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연재 > 무협물
은거기인
작가 : 건아성
작품등록일 : 2016.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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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화
작성일 : 16-11-23     조회 : 472     추천 : 0     분량 : 5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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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화

 

 

 

 

 

 옛 일들이 어지럽게 머릿속을 떠다녔다.

 언제부터였을까?

 부모를 잃은 아이의 모습과 헐벗은 농민들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된 것은…….

 머릿속을 떠다니는 옛 기억을 헤집으며 생각했다.

 그때 참가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세상사에 만약이라는 것이 있을 리 없지만, 그래도 생각해 보았다.

 행복했을까?

 그리 했다면 이렇게 산에 숨어 살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무겁게 내려앉은 가슴을 끌어안고 숨죽여 울었다.

 반군이 패했던 그날,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파리 떼처럼 앵앵대던 청년들도, 아프다며 골골대던 노인들도 모두 숨을 거뒀다.

 흘러내린 피의 진창에 누워 떨리는 몸을 추슬렀다.

 졌다.

 난은 끝났고, 헐벗은 이들의 분노는 군사들의 창끝에 숨통이 끊겼다.

 죽을힘을 다해 싸웠건만…….

 아직 세상에 남은 운이 있었는지, 시체 더미 위에서 목숨은 건졌다.

 살았다.

 죽고자 하는 싸움에서, 돌이킬 수 없는 전쟁에서 살아남았다.

 함께 죽자 맹세했던 이들이 저승에서 무어라 말하고 있을까?

 잿더미가 된 마을을 더듬으며 통곡했다.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끝 모를 한(恨)밖에 없었다.

 ‘아아…….’

 손에 잡힐 듯 날아오르는 기억에 두 팔을 휘저었다.

 잡을 수 없는 것을, 만질 수 없는 것을…….

 우억은 도도하게 흘러가는 기억의 강에 다시금 휩쓸렸다.

 굽이치는 기억이 머릿속을 스칠수록 덜덜 몸이 떨려왔다.

 죽기 전에는 떨치기 힘든 기억들이다.

 수십 번, 수백 번은 되뇌었던 꿈이다.

 그렇기에 안다.

 이 다음에 올 기억을…… 이제 곧 헤집을 기억을 안다.

 ‘서헌!’

 외칠 수 없는 말을 마음속으로 외쳤다.

 부르르 떨던 몸이 순간 경직되며 맹수보다 더한 살기를 뿜어냈다.

 기억의 마지막 끝.

 우억은 헤프게 웃고 있는 사내의 얼굴에 치를 떨었다.

 그것은 잔뜩 곯은 배로, 몸뚱이 하나로 밥을 먹고 살던 어느 날의 일이었다.

 술값이 비싼 기루에 몸을 맡기고 장작을 패던 그때를, 우억은 잊을 수가 없다.

 

 <무지렁이들은 어쩔 수 없는 법이지요. 그래도 덕분에 좋은 자리를 꿰차지 않았습니까. 힘 하나 들이지 않고 그들의 기반을 털고, 공을 세우시지 않으셨습니까.>

 

 <쯧쯧……, 얻어 봐야 이제는 쓸모가 없지 않는가. 땅은 많은 데 손이 없어. 마을을 떠난 이가 한둘이어야지.>

 

 <어차피 메뚜기와 같은 이들 아닙니까. 돌고 돌아 다시 오겠지요. 난의 깃대가 꺾였으니 곧 다시들 돌아올 겁니다. 때를 봐서 그때 다시…….>

 

 정신을 잃었다 생각했다.

 헐벗은 농민들의 굶주림을 논하던 그가 무슨 말을 떠드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미친 듯 요동치는 심장이, 칼에 상했던 살가죽의 흉터가 터져 붉은 피를 쏟아냈다.

 장작을 패던 도끼를 들고 달려들어 웃고 있는 서헌의 몸을 그대로 토막 냈다.

 퍽, 퍽, 퍽!

 피로 얼룩진 몸을 씻으며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무엇을 위해 피를 흘리고, 무엇을 위해 곡괭이를 들었던 것일까?

 밀려드는 관군을 피해, 헐벗은 농민들의 눈을 피해 산을 탔다.

 차라리 보지 못했으면 나았을까?

 아니, 그렇지 않다.

 그나마 진의를 알았다는 것이, 서헌 놈을 제 손으로 죽였다는 것이 우억은 기뻤다.

 ‘배우지 못한 죄로, 그럴싸한 혀놀림에 놀아난 죄로 믿음도, 신의도, 삶도 모두 잃었구나…….’

 남은 것은 가슴에 그득한 한과 둘 곳을 모를 분노뿐…….

 우억은 하얗게 탈색되어 가는 기억에 고개를 도리질했다.

 잊을 수도,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악몽.

 어지럽게 머릿속을 떠다니는 기억이 절망 속에 사그라지고 있었다.

 

 * * *

 

 “끄응……!”

 낮은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창천은 바르르 몸을 떨며 우억의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주었다.

 그가 정신을 잃은 지 일 각이나 되었을까?

 연신 흘러나오는 신음소리와 식은땀이 그가 얼마나 힘든 꿈을 꾸고 있는가 말해 주고 있었다.

 “형님은……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우억의 상태가 걱정되었는지 필오가 무릎걸음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힘 한 번 써 보지 못하고 우억이 쓰러지자, 남은 산적들은 일제히 창천에게 무릎을 꿇었다.

 맨손으로 박도를 박살내 버린 그다.

 쇳덩이보다 물렁한 뼈를 가진 그들은 그래서 투지를 잃었다.

 『마음의 병 때문에 쓰러진 것이니, 곧 깨어날 겁니다.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그렇습니까?”

 필오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창천의 모습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우억은 형님이기 이전에 죽을 위기에 처한 필오를 구해 준 은인이다.

 비록 무법자가 되어 피 묻은 칼을 찼지만, 은혜와 도리를 저버리지는 않았다.

 “형님…….”

 대신 앓아 누울 수 있다면 옆에 누워 대신 앓으련만…….

 필오는 고통스런 표정으로 우억을 바라보며 입술을 씹었다.

 “……헉!”

 다시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자리에 누워 있던 우억의 눈이 번쩍 떠졌다.

 “여기는……, 나는…….”

 헝클어진 이성이 자리를 찾고 돌아오기까지, 창천은 말없이 우억을 바라보았다.

 그에게는 조금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렇군……. 기절한 것인가? 아니면…….”

 천천히 상황을 정리해 가는 것인지, 우억은 두서없는 말들을 꺼내놓았다.

 무릎을 꿇고 앉은 부하들과 말없이 지켜보고 있는 창천의 모습이 우억의 눈에 들어왔다.

 설명도 필요 없을 뻔한 상황.

 우억은 굴비처럼 줄줄이 엮인 부하들을 쳐다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단 한 놈도 몸이 상한 놈이 없는 것을 보니, 모두 근성 한 번 부려 보지 않고 꼬랑지를 만 모양이군.”

 “그, 그게…….”

 부릅떠진 우억의 눈을 보자 변명을 꺼내려던 필오가 입을 닫았다.

 더 말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그의 눈빛은 이미 변명 따위는 들어볼 필요도 없다는 듯 사나워져 있었다.

 “후……, 그래. 우리를 어쩔 셈이지? 화전을 털러 내려온 산적이라, 관아에라도 넘길 셈인가?”

 창천은 사납게 말을 뱉는 우억의 모습에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니까. 뭘 원하는 거야! 뭐야? 또 어쩌려고 이렇게 둔 거야? 속셈이 뭐냐고, 대체!”

 『없습니다. 속셈.』

 “뭐?”

 『속셈 같은 건 없다 말씀 드렸습니다.』

 태연히 말하는 창천의 모습에 우억의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그런 말을 내가 믿을 것 같아! 너희 붓쟁이 놈들은!”

 『전 붓쟁이가 아닙니다.』

 버럭 소리치는 우억의 말을 자른 채, 창천은 흘러내린 뒷머리를 다시 풀어 묶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지 압니다. 겉모습 때문이겠지요. 저 모습은 분명 그래, 하고 으레 생각들 하니까요. 그리고는 속이지 않았음에도 스스로에게 속지요.』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네놈은……, 네놈들은!”

 다시금 벌겋게 달아오르는 우억의 모습을 보며, 창천은 뒤에 앉은 사내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잠시 자리를 비켜 주시겠습니까?』

 “예?”

 『잠시, 단 둘이 나눌 이야기가 있어서요. 절대 이 사람에게 해가 가는 일은 하지 않을 테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아……, 하지만.”

 싱긋 웃으며 말하는 창천에게 사내들은 뭐라 토를 달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뚜벅뚜벅 말없이 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세상에는 계곡물처럼 맑고 깊은 눈이 진정 있구나.

 사내들은 눈이 깊다는 말의 뜻을 그날 처음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네, 네놈,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 것이냐! 야, 이놈들아! 날 버리고 갈 셈이냐!”

 우억은 씩 웃으며 돌아서는 창천의 모습에 놀라 소리쳤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오두막.

 유리조각처럼 부서지던 박도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것은 무공을 배우지 못하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다.

 꿀꺽, 마른 침이 우억의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멋모르고 말을 뱉었다.

 목이 아무리 두껍고 단단하다 해도 박도만 하겠는가.

 슬쩍슬쩍 움직이는 창천의 손을 쳐다보며 바짝 벽에 달라붙었다.

 바스러지던 박도의 모습이 다시금 떠올라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제가 왜 이 마을에 있는 지 아십니까?』

 “……뭐?”

 『제가 왜 이 마을에 있는 지 아시겠습니까?』

 “그, 그깟 것 내가 알게 뭐냐. 그냥 뭐, 또 세치 혀를 놀릴 자리를 찾아온 것이겠지. 그래, 그렇겠지.”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우억님 때문입니다.』

 “뭐라고? 나 때문이라고? 하! 그게 무슨 개소리냐. 네놈이 이 마을에 있는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농민군에 참가하여 마을을 잃었기에 그렇습니다.』

 “뭐……?”

 『난민. 마을 사람들에게 화전을 만들게 한 것은 결국 헐벗은 농민들을 배부르게 하자고 말했던 우억님의 태평농군이 아닙니까.』

 쩌엉!

 태평농군(泰平農軍).

 꿈에서도 잊을 수 없는 말에 우억의 가슴이 얼음장처럼 굳었다.

 “그, 그것을 어떻게…….”

 우억은 덜덜 떨리는 입술을 움직여 힘겹게 말을 꺼냈다.

 어찌 알았을까?

 맑고 깊게만 보이던 창천의 눈빛이 무저갱처럼 깊고 어둡게 보였다. 미워하고 깔보던 마음이 일순 사라졌다.

 『저희 마을에도 오셨습니다. 커다란 깃대를 메고, 많은 마을 분들과 함께 떠나셨지요. 그들 중에는 저희 아버지도 계셨습니다. 병든 어머니에게 먹일 죽이나 쒀 먹으라고 모래 섞인 쌀 몇 되를 놓고 가셨지요. 어제 일처럼 선명히 기억합니다. 그것이 아버지를 본 마지막 날이었으니까요.』

 “아, 아아……!”

 우억은 그제야 눈앞에 있는 창천이 제대로 보였다.

 약관이나 지났을까?

 세상에 초연한 듯 보이던 그의 모습이 작아지는 것을 느꼈다.

 아이다.

 이제 막 앳된 티를 벗은 아이다.

 『처음 보았을 때는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설마 이렇게 계시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으니까요. 헐벗은 농민을 위한 농군이 어째서 산적 따위가 되었느냐고 묻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제 아버지는 살아 계십니까?』

 덜컹!

 마주한 창천의 눈에 우억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저 눈빛이다.

 관군보다도, 죽음보다도 저 눈빛이 무서워 산에 숨었다.

 “그러니까…… 그게…….”

 고개가 천금처럼 무거워졌다.

 창천의 눈빛이 무거워 고개를 들고 있을 수가 없다.

 무어라 말을 해야 할까?

 부러진 창대를 내팽개치고 돌아선 전장에 대해 무슨 할 말이 더 있을까?

 창천은 제대로 된 말조차 뱉지 못하는 우억을 바라보며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돌아가신 게로군요.』

 “아……!”

 우억은 벼락처럼 귀를 때리는 창천의 말에 번쩍 고개를 들었다.

 더 떨어질 수 없는 곳까지 떨어진 심장이 운다.

 저 눈빛을……, 저 말을 어찌 감당해야 할까?

 죄인마냥 바르르 떨려 오는 몸이 스스로에게 말을 물었다.

 “나는, 몰라……. 전쟁에 패한 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볼모로 잡힌 이들이 어찌 되었는지…… 누가 죽고, 누가 살았는 지도 알지 못해.”

 『그렇습니까…….』

 낮게 내려앉은 창천의 목소리에 우억이 털썩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모두가 내 잘못이야. 미안해. 정말…… 정말…….”

 왈칵 터져 나온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흘렀다.

 다 큰 사내는 울면 안 된다며 그토록 참고 참았던 눈물이건만, 한 번 터진 눈물은 터진 둑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그가 세운 깃대에 모여 장기 말이 되어 버린 농민들이 한둘이던가.

 눈앞의 이 아이가 누구의 자식인지는 몰라도, 우억은 그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생각했다.

 『어찌 미안하다 말씀하시는 겁니까? 어째서 부질없는 장기 말이라 말하시는 겁니까?』

 창천은 무릎 꿇고 눈물을 쏟는 우억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그가 어째서 사과를 하는지 창천에게는 알아야 할 의무가 있다.

 “나는, 그는……, 우리는…… 모두 허상을 좇았어.”

 『그게 무슨 말입니까?』

 “서헌! 그놈, 그놈이……! 으허어엉!”

 우억은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큰소리로 곡을 쏟아냈다.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간다.

 우매하고 한심했던 자신과,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미래를 위해 목숨을 내던진 이들의 모습이 가슴을 때렸다.

 “미안해……, 정말 미안하고 미안해…….”

 이 말 말고 무어라 더 말을 할 수 있을까.

 이제 와서 무슨 변명을 할 수 있을까.

 우억은 머릿속을 스치는 수많은 말들을 뱉지 못한 채, 미안하다는 말만 계속 되풀이했다.

 그 말조차 이제는 곡소리에 묻혀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다.

 『서헌이라는 자가 무엇을 속이고, 무엇이 미안하다는 것입니까?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를…….』

 “으허엉!”

 창천은 말을 물을 틈도 없이 터져 나오는 곡소리에 휘휘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의 가슴에 찬 응어리가 얼마나 큰 지는 몰라도, 녹아 내리기 시작한 이상 언젠가 끝이 날 것이다.

 어차피 급한 일도 없는 한가로운 시간, 창천은 말없이 눈물을 흘리는 우억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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