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낭인? 홍화루와는 전혀 연이 없는 낭인이라는 말인가?”
무자홍은 꾸벅 고개를 숙이는 거지를 쳐다보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럴 리가 없다. 그만한 권을 쓰는 자가 낭인일 리가……. 진정 홍화루와는 연이 없는 사람인가? 그가 사용한 권이 춘월풍(春月風) 홍화권(紅花拳)이 아니란 말인가?”
믿을 수 없는 말이다.
두 눈에 선명히 비칠 만큼 진한 바람이었다.
진정 낭인이라면, 기인이라도 만난 것일까.
그것은 일개 낭인이 펼칠 만한 권이 아니다.
“외홍루주인 추상위 주변에 심어 놓은 점소이가 직접 전한 말입니다. 그 역시 혼란스러워 하고 있다 합니다. 그는 오히려 우리가 그를 보낸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합니다.”
“그래? 그렇다면 서문탁, 내 한 가지 물어봄세.”
“예.”
“자네가 보기에 그 점소이의 말을 어디까지 믿는 것이 좋다 보이는가. 일 년의 시간 동안 밑바닥을 닦은 그지만, 홍화루는 그보다 몇십 배는 더 오랜 시간을 밑바닥에서 기다렸어. 그런 그들이 그리도 쉽게 말을 털어 놓을까?”
“그것은…….”
무자홍의 말에 서문탁은 무어라 답하지 못하고 말을 흐렸다. 그의 물음은 딱 잘라 대답할 만큼 쉬운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현재 홍화루를 총괄하고 있는 것은 내홍루주다. 누구도 그것을 모르는 이가 없지. 헌데, 이상하게도 본 사람이 없어. 누구도 그를 보지 못했지. 그런데도 모두가 알고 있다. 이상하지 않은가. 어째서 모두가 알고 있는데, 왜 실체가 없을까?”
“……역조작이라는 말씀이십니까?”
무자홍은 무겁게 고개를 드는 서문탁을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확답은 할 수 없네. 다만, 나는 그렇게 느끼고 있네. 한낱 점소이도 알 수 있을 만큼 허술한 곳이었다면 우리도, 마천루도 이리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이야. 아직도 우리는 그들에 대해 아는 것이 없네. 헌데, 보게. 언제부터인가 우리에게는 실체 없는 정보들이 가득 쌓이기 시작했네. 정보에 대한 역조작은 우리가 그들을 조사하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있던 것이 아닐까?”
“으음…….”
무자홍의 말에 서문탁의 주름이 깊어졌다.
틀린 말이 아니다.
그 역시 느끼고 있던 일이다.
실체가 없는 것에 대한 실체가 없는 정보.
그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그렇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에 적어 넣는 일이지 않는가.
그들의 말을 그대로 듣고 믿을 수밖에…….
“지금까지의 말은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고, 노파심이 불러 온 불안이네. 그러니 아직 맹에는 말을 넣지 말게나. 그들의 수고로움을 모두 공으로 돌릴 수는 없으니 말이야.”
“아…… 예.”
“그러하면 나는 어디 그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불안에 겨워서라도 그를 한 번 직접 만나봐야겠구먼.”
“예? 그라면…… 유호석을 포박해 간 그자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시기가 아닌가. 그만한 고수가 낭인이라면 만나봐야지. 진정 낭인이라면…… 그래, 홍화루와 연이 없는 낭인이라면, 우리 무림맹과 연을 맺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 않겠는가. 물론 홍화루 소속 무사라면…… 뭐, 그 역시 나쁜 일은 아니지 않는가.”
무자홍은 시름에 찬 서문탁을 향해 씩 웃어주고는 몸을 돌렸다.
“하지만 말씀대로 이것이 역조작에 의한 것이라면……. 이것은 함정일지도 모릅니다. 혹여 그가 마천루에서 나온 고수라면…….”
“마천루라……. 그럴지도 모르겠군. 헌데 말이야. 어째서인지 그러한 생각은 들지 않는군. 홍화루나 마천루나 이렇게나 서투른 함정을 팔 리가 없지. 게다가 마천루라면 또 모를까, 홍화루에서 나와 맹에 함정을 파 봐야 무슨 득이 되겠는가. 나는 내부의 정보에는 밝지 못해도 외부의 정보는 훤히 꿰뚫고 있다고 믿네.”
“그 말씀은…….”
무자홍은 채 말을 잇지 못하는 서문탁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삼비대의 눈은 홍화루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네.”
“아…….”
검을 둘러차고 방을 나서는 무자홍의 몸에 자주색 빛이 돌기 시작했다.제10장 무자홍
팔락.
불어오는 바람에 옷깃이 날렸다.
곧 가을이 오려는 것일까?
높아진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지금쯤 이 길을 지나리라 생각했습니다.”
『……?』
아직 도시를 다 벗어나지 못한 관도의 끝.
창천은 자신을 향해 웃으며 다가서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지금쯤 이 길을 지나리라 생각했다니…….
면식이 있는 사람일까?
다가서는 사내의 얼굴을 곰곰히 떠올려 보았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사내를 바라보며, 창천은 휘휘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보아도 기억에 있는 얼굴이 아니다.
『누구십니까?』
“아, 저는…….”
점잖게 말을 걸어오는 창천의 모습에 사내가 놀라 말했다. 쫑긋 세운 귀를 지나 대뜸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려온다.
전음일까?
사내는 어눌하게 움직이는 창천의 입모양을 바라보며 뒷머리를 긁었다. 그가 어째서 저런 번거로운 일을 벌이고 있는지, 이해는 가지 않지만, 어쩌겠는가.
자신은 그가 아닌 것을.
창천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잇는 사내의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현 무림맹의 잡일을 맡고 있는 무자홍이라 합니다. 제 사제가 신세를 졌다기에 한 번 뵙고 싶었습니다.”
『……예?』
“화산의 방계제자 유호석, 설마 모른다 하시진 않겠지요?”
『아!』
방긋 웃으며 말하는 무자홍의 말에 창천의 입이 열렸다.
처음으로 맞이한 혼란스러운 일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창천은 생글생글 웃는 무자홍의 모습에 무어라 말해야 할지 난감해졌다.
일이야 어찌 되었건, 그가 사제라 말하는 유호석을 상하게 한 것은 사실이 아닌가.
“그 일을 따지기 위해 귀하를 찾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 난처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다면 무슨 일로 저를 찾으신 것입니까? 이렇게 기다리신 것을 보면 작은 일은 아닌 듯싶은데요.』
“아…… 뭐, 그렇지요. 어쩌면 아주 큰일일지도 모르겠군요. 사람과 사람이 만나 이루는 인연이라는 것은 가장 원초적이고도 가장 커다란 일이니까요.”
『인연……?』
“예, 인연(因緣). 사람과 사람이 만나 잇는 연줄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 확인해 볼 것이 있어서…….”
『확인?』
“예, 확인. 사제가 주먹에 맞을 때 턱이 심하게 돌아가서…… 혹, 그 손에 무언가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어서요. 손을 볼 수 있을까요?”
무자홍은 잔뜩 경계심에 찬 창천을 향해 웃으며 포권을 취했다.
인연이다.
그는 지금 이 자리에 창천과의 인연을 만들기 위해 왔다.
스윽.
창천은 당치도 않는 말을 뱉는 무자홍을 바라보며 슬쩍 손을 뻗었다.
그가 지금 무슨 인연을 맺기 위해 자신을 찾은 것인지는 몰라도, 당치도 않는 말과 행동에 주눅들 필요는 없다.
꾸욱.
한 손 가득 쥔 홍화주만큼이나 무거운 손이 사내의 손을 맞잡았다.
‘호오라…….’
맞잡은 창천의 손에 무자홍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처음 보는 이에게 이렇게 손을 맡겨도 될 정도로 고수라는 것인가?
무자홍은 손바닥으로 느껴지는 창천의 굳은살을 살짝 문지르며 손을 뗐다. 오랜 시간을 수련해 닳고 닳은 검사의 굳은살은 분명 아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적재적소의 가장 중요한 부분에는 빠짐없이 굳은살이 자리하고 있다.
권을 전문적으로 배운 권사가 아니란 말인가.
무자홍은 창천의 내력이 더욱더 궁금해졌다.
『무슨 뜻으로 저와의 인연을 생각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인연이라는 것은 생각처럼 쉬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배웠습니다. 저와 인연을 맺고 싶다면…….』
“글쎄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 하지 않습니까. 연은 이미 서로 섞여 엮어진 것 같은데……. 다시 또 찾아 맺을 필요가 있을까요.”
『…….』
창천은 자신의 말을 자르고 들어오는 무자홍의 말에 맞잡은 손을 놓았다.
요 며칠 알 수 없는 일들이 계속해 벌어지고 있다. 홍화주를 사러 이 도시에 온 뒤부터 시작된 모든 일들이 그러하다.
이해하기 힘들다.
스스로의 일이면서도, 남의 일처럼 세세한 사정을 알 길이 없다.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일은 많건 적건 간에 좋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그것으로도 좋겠지요.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오늘의 인연 잘 기억해두도록 하지요.』
창천은 꾸벅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네고는 걸음을 옮겼다.
더는 부딪치기 싫은 일들이다.
서둘러 도시를 벗어나 선인곡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아니, 아니. 그리 돌아가시면 아니 됩니다. 강호가 아닙니까. 강호인답게 한 마디 인사보다는 검을 나누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무슨 말씀이십니까. 강호라니요, 검이라니요?』
창천은 말끝을 잡고 늘어서는 무자홍의 모습에 얼굴을 구기며 물었다.
시비를 걸어오는 것일까?
씩 웃는 무자홍의 몸 위로 따가운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말 그대로입니다. 고사는 고사일 뿐. 지금 저희가 선 강호에서는 옷깃을 스치는 것보다 검을 섞는 것이 더욱 큰 인연이 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일권을 맞아 쓰러진 사제보다는 아무래도 사형인 제가 더 깊은 인연을 나누어야 나중에 맹에 할 말도 있을 테니까요.”
『맹……?』
창천은 느닷없이 쏘아지는 무자홍의 따가운 기운에 놀라 한 걸음 물러섰다.
스릉.
햇빛을 받아 새하얗게 달아오른 검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아악.
한기처럼 퍼져 나가는 검기가 순식간에 호흡을 얼렸다.
『어째서 저를 강호인으로 말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강호인이 아닙니다. 당신과 일검을 주고받을 이유는 없습니다.』
“글쎄요. 그것에 대해서는 본인의 생각보다는 남에게 물어보는 편이 더 합당한 것 같습니다. 홍화루에 들렀던 그 순간부터, 귀하와 강호는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으니까요.”
『…….』
무자홍이 씩 웃으며 건넨 말에는 가시가 있다.
차갑게 얼어붙은 공기처럼, 창천은 새하얗게 달아오르는 무자홍의 검을 보았다.
“인사와도 같은 일검일뿐입니다.”
『제가 아는…… 그 누구도 인사를 검으로 나누지 않습니다.』
“흠……, 그럼 지금부터라도 배우셔야지 않겠습니까. 강호란 이런 곳이니까요.”
스윽.
검을 고쳐 쥐는 무자홍의 자세가 변했다.
입가에 흐르던 웃음이 멈췄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긴장감이 말해 주고 있다.
온다.
자세를 바로 잡은 그의 검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어찌 한다…….’
창천은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잔뜩 벼려진 무자홍의 검을 보며 생각했다.
검을 뽑아야 할까?
허리춤에 채워둔 검을 바라보았다.
웅―!
쏟아지는 무자홍의 기운에 동한 것인지, 묵룡이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졸은 후퇴하지 못해. 그렇기에 가장 장부다울 수 있어. 너도 나도 농군으로밖에 살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장부다. 언제고 피할 길도, 이유도 없거든 맞서면 되는 거야. 우리는 졸이고 장부니 후퇴하는 법을 모르니까. 그러니까…… 아비는 간다. 주위에서 뭐라고 하건 간에 지금 내게는 이 길밖에 없어. 앞으로, 앞으로…… 물러서지 말고, 그리 살아라. 천아. 누가 뭐라 하던 간에 네 마음대로 살아.>
개의 목줄처럼 엮여드는 상황에 아버지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앞으로…… 누가 뭐라던 간에 내 뜻대로…….』
스릉!
단번에 뽑아든 묵룡의 검신이 파르르 떨리며 묵빛을 뿌렸다.
『인사 따위는 배우지 않겠습니다. 나는 강호인이 아니니까. 이 일검은 인사가 아니라, 제 갈 길을 막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말을 뱉는 창천의 눈빛이 검처럼 날카로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