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스팟!
해가 지고 어스름이 낀 저녁, 창천은 오두막을 열고 나와 검을 들었다.
다른 것은 비껴두더라도, 눈앞의 것을 먼저 풀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늦저녁의 산바람이 꺼내든 검날에 갈라져 흩어졌다.
바람에 스며든 숲 냄새가 퍼져 나가며 혼탁해진 정신을 일깨웠다.
『후욱―!』
폐로 가득 찬 호흡을 한줌도 남김없이 내뱉었다.
텅 빈 호흡, 텅 빈 마음.
검을 쥐고 선 창천의 눈빛이 투명하게 변했다.
보는 것을 비추는 거울처럼, 눈앞의 숲이 창천의 눈에 차올랐다.
스윽, 스윽.
텅 빈 호흡을 천천히 들이마시고 내뱉으며, 검을 그었다.
허공을 베고 찌르고 검면으로 때린다.
물처럼 부드럽게 흘러내린 검은 창천과 동화되며 호흡을 불렀다.
우웅―
울음을 토해내는 검이 한순간 달빛을 삼킨 듯 푸르게 물들었다.
파악!
순간 빛을 머금은 검날에 예기가 솟아오르며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나무를 베어 넘기기 시작했다.
서걱, 서걱.
베면 베는대로, 찌르면 찌르는대로, 치면 치는대로 검이 겨눈 나무들이 베어지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쿵! 쿵! 쿠웅!
크고 곧게 자란 나무들이 바닥으로 쓰러지며 커다란 소리를 토해냈다. 울창한 나무들로 빽빽했던 숲이 한순간 너른 공터가 되었다.
“검이 형(形)을 넘어섰구나.”
『아……, 오셨습니까.』
소란스런 소리에 오두막을 나선 소요자의 얼굴에 웃음이 걸렸다.
검을 쥐고 선 자세와 베어 넘어간 나무의 모습으로 보건데, 창천의 호흡은 이미 검과 닿아 있다.
검과 몸이 하나 된 검신합일(劒身合一)의 경지다.
변변한 검술을 배우지 않고도 검이 형을 넘어섰다.
가벼운 권각술에서 시작해, 스스로의 힘으로 이렇게까지 무공을 일깨워왔다.
“헌데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구나. 말해 보거라. 무엇이 그리도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냐?”
창천이 길게 한숨을 토해내며 답했다.
『제 검이 아닙니다. 무한한 우주에 제 우주가 없는 것처럼, 다른 이의 생각을 따라 답습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 검이 아닙니다. 언젠가 제 몸을 베었던 그의 도입니다.』
“허, 어찌 그리 생각하느냐?”
『그의 도를 보고 생각하고 따라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네 것이 아니다?”
창천은 말을 되묻는 소요자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달빛을 가른 염왕의 도에 사로잡혀, 그것을 훔쳤다.
그 생각대로 달빛을 가르고 바람을 품었다.
그랬기 때문인지, 가슴에 무언가 응어리가 남았다.
“천아. 배움에는 줄기가 있다. 물론, 그런 줄기의 원류와 기원도 역시 있지. 하지만 모두가 원류와 기원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한 가지에서 다른 줄기가 나듯 원류와 기원도 변하는 것이야.”
『하지만…….』
“네 검은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했을 뿐이다. 아이는 어른이 되기까지 많은 것을 보고 배워야 해. 그것은 훔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어른이 되기 위한 기본적인 학습인 게야. 네가 원류만을 생각해 검을 잡는다면 내 무슨 필요가 있겠느냐. 그리 된다면 나는 네게 무엇도 가르칠 수가 없지 않겠느냐.”
창천은 어깨를 다독이며 건네는 소요자의 말에 한숨을 거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말처럼 눈앞의 것만을 보고 달려서는 안 된다. 멀리 보거라. 네 검은 언젠가 하늘에 닿을 검이 될 것이야.”
하늘.
창천은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소요자의 말을 가슴에 품었다.
하늘에 닿는 검이라…….
그 뜻을 알 수 없어 피식 웃음도 새어 나왔지만, 나쁘지 않았다.
두 손보다는 조금 더 긴 검이 낫지 않은가.
이룰 수 있을 지 모를 일에 자꾸 웃음이 새어 나왔다.
좋은 기분이다.
우웅―!
창천의 웃음이 기쁜 것인지, 달빛을 품은 묵룡이 만족한 듯 울었다.
하늘에 닿는 검.
자세를 고쳐 잡는 창천의 얼굴 가득 웃음이 걸렸다.
* * *
“그래서 네놈이 뭘 어쩌겠다는 건데? 덤비겠다는 거냐?”
길을 막아선 사내의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소요자의 뜻에 따라 마을로 내려온 지 불과 몇 시진.
그것은 마른하늘의 벼락처럼 돌연히 찾아왔다.
“나, 나으리…….”
바짓자락을 잡고 늘어지는 노인을 보며 창천은 손에 쥔 검을 내렸다.
처음 보는 순간부터 눈에 밟혔다.
노인의 뒤로 길게 늘어선 난민들의 무리.
전쟁 난민과는 다른 그들의 행색을 보며 눈을 감았다.
전국적으로 번진 것은 국가적인 전쟁이 아닌 농민 봉기다.
농민들은 같은 농민에 의해 가장을 잃었고, 보호를 받아야 할 나라로부터 역적의 씨앗으로 낙인찍히며 버려졌다. 도시와 촌락 그 어디에서도 난에 휘말린 농민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늙은 노인들과 여자, 그리고 아이들을 돌봐 줄 가장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난민(難民; 전쟁이나 재난 따위를 당하여 곤란해진 백성)이 난민(亂民; 무리를 지어 다니며 나라를 어지럽게 하는 백성)이 되어 버린 것이다.
‘농민 봉기라…….’
문득 어릴 때의 기억이 머리를 스쳤다.
그들의 행색에서 과거, 마을을 떠났던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다.
그랬기에 움직이지 못했다.
걸음을 떼지 못했다.
『후우…….』
길게 숨을 뱉으며 눈앞에 선 사내들을 보았다.
한눈에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들은 나라의 녹을 먹는 정규군이 아니다.
훗날 이 일로 트집을 잡힐 것을 두려워한 마을의 벼슬아치가 푼돈으로 사들인 파락호들이리라.
“제발, 저희를…… 저희를 저버리지 마십시오. 나으리.”
노인은 굽은 허리를 더욱 굽히며 창천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노인은 험한 세상에 태어나 마을의 난민을 위태롭게 이끌어 왔다.
아는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었으나 살아온 세월만큼의 식견은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창천의 뒤에 숨었고, 그의 걸음을 막았다.
그의 눈에 깃든 동정의 빛이 예사롭지 않다고 경험 많은 노인은 생각했다.
험한 꼴을 숱하게 겪어 온 만큼, 노인에게는 확신이 있다.
그것은 목숨을 부지할 밧줄이며, 마을의 난민들을 지킬 방패다.
창천과 같은 눈빛을 한 사람은 정을 내치지 못한다.
『이들을 데려다 어쩌려는 것입니까.』
작게 입을 뻥긋거리는 창천의 모습에, 사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귓가를, 머릿속을 간질거리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그 때문에 사내는 창천의 말이 그저 소심한 자의 작고 조악한 웅얼거림이라고 생각했다.
무림인들이라면, 단 한 명이라도 지금 창천이 말을 전한 내력을 알아보는 이가 있었다면, 당장에 사단이 났을 일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앞을 막아선 사내들에게는 그럴 만한 능력도 식견도 없었다.
“이놈! 무슨 말을 뱉은 것이냐?”
『이들을 어디로 데려가려는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간지럽던 소리가 한층 커졌다.
전보다 또렷하고 커졌지만, 사내는 그저 소심한 서생의 마지막 담력이라 치부했다.
날카로워진 창천의 눈빛도, 말도 사내에게는 우스울 따름이다.
“서생처럼 곱상하게 생긴 놈이, 검 한 자루 들었다고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모양이구나. 그것은 알아서 무엇 하려고? 어차피 마을을 떠돌다 죽을 놈들이다. 내가 좋은 곳으로 데려가 주겠다는데 네놈이 무슨 상관이냐. 왜? 네놈도 따라가고 싶으냐?”
『호의는 감사하나, 저도 이들도 그 좋은 곳에 함께 갈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냥 오신 걸음 그대로 물러가시는 것이 어떠하십니까.』
“미친놈. 늙은이가 바짓자락을 잡으며 매달리니 네놈이 무슨 영웅이나 되는 줄 아는구나. 네가 나라면, 나라에서 묵인해 주는 공짜 돈들을 모르는 척하고 그냥 갈 수 있겠냐? 어차피 산에서 굴러먹다 뒤질 놈들이다. 나대지 말고 가라. 그편이 네놈의 신상에 좋을 거야.”
창천은 거칠게 말을 뱉어내는 사내를 바라보며 휘휘 고개를 저었다.
세상은 나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나온 경험만큼 넓고 깊어지는 것이 세상이다.
그렇기에 창천은 지금 이곳에서 발을 빼지 못했다.
십삼 년간을 세상에서 잡초처럼 짓밟히며 살았다.
사내들처럼 검을 쥔 힘 있는 사람이 아닌, 힘에 쫓기다가 기대어 쉴 곳을 찾는 저 난민들처럼 살았다.
그렇기에 정이 동한다.
지워지지 않는 옛 일에, 무리에 섞인 아이들의 모습에, 과거 자신을 지켜주고 끌어 주었던 소요자처럼, 그들을 지켜주고 도와주고 싶었다.
꾸욱.
길을 막고 선 사내들을 바라보며 창천은 주먹을 쥐었다.
일찍이 움직인 마음, 결정은 이미 내려졌다.
“허, 이놈 봐라?”
사내는 물러서지 않고 주먹을 움켜쥐는 창천을 보며 기가 찼다.
서생 놈이 간이 부어도 너무 부었다.
삼류이긴 하나 검으로 밥을 먹고 사는 장정만 열둘이다.
이 정도의 검수들이 모여 검을 들면 웬만한 규모의 산적들도 칼을 내리고 줄행랑을 친다.
산적들도 칼밥이라는 것이 얼마나 독한 것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객기는 아무 데서나 부리는 것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경고하는데 지금 당장…….”
파앙!
엄포를 내뱉는 사내의 말이 단박에 잘려 나갔다.
한 번, 꽈악 주먹을 쥐는 것만으로 주위의 공기가 변했다.
고수.
사내는 그제야 눈앞에 선 창천의 모습이 한순간에 뒤바뀌는 것을 느꼈다.
삼류검수로서 살아온 지 이 년. 느리긴 해도 눈칫밥이라는 것이 있다.
눈앞에 서생처럼 보이는 자는 결코 자신의 상대가 아니다.
큰 산을 알아보는 눈은 없지만, 그래도 말해 주면 알아들을 귀 정도는 가지고 있다.
“서생 놈이 무슨 간이 그리 큰가 했더니, 서생이 아니라 권사였군. 모양새를 보아하니 제법 익힌 모양인데…… 어디 한번 해 보겠는가?”
“혀, 형님!”
사내들 무리에서 멀쑥하게 생긴 자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
별볼일 없는 일에 끼었다가 재미를 보게 생겼다.
허드렛일이나 일삼는 삼류 방파에 귀속된 뒤 지금껏 검을 뽑아 본 일이 얼마나 있던가?
멀쑥한 사내는 균형 잡힌 창천의 자세를 쳐다보며 검을 뽑아 들었다.
“내 이름은 노면호. 한때 섬서성에서 꽤나 날리던 검수였는데 혹, 이름을 들어본 적 있는가?”
창천은 스스로를 노면호라 밝힌 사내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군. 뭐, 땅덩이는 넓고 사람은 많은 법이니까. 남의 이름 따위에는 관심 둘 필요가 없겠지. 헌데…… 지금은 기억해 두는 것이 좋을 거야. 네 목을 가져 갈 사람의 이름이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