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연재 > 무협물
은거기인
작가 : 건아성
작품등록일 : 2016.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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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화
작성일 : 16-11-22     조회 : 471     추천 : 0     분량 : 4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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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화

 

 

 제8장 화전

 

 

 

 

 

 “워워! 이 녀석들아! 위험하다니까!”

 한적한 산골짜기.

 노인은 불길에 신난 아이들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일궈 놓은 화전을 버리고 떠돈 지 이틀이나 되었을까?

 함께 걸음해 준 창천을 돌아보며 다시금 고마움에 고개를 숙였다.

 “아직 나이가 어린지라…… 철들이 없어서…….”

 『그게 맞는 나이니까요. 아이는 아이답게 뛰어노는 것이 가장 좋은 법이지요.』

 창천은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는 노인을 바라보며 웃었다.

 마을을 이루기에는 모자란 땅이지만, 화전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척박하지만 살기에는 좋은 땅이다.

 해도 길고 물도 넉넉하다.

 “그럼 여기 화전에서 함께 사시는 것입니까?”

 노인은 바위에 걸터앉은 창천을 바라보며 넌지시 물었다.

 떠난 그가 다시 찾아와 동행을 청했을 때까지만 해도 경계를 늦추지 않던 노인이었다. 알량한 동정심에 기대면 파국이 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마음만 앞세우지 않는다.

 알량한 동정심으로 스스로를 치켜세우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믿을 만하다.

 『마을이 스스로 설 때까지는 함부로 걸음을 떼지 않겠습니다.』

 그가 동행을 청하며 했던 말이 아직도 가슴 한구석에 고스란히 남아 머릿속을 울린다.

 오랜만에 본 선비의 눈을 가진 사람이다.

 그렇기에 또 한 번 믿는다.

 그런 눈을 가진 사람들은 목에 칼이 들어온다 하더라도 결코 한 번 뱉은 말을 뒤엎지 않는다.

 배움의 깊이만큼이나 스스로의 신의 또한 높이 사는 그들이기에 그렇다.

 창천은 물끄러미 자신을 보는 노인의 눈을 피해 걸터앉은 바위에서 훌쩍 몸을 날렸다.

 노인이 어째서 그러한 말을 묻는지 알고 있다.

 『저는 따로 산에 오두막을 지어 살 생각입니다. 저 역시 이방인인 것은 분명합니다. 걱정은 잘 알고 있습니다. 도움은 주되 최대한 마을에서 벗어나 있을 생각입니다.』

 “아…… 그, 그리하면 호, 혹여 도움이 필요할 때는 어찌 청합니까?”

 『그냥 소리쳐 불러주십시오. 마을 사람들 누구라도 소리치면 들을 수 있을 만한 곳에 있겠습니다. 소리를 듣고도 못 오는 일은 없을 것이니 안심하십시오.』

 “그렇지만…….”

 노인은 훌쩍 떠나가는 창천을 쳐다보며 벅벅 뒷머리를 긁었다.

 손가락만으로 펑펑 사람을 날리는 고수이니 무언가 수가 있을게다, 노인은 그렇게만 생각했다.

 그는 언젠가는 떠날 사람이다.

 그렇기에 움직이는 정을 막고, 감사함도 막아 호기심을 참아야 한다.

 그를 믿고 있지만, 그의 말처럼 이방인일 뿐이다.

 “하지만 그 목소리만큼은 마음을 접고 들어도 왠지 신기하구나.”

 귀를 간질이듯 머릿속을 맑게 울리는 목소리.

 노인은 멀어져가는 창천을 바라보며 휘적휘적 화전으로 걸음을 옮겼다.

 신묘한 일이지만, 사는 데 지장이 없다면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것 없다.

 배움은 뜻이 있는 자들에게나 소용이 있는 일.

 한낱 무지렁이 촌부에게는 한 번의 괭이질보다 가치 없는 일이다.

 그의 목소리도 신묘함도, 삶 속에 필요가 없다면 헛것일 뿐이다.

 “이놈들아! 다친다니까!”

 불길에 신이 난 아이들을 향해 호통치며 달려가는 노인의 걸음이 빨라졌다.

 

 * * *

 

 ‘참 빠르기도 하구나.’

 창천은 산 어귀에 앉아 화전을 일구는 이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참으로 빠르다.

 그들은 태운 나무들을 베고 타 버린 초목을 거름으로 밭을 일군다.

 누구보다 신속하고 빠르게…….

 창천은 순식간에 화전이 되어 버린 산자락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이 네 번째 화전을 일구는 것이라 했다.

 그만하면 화전을 일구는 일이 손에 붙어 몸에 밸만 하다.

 그냥 손장난이 아닌, 생활이 걸린 문제가 아니던가.

 창천은 불에 탄 나무들을 수습하여 옮기는 여자들을 보며 걸음을 돌렸다.

 거친 생활은 그녀들의 몸과 여린 마음까지 바꾸어 놓았다.

 아이를 위한 모성애는 그녀들의 가냘픈 팔을 거친 사내들과 다름없이 만들어 놓았다.

 가장이 없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그녀들은 스스로의 손으로 가장이 되었다.

 ‘어머니도…… 그러셨지.’

 앓아 누울 때까지 단 한번의 내색조차 하지 않던 어머니를 떠올리며 창천은 잠시 고개를 묻었다.

 따악, 따악.

 가슴팍에 묻어 둔 부싯돌을 꺼내어 퉁겼다.

 부딪쳐 튀어오르는 불똥에 부싯돌처럼 닳고 닳은 가슴이 아려왔다.

 이 작은 돌멩이를 구하기 위해 어머니가 겪었을 일들이 생각나자 가슴이 저릿저릿 아파왔다.

 ‘어머니…….’

 창천은 이제는 그 얼굴조차 가물가물해진 어머니의 미소를 떠올리며 울었다.

 이전에 흘리지 못한 눈물을 그제야 흘리고 있다.

 뜨겁고 보드라운, 그래서 아픔조차 씻겨 내려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운다는 것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일이구나.’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 해를 올려다보며, 크게 번져 가는 마음속 파문을 씻었다.

 지금 이 순간 흐르는 눈물은 어쩌면 천금보다 갚진 것일지도 몰랐다.

 

 * * *

 

 “그러니까…….”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는 조악한 동굴 안.

 제대로 빛조차 들지 않는 그곳에서 사내는 소식을 들고 온 청년을 바라보았다.

 “화전이라고?”

 “예! 장규 큰형님. 규모는 생각보다 크진 않습니다만…… 그간 꽤나 모아온 것이 많을 걸요? 약초에, 의복에, 돈 되는 일이라면 안 하는 게 없는 것 같았어요.”

 “호오, 그래?”

 청년의 말에 장규라 불린 사내의 눈이 빛났다.

 그러고 보니 들은 기억이 있다.

 산 어귀에 난민들이 몰려와 화전을 일구었다는 말.

 그때는 그냥 지나쳤던 말이지만 지금은 아니다.

 돈이 된다.

 그렇다면 망설일 것이 없다.

 달리 산에 틀어박힌 산적이던가.

 장규는 벌떡 몸을 일으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규모가 얼마나 된다고? 그럼 우억이, 네가 애들 모아서 다녀와. 계집 중에 쓸 만한 것들이 있으면 모조리 잡아오고.”

 “에이, 형님 화전민 중에 쓸 만한 계집이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사내들처럼 우악스러운 것들 뿐일 텐데…… 그래도 새롭게 생긴 돈줄이니 적당히 수탈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하긴, 그도 그렇군. 그래, 그럼 가서 적당히 털어와. 하여간 이 새끼는 그런데 돌아가는 대가리 하나는 정말 끝내준단 말이야.”

 장규는 옆에 세워 둔 박도를 들쳐 메고 일어서는 우억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우억은 커다란 덩치와는 달리 몸놀림이 날래고 생각하는 것도 약삭빠르다. 때문에 이러한 일을 맡기기에 딱 좋다.

 빠르게 치고 빠져야 하는 일.

 우억은 자신을 보는 장규를 향해 말했다.

 “그럼, 형님. 다녀오겠습니다. 적당히, 적당히. 하하하하!”

 호탕하게 웃으며 동굴을 나서는 우억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산적(山賊).

 그 조악한 이름 아래 발을 담근 지 근 일 년이 지나가고 있었다.

 

 “정말이지…….”

 우억은 엉성하게 엮인 나무집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불태워 화전을 일군 자리에는 새싹이, 공터에는 아이들이 뛰놀고 있었다.

 “최악이라니까…….”

 뛰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저리도 최악인 환경에서 어찌 저렇게 웃을 수 있을까?

 놀잇거리도, 따듯한 옷과 이불도 없는 조악한 마을에서 어찌 저렇게 웃을 수 있을까?

 아이들의 천진한 웃음에 괜스레 상처가 욱신거려왔다.

 “형님. 적당히……, 아이들을 죽였다가는 적당한 선에서 끝낼 수 없을 겁니다.”

 움찔거리는 우억의 박도를 보며 옆에 선 사내가 황급히 나서며 말했다.

 우억이 아이들을 몹시도 싫어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가?”

 사내는 되묻는 우억의 모습에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우억이 박도를 들어 아이들을 베어 버리리라 생각했다.

 상단을 털 때면 언제나 앞장 서서 칼을 휘두르던 그가 아닌가.

 “칼을 들 것도 없는 일입니다. 아이들의 피가 흐른다면, 그들의 어미가 일군 이 화전민들은 모두 죽여야 할 겁니다. 허니, 그냥 대충 겁만 주고 앞으로 바칠 상납금만 매겨두고 떠나는 것이 아무래도 좋지 않겠습니까?”

 우억은 빠르게 말을 뱉는 사내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야지. 그럴 생각으로 온 것이니까. 그런데 너 생각보다 똑똑하구나?”

 “헤헤……. 뭐 다 형님 말씀을 기억한 것뿐인데요.”

 “그럼, 다음부터는 내 말 기억하지 마. 좋은 머리는 그런 데 쓰는 게 아니다.”

 “예……?”

 우억은 동그랗게 눈을 뜬 사내를 보며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어이 꼬마들! 마을에 어르신들은 어디 계시냐?”

 “어……?”

 툭.

 신나게 뛰놀던 아이들의 걸음이 멈췄다.

 목소리가 들린 그곳에는 처음 보는 험상궂은 사내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몇 번을 겪어 이제는 본능처럼 알 수 있는 위험이 몸을 스쳤다.

 “초, 촌장 할아버지! 적이……! 마을에 산적이 쳐들어 왔어요!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무사님! 무사님!”

 등 뒤로 오한이 몰려왔다.

 위험에 처한 아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목청껏 소리치며 노인이 있는 집을 향해 내달렸다.

 “무사님이라…… 늙은 촌장이나 있는 화전에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지.”

 우억은 내달리는 아이들을 쳐다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아이들은 겁에 질리면 으레 아빠나 엄마를 찾는다.

 헌데 도망치는 아이들은 부모를 찾지 않았다.

 촌장 할아버지와 이름 없는 무사.

 아마도 늙은 노인이 짜낸 잔꾀이겠지.

 “늙고 지쳐도 남자는 남자일 테니까.”

 도망친 아이들을 따라 걸음을 옮기는 우억의 뒤를 사내들이 따라붙었다.

 어차피 도망칠 곳도 없는 조그마한 화전민들이다.

 아이들을 따라 걷는 사내들의 걸음은 산보라도 나온 듯 느리고 태평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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