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연재 > 무협물
은거기인
작가 : 건아성
작품등록일 : 2016.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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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화
작성일 : 16-11-24     조회 : 437     추천 : 0     분량 : 5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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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화

 

 

 

 

 

 유호석은 비틀비틀 걸어 나가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는 창천을 향해 말했다.

 “내가 봤을 때 너는 직업을 잘못 택한 것 같아. 가라, 지금 가면 몸은 성히 갈 수 있을 거야.”

 『…….』

 창천은 어깨를 거들먹거리며 말하는 유호석의 말에 작게 숨을 들이켰다.

 “어이, 지금 내 말 무시한 거야?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휘익!

 유호석이 낡은 의자를 집어 던지며 소리쳤다.

 대충 겁을 주면 알아서 도망갈 것이다. 유호석은 겁에 질린 듯 멈춰 서 있는 창천을 바라보며 그리 생각했다.

 헌데, 그 순간.

 콰직!

 마른 나무가 부서져 하늘을 날았다.

 어느새 주먹을 뻗은 것일까?

 곧게 뻗은 권에서 흘러나온 바람이 가늘게 뜬 눈으로 강하게 불어왔다.

 휘익.

 유호석은 조각조각 박살이 나 날아가는 의자를 뜨악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잘못 생각했다.

 그는 우습게 볼 만큼 간단한 사람이 아니다.

 『의자는 앉으라고 있는 것이지 던지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뭐, 뭐?”

 웃으며 흘러나온 정중한 한 마디.

 그것이 유호석이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들었던 말이었다.

 

 * * *

 

 “방계제자 유호석이 오늘 홍화루로 붙들려 갔습니다.”

 “허……, 그러한가?”

 점잖게 앉은 노도인이 수염을 가볍게 쓸어 만졌다.

 방계제자 유호석이라…….

 오래 전 잊은 이름이다.

 “홍화루에 숨겨 놓은 이들이 움직인 것인가? 그래, 실력이 얼마나 되던가?”

 “그게…….”

 “가늠치 못할 정도란 말인가?”

 노도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내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들이 그리도 강한 이들을 키웠던가. 자네가 실력을 가늠하지 못할 정도로?”

 “송구하옵니다. 제가 권에 대해 안목이 높지 못해 그자의 한 수를 어찌 파악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허허, 권에 대한 안목이 높지 않다라……. 그리 스스로를 낮추지 마시게. 자네가 곧 화산인 것을 어찌 모르는가. 그의 한 수를 보지 못한 것은 그가 강한 것이지, 자네가 약한 것이 결코 아니네.”

 “하지만…….”

 사내는 휘휘 고개를 젓는 노도인의 모습에 꺼내려던 말을 삼켰다.

 그가 그리 말한다면 더 무슨 말이 필요할까.

 노도인은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앉은 사내를 보며 말을 이었다.

 “일단은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게.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라면 알아야겠지. 더는 그곳을 품안의 음지로 둘 수는 없지 않겠나. 맹주께는 내 알아서 잘 말해 두겠네.”

 “예. 그럼 하명하신 대로 신속히 이행하겠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며 물러나는 사내를 향해 노도인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홍아. 부디, 지금처럼만 깊이 헤아려 생각하거라. 그리하면 화산이 만개할 날이 보다 빠르게 올게야.”

 사내는 노도인의 말에 웃음으로 화답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흐음…….”

 노도인은 그렇게 한참을 매화꽃 같은 사내의 웃음을 떠올리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꽃같이 아름다운 웃음을 짓는 사내.

 그는 화산의 오늘이자 미래라 불리는 화산제일검 무자홍(舞自紅)이었다.

 

 * * *

 

 “못 봤다?”

 “죄송합니다, 외홍루주님. 그자의 권이 속하의 눈보다 빨랐기에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검이 아니라 권이란 말인가? 허, 아닐세. 그것만 해도 커다란 도움이 되었네. 자네의 눈보다 빠른 권이라니, 이것 참.”

 추상위는 고개를 조아리며 말하는 사내의 등을 내려다보며 낮게 혀를 찼다.

 검이 아니라 권이었던가.

 더구나 조원, 그가 눈으로 살필 수 없을 만큼 권이 빠르다고? 현 무림에서 조원의 눈보다 빠른 권을 쓰는 이가 몇이나 있을까.

 지끈, 골머리가 아파왔다.

 “유명 문파의 후기지수들 중 권을 쓰는 사내를 추려 달라 전해 주게. 아니, 혹 여인일 수도 있으니…… 모두 추려 달라 전해 주게.”

 “예, 분부하신 대로 이행하겠습니다.”

 추상위는 서둘러 방을 나서는 조원의 모습을 보며, 톡톡 책상머리를 두드렸다.

 간단히 생각할 수만은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느닷없이 들어온 커다란 청부와 방계라고는 하나 화산파의 제자를 단번에 제압한 의문의 사내.

 복잡하게 얽혀 돌아가는 생각에 두 눈을 꼭 감았다.

 셈에서는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 둘이 되고 둘에 하나를 더하면 셋이 된다.

 하지만 삶이라는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 둘이 되지만, 그 둘에 하나를 더 더하면 그것은 셋이 아닌 다섯이 된다. 하나와 둘이, 둘과 셋이, 셋과 하나가 그리고 셋 모두가 엮이고 섞여 복잡한 거미줄을 만든다. 때문에 일 하나에 생각이 붙어 갈수록 이해 관계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혼란스러워져 간다.

 ‘모든 것을 우연이라 생각하기엔 시기가 너무 절묘해. 어디까지일까? 어디까지가 덫이고 어디까지가 우연일까…….’

 추상위는 데굴데굴 굴러가기 시작한 사건을 되짚으며 하나하나 생각을 정리해 나갔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그리고…… 뒤늦게 나타난 세 번째.

 골머리를 앓는 추상위의 이마 위로 땀방울이 흘렀다.

 

 * * *

 

 『…….』

 호화롭게 차려진 술상.

 어디에 젓가락을 두어야 할지 고민이 될 만큼 많은 안주와 차처럼 향긋한 술에 창천은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드시지요.”

 공손히 말을 건네는 시녀의 모습에 창천은 어색하게 웃었다.

 이렇게 잘 차려진 상을 받아도 되는 것일까?

 고픈 배가 꼬르륵 소리를 토해냈지만, 이성의 끈이 식욕을 막았다.

 이런 호화로운 상을 받을 만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내키지가 않으십니까? 그럼 이 상을 물리고 다른 상을 차려 올릴까요?”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창천은 상을 물리려고 시녀가 일어서자 급히 손을 뻗어 만류했다.

 『이만한 상을 나에게 차려주는 연유가 무엇입니까? 이만한 술상이라면 값이 만만치 않을 텐데요.』

 “소녀는 거기까지는 알지 못합니다. 소녀는 그저 공자의 시중을 들라 명을 받았을 뿐입니다. 그러한 일은 외홍루주님이 오시거든, 그분께 다시 여쭙는 것이 빠를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꽃처럼 웃는 여인을 보며 창천은 뒷머리를 긁었다.

 이렇게나 아름다운 여인을 본 것도 처음이고, 이렇게나 화려한 상을 대접받은 것도 처음이다. 아니, 산을 떠나와 겪고 있는 모든 일들이 처음이다.

 때문에 마음이 격랑을 만난 파도처럼 흔들려 종잡을 수가 없다. 조금이라도 방심했다가는 평정심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렇기에 손을 꼭 쥐었다. 격랑에 휘둘려서는 배를 몰 수 없다.

 쪼르르륵―

 창천은 술잔을 채우는 여인을 보며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러하면 술도 상도 모두 물려 주십시오. 다시 차려 주지는 않아도 됩니다.』

 “모두를 물려 달라고요?”

 『예, 과한 것은 덜한 것보다 좋지 않습니다. 이미 놀랄 만큼 많은 돈을 받았습니다. 홍화주 역시 얻었으니, 그만하면 되었습니다. 외홍루주님께서 어째서 저를 다시 보려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러한 과분한 대접은 제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건…… 혹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셔서 그러시나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촌부는 촌이 어울리는 법이지요. 제가 편히 있기를 바라신다면 물려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

 시녀는 방긋 웃으며 말하는 창천의 말에 더는 무어라 토를 달지 못하고 고개를 조아렸다.

 시녀로서, 기녀로서 홍화루에 살아온 지 오 년.

 눈칫밥은 배불리 먹지 않아도 눈과 마음에 쌓이는 법이다.

 “그리하면 상을 물리겠습니다. 부디, 외홍루주님이 오실 때까지, 불편함 없이 기다리시기를…….”

 창천은 상을 치워 방을 나서는 시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깊게 숨을 내뱉었다.

 넓고 편한 방에 앉았음에도 가슴이 턱 막힌 듯 갑갑하다.

 어이하여 이런 일에 매달려 있는 것일까?

 대죽 위에 올라선 원숭이마냥 몸과 마음이 편치 않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소요자의 진심이 무엇인지 답이 나오지 않는다.

 『…….』

 복잡한 생각을 떨치기 위해 고개를 흔들 때쯤 방문이 열렸다.

 “이런, 상을 물리셨다더니 정말이군요. 대접이 소홀했던 것입니까? 아니면 무슨 다른 뜻이 있는 것입니까.”

 추상위가 들어서며 대뜸 물었다.

 『다른…… 뜻이라니요?』

 “정말 모르셔서 묻는 말씀이십니까?”

 추상위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창천의 맞은편에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우연을 위한 우연을 꾸민 것치고는 너무 빤한 것이 아닙니까. 화산파의 방계제자가 어울리지 않는 망나니짓을 벌이는 것도, 느닷없이 거액의 청부가 들어오는 것도, 당신 같은 고수가 청부를 맡아 이리도 일을 깨끗하고 빠르게 해결하는 것까지……, 모든 것이 말입니다. 대체 무엇을 원하시는 겁니까?”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 것인지……. 제가 모자라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지금의 말씀이 저는 무슨 뜻인지 도무지 모르겠군요. 무엇이 빤하고 무엇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까?』

 “하! 정말 이리도 시치미를 떼실 생각이십니까?”

 창천은 긴 숨을 뱉어내는 추상위를 바라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엇을 숨긴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정말…… 정말 숨기시는 것이 없습니까? 제 말을 이해하지 못하시겠습니까? 아무것도 모르십니까?”

 다시금 말을 물어 오는 추상위의 모습에 창천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그의 말이 무슨 뜻을 담고 있는지 창천은 진정 알지 못했다.

 “하아, 정말…… 정말 우연이란 말입니까.”

 추상위는 한 점 떨림도 없는 창천의 두 눈을 바라보며 휘휘 고개를 저었다.

 어디까지인가.

 다시금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우연의 산물이었건, 꾸밈 속에 피어난 우연이었건 간에 이번 일은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화산파라는 걸출한 문파를 대상으로, 거액의 청부와 고수가 엮였다면, 이것을 누가 가벼이 볼 수 있겠는가.

 쉽지 않다.

 결코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지금 이리도 시치미를 떼신다면 후에, 진정 원하시는 일을 논하실 때 저희가 아무것도 도와드릴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진정 그리 되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창천은 깊어진 추상위의 주름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저는 통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무슨 시치미를 떼고 있다는 것입니까? 혹, 제가 이곳에 오기 전 사부님에게 무슨 말이라도 들으신 것입니까?』

 “사부님이라니요? 그것은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창천과 추상위는 도통 통하지 않는 말에 길게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서로 논하는 방향이 다르니 무슨 말이 통할까.

 내뱉은 숨이 뒤엉켜 미묘한 열을 만들어 낼쯤, 창천이 슬쩍 엉덩이를 들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무슨 말을 하기 위해 이 자리를 만들었는지 몰라도, 나눌 말이 없다면 계속 자리에 앉아 있을 필요가 없다.

 하지만…….

 말없이 깊은 생각에 빠져든 이를 두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은 예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그럼 더 물을 말이 없다면 그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아…….”

 머릿속을 울리는 창천에 목소리에, 추상위가 굳게 닫았던 입을 열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생각할 것이 많아 결례를 범했습니다. 이 방에서 제가 했던 말들은 모두 잊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예, 그리하지요. 어차피 들어도 알 수 없는 말이니, 지워내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겠지요. 고개 숙이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저는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그게…….”

 추상위는 자리에서 일어서는 창천을 보며 말을 늘였다. 이대로 보내서는 안 될 것 같은데, 딱히 그를 잡아둘 구실이 없다. 속셈이 없고, 뜻이 없으며, 일을 모른다는 그를 무슨 일로 엮어 놓겠는가.

 자리에서 일어나 물끄러미 자신의 말을 기다리고 있는 창천을 향해 추상위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돌아서는 그의 발길을 잡을 말이 끝내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은 것이다.

 “맡은 일을 잘 처리해 주어 감사합니다. 홍화루는 언제나 열려 있으니 일이 필요하시거든, 언제든 들러주십시오.”

 『아, 예……. 그럼.』

 창천은 고개 숙이며 건네는 추상위의 인사를 받으며 몸을 돌렸다.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을 것만 같은 화려함에서 이제야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과연 지금 하는 짓이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군. 하, 모르겠어. 내홍루주님은 무엇을 바라고 계신 것일까.”

 쿵!

 탁자를 내리치며 추상위가 머릿속에 담긴 짜증을 걷어냈다. 방을 나선 창천의 모습은 어느새 사라져 그림자 한 점 남기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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