일까?

 아니면 잘라 밀어넣은 것일까?

 설컹.

 검날에 닿은 만년한철이 두부처럼 깨끗하게 잘려 바닥에 떨어졌다.

 투욱!

 창천은 눈앞에서 벌어진 놀라운 상황에 눈을 번쩍 떴다.

 이것이 이리도 가볍게 잘릴 수 있을까?

 달빛을 가른 도의 한줄기 바람처럼 번뜩 빛이 난 검광에 창천의 마음이 홀렸다.

 “나는 지금 지난 삼 년간 너와 함께 한 네 손을 잘랐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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