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사악.
검을 치켜세운 노면호의 눈빛이 변했다.
오랜만에 검을 뽑고 보니 노면호의 가슴에 가벼운 흥분이 일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실처럼 몸을 조여 오는 공기에 가슴이 뛴다.
이 얼마만에 느끼는 짜릿한 흥분이던가.
노면호는 주먹을 쥐고 선 창천을 향해 빠르게 몸을 날렸다.
파악!
박찬 땅거죽이 벗겨지며 노면호의 몸이 쏜살같이 창천을 향해 날았다. 그는 가진 재능과 노력이 모자라 절정에 들지 못한 일류 쾌검수다.
검도(劍道)보다는 남을 베는 것에 사로잡혀 보다 큰 것을 보지 못했기에 그랬는지도 모른다.
하나 그의 검은 충분히 힘 깨나 쓰는 자들을 손쉽게 쓰러트릴 만큼 날카로웠다.
‘일검!’
노면호는 순식간에 검격 안으로 들어온 창천을 향해 검을 찌르며 웃었다.
주먹으로 소리를 만들어 내는 것 따위는 권사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기선 제압용 허풍일 뿐이다.
진정으로 권풍을 부릴 만한 고수였다면, 애초에 잡배들이 떠들 때 모욕을 참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의 검은 상상(想像)이 없군요.』
‘아……?’
심장을 노린 검이 가슴팍에 틀어박히려는 찰나의 순간.
노면호는 머릿속을 울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떴다.
투웅!
검 끝을 퉁기는 손가락에 노면호는 바람을 맞은 연처럼 허공에 휩쓸려 날아올랐다.
그는 말을 뱉지 않았다.
찰나의 순간 머릿속을 덮쳐온 그것.
노면호는 한참을 날아 바닥에 떨어질 때에야 자신의 눈이 썩어빠진 동태눈이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권풍을 부르고도 남을 만한 절정의 고수다.
『그럼 이야기를 계속 해 볼까요?』
툭툭.
손가락을 퉁기며 말하는 창천의 모습에 사내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가기 시작했다.
“아, 아닙니다!”
쏜살같이 뒤돌아 달려가는 사내들의 모습에 창천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의리는 있는지, 꽁지가 빠지게 도망치면서도 사내들은 쓰러진 노면호를 들쳐 업는 것을 잊지 않았다.
‘본래가 그런 사람들이니까…….’
창천은 이제는 시야에서 사라진 사내들을 떠올리며 몸을 돌렸다.
강자들에게 약하고 약자들에게 강한 것이 저들 파락호들의 세계이다.
그렇기에 도망가는 것에 망설이지도 않고, 한 점 부끄러움도 없는 것이다.
승리보다는 살아남는 것이, 편하게 살 수 있는 돈이 중요한 이들이다.
‘그래도…… 나쁜 것만은 아닌가?’
퉁, 검을 퉁겨낸 검지를 바라보며 창천은 생각했다.
그들을 통해 얻은 것, 처음 마주했을 때부터 느낄 수 있었던 것들…….
창천은 소요자가 말한 천재라는 말과, 강하다는 말을 조용히 뇌까려 보았다.
강해졌다.
잡으려 하는 것은 아직 멀리 있으나, 범인은 뒤쫓지 못할 만큼 강해졌다.
“고, 고맙습니다요. 나으리.”
어깨를 으쓱이며 돌아서는 창천의 모습에, 노인이 다시금 허리를 굽혀 감사를 표했다.
노인은 진정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연륜의 감은 이번에도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도움을 청한 창천은 강했고, 동정심을 저버리지 않은 것에 감사했다.
그는 지켜주었다.
자신을, 마을의 난민들을 지켜주었다.
“고맙습니다, 나으리.”
“감사합니다, 나으리.”
노인을 시작으로, 줄줄이 늘어선 난민들이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했다.
아직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코흘리개들까지, 억지로 내리눌려진 어미의 손길에 고개를 숙였다.
마치 고급 관리를 대하는 듯하다.
『아아…….』
창천은 고개를 들 줄을 모르는 난민들의 모습에 휘휘 손을 내저었다.
『그리 고개를 숙이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인사는 한 번으로 족합니다. 그만들 고개를 드세요.』
창천은 뻥긋뻥긋 조심스레 입술을 움직였다.
말을 하듯이…….
무척이나 어색하고 기이한 모습이었지만, 난민 중 누구도 그런 창천의 혜광심어를 알아채지 못했다.
말은 귀로 듣는 것이라 배우고 자란 그들이다.
머릿속으로 울리는 혜광심어를 의심하기에는 지금껏 경험한 것이 너무 깊고, 배워온 것이 너무나 짧다.
“그럼, 나으리…… 저희는 이만 떠날 준비를 하러 가 보겠습니다. 마을이라고 부를 만한 곳은 아니지만, 자리를 옮겨 다시 시작하려면 그래도 챙겨야 할 것들이 있어서…….”
『자리를 옮기다니요?』
창천은 쓰게 웃는 노인을 보며 물었다.
자리를 옮긴다니?
노인은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창천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나으리께서 마을의 이방인이라는 것쯤은 모를 리가 없지요. 우연은 한 번으로 족한 것입니다. 다음에 나으리가 안 계실 때, 언젠가 또 찾아오겠지요. 그리고 그때는 오늘과 같은 우연이, 행운이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모르는 다른 곳을 찾아 움직여야지요.”
『아…….』
창천은 노인의 쓴웃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뭐라 말하기 힘든 말이다.
우연을 우연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몹시 드물다.
한 번이 두 번, 두 번이 세 번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그렇기에 행운을 손에 넣은 자는, 행운이 떨어지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
그런데 눈앞의 노인은 그 어려운 것을 어느새 체득했다.
기대를 갖지 않고, 행운을 품지 않는다.
당해 온 것이, 지금껏 살아온 삶에 그러한 좌절과 가르침이 묻어 있는 게다.
“그럼…….”
창천은 굽은 허리를 펴고 화전으로 돌아가는 난민들의 모습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어째서인지 그들과 헤어져 산을 오르는 다리가 무거워졌다.
굽어진 그들의 허리는 펴졌으나, 마음은 펴지지 못했다.
난민.
평생 꼬리표를 달고 따라다닐 무거운 짐이 그들의 가슴을 누르고 있으리라.
‘섭이와 왕필이…… 떠나간 그들은 모두 잘 있을까?’
가슴 한구석에 묻어둔 기억이 둥실 떠올라 속을 뒤흔들었다.
옛 기억, 옛 추억…….
잔잔한 마음의 호수 위로 떠오른 옛 기억은 파문을 일으키며 그렇게 한참을 부유했다.
* * *
“잘 다녀왔느냐?”
무거운 발을 끌고 돌아온 선인곡의 오두막.
창천은 운무진의 끝에 자리하고 서 있는 소요자를 바라보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산을 내려가는 중에 난민들을 만나 말씀하신 술을…… 잊어버렸습니다.』
“난민이라…… 그러고 보니 산 아래 화전을 일구는 이들이 있었지.”
소요자는 고개를 끄덕이는 창천을 보며, 길게 자란 수염을 쓸어 만졌다.
창천의 몸이 무거운 이유를 알았다.
그렇기에 마을로 내려보내지 않았던가.
무겁게 끌리는 창천의 다리를 보며 말했다.
“그들을 도와주었느냐?”
『……예.』
“어째서?”
『대답을 하기 전에 저 역시 여쭈어 볼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그때 쓰러진 저를 왜 도와주셨습니까?』
“흠! 그건…….”
소요자는 창천의 물음에 쉬이 답하지 못했다.
쿡, 찔러온 질문에 대답할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때 어찌해 구했을까?
아니, 구하는 것을 두고 깊게 생각이나 했을까?
망설이고 따질 것이나 있었을까?
아니, 없다.
망설일 것도, 생각할 것도, 구해야 할 이유도 없다.
구명(求命)이다.
그저 구한 것이다.
창천은 수염을 쓸어 만지는 소요자를 바라보며 웃었다.
『저는 그냥…… 그러했습니다. 그냥 두고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마치 저와 같아서,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동(同; 같음)에 마음이 동(動; 움직일)한 것이구나.”
『예, 저 역시 난민이라면 난민이었을 테니까요.』
소요자는 웃으며 말하는 창천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웃음과 말에 여름의 개울처럼 투명한 마음이 보였다.
때가 되었다. 홍화주를 핑계로 산자락 아래로 창천을 떠밀 때 이미 내린 결정이 아니던가.
어린 그가 날개를 폈을 때, 둥지를 떠나보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날개는 그대로 굳어져 창공을 날지 못 할지 모른다.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높은 하늘을 날게 하기 위해서는 지금이 적기다.
“떠나겠느냐?”
『……예?』
창천은 대뜸 떠나겠냐고 묻는 소요자의 말뜻을 몰라 되물었다.
“마음을 숨기지 말거라. 어차피 움직인 마음이라면 되돌릴 수 없겠지. 아직 그들이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니냐.”
『하, 하지만 저는…….』
“나는 네게 가르칠 것이 이제 남아 있지 않다. 이미 알고 있지 않느냐? 어찌하여 움직였다 말한 마음을 내게 숨기고 속이려는 것이냐. 혹, 내가 걱정이라도 되는 것이냐?”
『…….』
창천은 쏘아내듯 말을 던지는 소요자를 보며 뭐라 답하지 못했다.
그의 말 대로다.
걱정이 된다.
기우라는 것을 알지만 그가, 자신 때문에 수년은 늙어 버린 소요자가 걱정이 되었다.
그가 혼자인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지도 모른다.
처음 만난 그날부터 지금까지, 계속 함께 있지 않았던가.
창천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소요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떠나도 되는 것일까?
마음이 풍랑을 만난 배처럼 흔들렸다.
“가서 네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때까지 다녀오거라. 평생이 걸려도 좋고, 다시 돌아오지 않아도 좋다. 가거라, 제자야. 내 심부름을 하나 주지 않았더냐.”
『사부님…….』
“어서!”
쩌렁쩌렁 산을 울리는 호통소리에 창천은 흔들리는 마음을 접고 주저 없이 몸을 돌렸다.
떠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심부름을 가는 것이다.
잊고 깜빡한 심부름을 하기 위해 먼 길을 돌아오려는 것뿐이다.
『그럼 다시 다녀오겠습니다. 이번에는 잊지 않고, 놓치지 않고 돌아올 때 말씀하신 산자락 아랫마을에서 홍화주를 한 병 사오겠습니다. 사부님, 다녀오겠습니다. 그간…… 무탈하셔야 합니다.』
“그래그래. 다녀오거라. 홍화주…… 기다리고 있으마.”
창천은 낮게 잦아든 소요자의 말에 입술을 꼭 깨물며 걸음을 서둘렀다.
몹시도 하늘이 푸른 날.
창천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저릿해진 가슴 위로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