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대체 어떤 술이기에 이리도 거치는 손이 많은 것일까.
점소이에서 외홍루주로, 외홍루주에서 다시 점소이로…….
창천은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탁자 위의 음식들을 흘겨보며 나왔다.
눈과 가슴은 걱정으로 터질 듯 부른데, 빈 속은 배가 고프다고 아우성이다.
“거참……. 이리 뒤에 나온 것을 보니 일을 받으신 모양이십니다요. 외홍루주님이 허락한 일이니, 제가 뭐라 할 것은 없습니다만…… 그 검 들긴 하는 것이겠지요?”
『예? 검이요?』
점소이는 창천의 검을 가리키고는 휙 품안의 서찰을 꺼내 건넸다.
―유호석. 실력은 좋지 않으나, 화산의 방계제자. 상흔을 입혀서는 안 되며, 루의 법칙에 의거…….
『이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이냐니요? 찾으시던 홍화주지요. 왜, 혹 일이 너무 커서 그러십니까? 어려울 것 같으면 지금이라도…….”
『아니, 그게 아니라…… 이것이 진정 홍화주란…… 말입니까?』
창천은 이상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점소이를 보며 멍하니 자리에 섰다.
홍화루의 홍화주.
그것은 술이 아닌 무림의 위탁(委託)이었다.
* * *
“말이 많은 손님이 왔군요.”
외당으로 들어간 추상위의 얼굴에 싸늘한 웃음이 피었다.
“예, 그저 그런 서생은 아닐 거라 생각했지만 설마 무림인이었다니……. 속히 사람을 붙여 뒤를 밟아 두라 하였습니다. 전음수법으로 보건데, 맑고 청명한 것이 마천루 쪽 사람은 아닌 듯하고…… 정종 도가 계열 같았습니다.”
“그렇군요. 얼굴은 확실히 기록해 두었나요?”
“예, 벌써 사람을 시켜 그려 놓았습니다만…… 얼굴도 위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목소리까지 감추기 위해 전음을 사용하는 자이니, 눈치채지 못할 만큼 정교한 인피면구를 쓴 것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흠……. 그도 그렇군요. 오래된 홍화주라…… 설마, 무림맹에서 우리의 위탁업을 노리는 것은 아니겠지요? 무슨 꿍꿍이가 있어 그런 자를 보낸 것일까요? 중립을 선언한 우리를 다시금 떠보려는 것일까요?”
“글쎄요. 최근 잠잠했던 만큼 훗날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를 무림맹과 마천루이니…… 또 모를 일이지요. 늙은 너구리들이 무슨 일을 꾸미고 있을지…….”
추상위는 천으로 가려 보이지 않는 루주를 올려다보며 말을 흐렸다.
무림맹과 마천루…….
견원지간인 그들이 싸움을 멈춘 지 어느덧 삼 개월이 지나가고 있었다.
* * *
뚜벅뚜벅 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손에 쥔 서찰을 바라보며 걸음을 멈췄다.
처음부터 이러한 심부름이었을까?
선인곡에 있을 소요자를 떠올리며 자리에 앉았다.
생각해 보면 참 단순한 일이다.
소요자와 함께 했던 삼 년의 시간 동안 그가 술을 마시는 것을 본 적이나 있던가.
창천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는 소요자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그는 처음부터 이것을 바랐는지도 모른다.
하산(下山).
산에 박혀 세상 물정 모르는 어른이 되어 가느니, 한 번쯤 산을 내려가 세상을 겪게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위탁, 위탁이라…….’
창천은 손에 쥐어진 서찰을 스윽 훑어보고는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그가 원하는 것이 그것이라면 못할 것도 없다.
화산의 방계제자 유호석.
창천은 서찰에 그려진 유호석의 얼굴을 바라보며 멈췄던 걸음을 내딛었다.
똑똑똑!
마을 외곽에 서 있는 허름한 집으로 다가가 대문을 두드렸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위태한 문짝이었지만 그래도 사용은 하는지, 낡은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뉘쇼?”
그때 허름한 집 안에서 누군가 문 앞으로 걸어 나오며 물었다.
『잠시 일이 있어 들렀습니다. 혹, 안에 유호석이라는 분이 계시지는 않습니까?』
“음?”
문 앞에 선 사내는 정중한 창천의 말에 미간을 찡그렸다.
살짝 벌어진 문 틈사이로 창천의 모습이 눈에 비쳤다.
말쑥하게 차려 입은 장삼과 곧은 눈빛이 대쪽 같은 젊은이다.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인 것 같은데, 어째서 이곳에 오셨수? 유호석이라…… 그런 사람이 있긴 한데. 웬만하면 그냥 돌아가는 게 나으실거유. 내 당신 생각해서 하는 소리니 박하게 듣지 말고, 돌아가쇼. 그 사람이나 이곳이나 당신이 와서 득이 될 것이 없어.”
『제 일이라면 그리 하겠습니다만……. 저 역시 부탁 받은 일이라 어쩔 수가 없군요. 마을에 물었더니, 유호석이라는 분은 이곳이 아니면 쉬이 만나 뵐 수 없다고 해서요. 밖에서 더 기다려 볼까 하다 걸음한 것이니 들여보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음……? 거 무슨 일인데 그러쇼? 부탁이라니? 누가 그가 떼어먹은 돈이라도 받아 달라 한 것이오?”
창천은 다시금 물어 오는 사내를 향해 대답 없이 웃었다.
거기까지는 알 수도, 알 필요도 없다 느낀 일이었기 때문이다.
“흐음……. 그렇구만. 당신 청부꾼인 게구만?”
사내는 말없이 웃는 창천을 바라보며 물었다.
대답은 이미 나왔다.
저 말 없는 웃음이 무엇을 뜻하겠는가?
전혀 어울리지는 않지만, 그런 류의 부탁을 받았다면 청부꾼이라는 말이 되지 않는가.
“청부꾼이라…….”
사내는 지난 기억을 들추며 이마를 찌푸렸다.
유호석.
그러고 보니 그 망나니가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이 보름이 다 되어간다.
어느 집 자식인지는 모르나 거들먹거리며 나타난 놈은, 순식간에 도박장을 꿰차고 앉아 밤새도록 술을 퍼마시며 주사위를 굴려댔다.
난폭한 성격 탓에 처음에는 싸움도 많았다.
헌데 어디서 무공을 좀 익혔는지 돌보다 단단한 주먹으로 달려드는 사내들을 떡처럼 주무르니, 후에는 누구도 싸움을 걸지 않았다.
거들먹거리는 꼴이 보기는 싫지만, 어쩌겠는가.
싸워봐야 깨지는 것은 내 이빨이고 내 몸인 것을…….
시려오는 턱을 쓸어 만지며 생각을 정리했다.
기분 나쁜 놈인 것은 사실이지만 아주 몹쓸 악질은 아니다.
도박에서 지고 돈을 내지 않는 것도 아니고, 이기는 판이면 좀처럼 마셔보기도 힘든 술을 주위 사람들에게까지 돌린다. 때문에 지금에 와서는 그를 나쁘게 생각하는 이들이 몇 남지 않았다.
도박판에도 인망(人望)은 술과 개평으로 산다고, 그는 진한 술과 후한 개평으로 도박판의 인망마저 얻어가고 있었다.
‘허나, 그래도 놈을 나쁘게 보는 이들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지.’
사내는 매만지던 턱을 놓으며 쥐처럼 작은 눈알을 굴렸다.
아무리 후에 좋은 일을 하고 인망을 얻어도 첫인상이 좋지 않으면 이를 가는 이들이 있기 마련. 사내는 거만한 유호석의 얼굴을 떠올리며 잘근 입술을 씹었다.
그놈 때문에 잃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도박판 싸움에서 굳힌 자존심이 아작 났고, 나잇살 생각해서 머리를 굽혀주던 곳을 잃었으며, 부서진 턱은 바람만 불면 시려온다.
빌어먹을 놈!
사내는 생각할수록 열불이 나는 유호석을 떠올리며 벌컥 닫은 문을 열었다.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는 일이다.
그런 놈을 동료라고 감싸줄 필요가 있던가?
사내는 열린 대문 사이로 창천을 향해 물었다.
“거, 그놈 잡아서 데리고 나갈 실력은 있으니 온 것이겠지? 예사 놈이 아닌데…….”
『글쎄요. 그를 잡아 데려가는 것이 제게 힘든 일은 아닐 겁니다. 그랬다면 시키지 않았을 테니까요.』
“하긴 그도 그렇겠지. 하긴 당신이 두 번째 청부꾼이니 그렇기도 하겠지. 당신 정말 좋을 때 온 거유. 그놈 방금 전 판에서 크게 따서 지금쯤 술에 절어 있을 거거든. 내 그놈에게 안내하지. 빨리 따라오슈.”
사내는 웃으며 답하는 창천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응? 뭐야, 새 판꾼이야? 거 이쪽하고는 안 어울리게 생겼는데 누구야? 문진, 너 또 봉이라도 잡아온 거야?”
낡은 집 안으로 들어서자 삼삼오오 짝을 이뤄 모여 있는 사내들이 소리쳐 물었다.
말끔히 차려 입은 흰 장삼의 창천이 어지간히도 눈에 튄 모양이다.
“아아, 도박을 하려고 온 사람 아니니까. 자네들 패에나 신경 써. 저기 저놈, 손님이야.”
“응? 손님? 혈호의 손님이라고?”
문진이라 불린 사내의 말에 사내들의 눈이 커졌다.
“혈호의 손님이라니……, 설마……?”
사내들은 씩 웃는 문진의 입모양을 보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혈호에게 독기를 품은 그가 혈호를 찾는 손님을 데려왔다는 것은, 좋은 손님이 아니란 소리다.
“어이 혈호! 여기 자네를 찾아온 손님이 있는데 그만 일어나 보지?”
“……시끄러워, 멍청아. 그렇게 소리 지르지 않아도 눈에 보여.”
“뭐, 뭐라고? 멍청이?”
문진은 휘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유호석의 말에 으드득, 어금니를 깨물었다.
새파랗게 젊은 놈이 주먹 좀 쓸 줄 안다고 위아래를 몰라본다.
“오냐, 이놈! 내가 몇 번 참아 줬더니만 아주 생각이란 놈을 잃은 모양이로구나. 이 새끼! 어디 오늘 죽어 볼 테냐!”
“미친놈……. 내가 술 취했다고 너 따위 삼류 잡배에게 당할 것 같으냐? 개방귀도 네 허튼소리 내는 입 냄새보다는 덜 구리겠다. 한심한 놈. 몇 대 얻어맞은 것이 뭐가 그렇게 큰일이라고 아직까지 사내놈이 이를 갈고 있는 거냐? 계집도 너보단 가슴이 넓겠다.”
“뭐, 뭣이 어째!”
문진은 터질 듯 붉어진 얼굴로 냅다 달려 나갔다.
무시도 이런 무시가 없다.
계집보다 가슴이 좁다니…….
그 말은 사내로서 뒷골목에서 살아온 그에게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말이다.
부웅!
잔뜩 힘이 들어간 문진의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그래도 제법 이 바닥에서 배운 싸움 가락이 있는 지라, 보통 사람들보다는 절도가 있고 무게가 실린 주먹이다.
‘하지만 그래봐야 삼류 잡배의 주먹이지…….’
유호석은 얼굴을 향해 날아드는 문진의 주먹을 빤히 바라보며 그대로 발을 차올렸다.
짜악!
커다란 소리가 울리며 그대로 올려 찬 유호석의 발이 문진의 턱을 바스러트렸다.
일전에 다친 적이 있는 곳이니, 이번에는 수일, 아니 수주를 턱을 잡고 앓아야 할 게다.
“엌!”
성난 멧돼지처럼 달려들던 문진은 채찍처럼 순식간에 턱을 때리고 사라진 유호석의 발길질에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머리가 흔들리고, 땅바닥이 치솟아 오른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놈.
문진은 턱을 잡고 비틀거리다가 쿵 주저앉으며 소리쳤다.
“뭐 하슈! 저놈 잡으러 왔다 안 했수? 거 가만히 서서 뭐하는 거유! 청부꾼이면 청부꾼답게 길을 열어 줬으면 냅다 뛰어가 잡아야지!”
“청부꾼?”
유호석은 주저앉아 소리치는 문진의 말에 그의 뒤에 서 있는 창천을 보았다. 흰색 장삼에 호리호리한 몸매의 창천은 그의 눈에 장작개비와도 같아 보였다.
“눈도 썩은 모양이군. 저런 놈을 뭘 믿고 내 단잠을 깨워가며 덤빈 거야? 정말 미쳤어?”
톡, 톡.
문진의 얼굴을 발끝으로 건드리는 유호석의 입술이 뒤틀렸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바닥에 얼굴을 짓이겨 놓고 싶지만, 주위의 시선이 곱지 않다.
분명 잘못은 타인에게 문을 열어주고 청부꾼을 불러들인 문진에게 있지만, 나이와 친분이라는 것이 있다.
지금 그를 짓이겨 놓으면 결코 앞으로의 일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하아! 어이, 이봐! 거기. 청부꾼이라고 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