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경고라…….”
창천의 마지막 말을 곱씹으며 무자홍은 팽팽해진 긴장감을 달랬다.
그가 검을 뽑는 순간 주위의 공기가 달라졌다.
맴돌던 바람도, 내리쬐는 햇살도, 하나둘 모여드는 구경꾼들도 모두 그대로이건만 무자홍의 눈에는 그 모든 것이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꿀꺽, 무자홍은 마른침을 삼키며 검을 들어올렸다.
멈춰 버린 세상에 오직 하나 살아 움직이는 것!
그것은 창천의 검이었다.
멈춰 버린 세상에 그의 검만이 살아 있으며, 호흡하고 숨을 내뱉고 있었다. 차가운, 아주 차가워 심장마저 얼려 버릴 것 같은 한기가 창천의 검을 타고 흘러나왔다.
무슨 검일까……?
무자홍은 자연체에 가까운 창천의 기수식을 바라보며 눈동자를 굴렸다.
화산파에서 나와 맹에 들어온 지 오 년, 그간 이름난 검파의 기수식은 눈과 귀로 모두 견식했다고 생각했다. 남해의 검도, 저 먼 십만대산의 검도 보고 들었다.
검에 관한 한 그 어떠한 잡서라도 가리지 않고 보았다.
그 어떠한 검로에도 뒤지지 않을 자신의 검로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감조차 잡을 수 없다.
오리무중(五里霧中).
그의 검은 손에 꽉 쥐어져 있지도, 치켜들려 있지도, 자세를 취하고 있지도 않았다.
검을 쥐었다는 것을 잊으면 저리 될까?
한바탕 춤사위라도 벌이겠다는 듯 늘어트린 검이 바람에 하늘거리는 옷깃마냥 흔들거렸다.
타악!
무자홍이 바닥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순간 멈춰선 세상이 빠르게 감기며 검 끝에 닿았다.
솨아악!
검에 잘려 찢겨지는 바람이 비명을 토해냈다.
일검.
무자홍은 한치도 예측할 수 없는 검을 늘어트리고 서 있는 창천을 향해 검을 뻗었다.
목이나 심장을 노린 살검이 아니다.
인사치레다.
그의 검에 담긴 내력을 알기 위한 일검일뿐이다.
쿠웅!
무자홍의 검이 날아들자, 멈춰 서 있던 창천이 발을 크게 굴렀다.
둥실.
자잘한 돌멩이들이 창천의 몸과 함께 허공으로 떠올랐다.
일검.
창천은 쏜살같이 날아드는 무자홍의 검을 바라보며 길게 늘어트린 검을 휘둘렀다.
따앙!
커다란 쇳소리가 관도를 울리며 퍼져 나갔다.
범인의 눈으로는 쫓을 수도 없는 빛살과도 같은 빠르기였다.
토옥!
“중검(重劒)일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도법 아니, 창법과도 같은 밀어치기라니, 하하…… 하하하하!”
사뿐히 내려선 무자홍의 입에서 커다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송곳처럼 이를 세우고 날아드는 검 끝을 사정없이 후려치는 중검!
인사치레의 일검이라고 마음을 놓고 있었기 때문일까?
무자홍은 비틀렸던 자세를 바로잡으며 검을 다잡았다. 일검만을 나누려 했는데,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마음이, 검이 손을 떠나지 않는다.
『일검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예를 다 갖춘 인사가 아닌 것 같아서…… 귀하의 검 역시 경고라 생각하기에는 모자라다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싱긋 웃으며 말하는 무자홍의 말에 창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변했다.
일검을 나누기 전과 일검을 나눈 지금 그의 눈빛이 어딘가 변했다.
“저 무자홍의 예(禮)를 담은 검은 천 마디의 말보다 무겁습니다.”
파스스스스―
검을 다잡은 무자홍의 검 끝으로 자색 빛이 흘렀다.
화산에서 나와 지금껏 누구에게도 선보이지 않은 화산의 검!
무자홍은 다시금 맞부딪쳐 보고 싶은 듯 가늘게 흔들리고 있는 검을 보았다.
은은하게 검을 타고 도는 자색 빛.
창천은 무자홍의 기운에 반응한 듯 검명을 토해내는 묵룡의 모습에 자세를 다잡았다.
피부에 닿는 기운이 심상치 않다.
일전에 맛보지 않았는가?
따갑게 찌르는 바람보다 포근하게 감싸안는 바람이 더욱 매서운 법이다.
주룩.
검을 잡은 손에서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무자홍의 검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바람이, 일전의 도귀의 도를 떠올리게 만든 것이다.
스윽.
발을 놀리는 무자홍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타핫!”
힘차게 내뱉은 기합과 함께 무자홍의 손에 쥐어진 검에서 매화꽃이 만개했다.
내리쬐는 빛을 퉁기고 밀려드는 바람을 가르며 허공 위로 자색 매화 송이를 그려나간다.
환검(幻劒)!
창천은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화려한 검광에 눈이 취하는 것을 느꼈다.
검을 저리도 쓸 수가 있던가.
창천은 쇄도하는 매화 송이를 바라보며, 손에 쥔 검을 빠르게 휘저었다.
따다다다당!
바람에 흩날리듯 날아들던 무자홍의 검이 불꽃으로 이뤄진 벽에 부딪힌 듯 더 나아가지 못했다.
흩날리는 매화 송이를 끊임없이 가르는 파상공세.
쉴 틈 없이 움직이는 창천의 검은 검막이라도 이룬 듯 변초와 실초를 구분하지 않고 베었다.
투웅!
수십 개의 매화 송이를 베었을 때일까?
벽에 가로막힌 듯한 간격이 허물어지며, 퉁겨오른 검을 비집고 무자홍의 검이 창천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서걱!
날카로운 검날에 잘린 옷깃이 바람에 날리며 무자홍의 검을 스쳤다.
“……!”
순간 무자홍의 눈이 화등잔처럼 커졌다.
자신의 검에 잘린 옷깃에 놀란 것이 아니다.
퉁겨 밀어 냈다 생각한 창천의 검이 어느새 가슴팍에 닿아 날카로운 예기를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천 마디 말보다 무거운 인사, 잘 받았습니다. 하지만 꼭 배울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아……!”
무자홍은 짧은 말과 함께 홀연히 떠나가는 창천을 잡을 수가 없었다.
울컥.
내기가 진탕되며 정신이 혼미해진 것이다.
“이게 무슨……?”
무자홍은 순식간에 녹색으로 변색되어 삭아 떨어지는 옷에 화들짝 놀라며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독!
창천의 검이 닿은 옷이 독에 절어 바스라지고 있었다.제11장 손님
몰려드는 사람들을 쳐다보며 창천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홍화루를 떠난 지 보름, 참으로 길고도 힘든 시간이었다.
찰랑.
빨라지는 걸음에 홍화주가 흔들렸다.
안개가 짙어질수록, 눈에 익은 나무들이 보일수록 걸음이 빨라졌다.
출입불가
자욱한 안개 사이로 곧게 서 있는 바위를 향해 쏜살같이 몸을 날렸다.
다 왔다!
헤매고 돌아 드디어 선인곡에 도착했다.
『하아!』
턱까지 차오른 숨을 길게 내쉬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사람이라고, 창천은 구름 떼처럼 몰려드는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좋지 않은 일이다.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짐승처럼 몰려 쫓기는 꼴이라니…… 당치도 않다.
『사부님, 돌아왔습니다. 사부님!』
아스라이 사라져 가는 안개들을 손을 저어 걷어냈다.
파스스스.
가슴 가득 퍼져 나가는 그리움이 바람을 타고 선인곡을 울렸다.
얼마나 헤맸는가.
얼마나 돌아왔는가.
창천은 목이 메일 만큼 시큰한 이름을 되뇌며 오두막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창천은 선인곡에 들어서며 안개 밖으로 몰려든 사람들을 잊었다.
『사부님! 홍화주에요, 홍화주!』
오두막을 향해 걸으며 연신 외쳐댔다.
흔들릴 때마다 술병을 쥔 손에서 홍화주의 취향이 봄날의 꽃향기마냥 선인곡으로 퍼져 나갔다.
“늦었군.”
『……?』
한걸음에 달려간 오두막, 뜻하지 않게 거기서 걸어 나오는 사내의 모습에 놀라며 창천은 걸음을 멈췄다.
사내는 그토록 그리던 사부 소요자가 아니다.
“그리 놀랄 것은 없지 않은가. 이렇게 만나는 것이 없지 않다 들었는데 말이야.”
『…….』
“좋은 향이군. 술인가 보지? 흐음, 술이라. 어디 좋은 자리가 있는가? 술이 있으니 한 잔 해야 할 것 아닌가.”
『…….』
창천은 거리낌 없이 말을 건네는 사내의 모습을 경계하며 한 발 물러섰다. 선인곡을 떠나 안팎으로 참으로 많은 일을 겪었다.
사람과 사람들…….
그 안에서 벌어진 일들은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았던 창천에게 많은 경계심을 새겨 넣기에 충분했다.
“쉽사리 자리를 알려줄 눈이 아니군. 소요자…… 아니, 그분에 대해 듣고 싶지 않은가?”
『……사부님에 대해?』
창천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사내의 모습에 입술을 깨물었다.
편안하리라 생각했던 안식처가 문득 낯설어졌다.
반겨 주리라 생각했던 이는 보이지 않고, 낯선 풍경만이 불안을 싹틔웠다.
어찌해야 하는 것일까.
사내는 눈동자를 굴리며 생각에 잠긴 창천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하긴 딱히 따로 자리가 필요할 것도 없지. 서면 그곳이 바로 산수화가 되는 곳이 이곳일 테니. 그래, 어디서든 좋겠지. 좋은 풍류와 술이라…….”
슬쩍 오두막 앞 공터로 나아간 사내의 손이 움직였다.
우웅.
그러자 창천과 사내 사이의 공기가 일렁거렸다.
대해와도 같은 미증류의 거력.
창천은 손에 쥐어진 술병을 휘감는 거대한 힘에 깜짝 놀라 술병을 놓치고 말았다.
바람을 타고 나뭇잎이 날리듯, 창천의 손을 떠난 술병이 허공을 둥실 떠올라 사내의 손 안으로 들어갔다.
퐁!
꽉 닫힌 마개가 단번에 튀어오르며 은은하게 풍겨 나오던 취향이 터진 둑처럼 퍼져 나갔다.
“제법 좋은 술이군. 그분을 위해 구해 온 것인가?”
『……누구십니까?』
“나? 아니면 그분?”
술병을 쥔 사내가 어깨를 으쓱이며 되물었다.
『그분이라 칭하는 분이 사부님이라면, 당연히 전자지요. 사부님에 대한 것은 사부님께 물으면 되는 일이니까요.』
“직접 물으면 된다라…… 그렇군. 하지만 지금은 말해 줄 그분이 계시지 않은 것 같은데? 게다가 그분이 오두막에 남기고 간 이것 역시 내가 가지고 있고 말이야.”
『……?』
창천은 사내의 소매 속에서 나온 서찰 한 장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너와 싸우러 온 것이 아니야. 이 집에 주인이 너라면, 나는 네 손님이 되는 거지. 너는 손님을 그리 맞이하는 것이냐? 그분이라면 결코 그렇지 않을 것 같은데…….”
『저는 손님을 초대한 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남의 물건에 함부로 손을 대는 그러한 손님에게 예의를 차리진 않지요.』
“흐음……. 그렇군.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군.”
창천은 작게 고개를 젓는 사내의 모습에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술병을 빼앗아 간 수법으로 짐작하건데, 눈앞의 사내는 결코 하수가 아니다.
그는 고수다.
그것도 자신이 강하다는 것을 숨기지 않는 절정고수다.
꼴깍!
침묵의 시간이 지나가고, 창천은 목이 말라오는 것을 느꼈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는 사내의 모습이, 그 기묘한 분위기가 창천의 가슴을 압박했다.
“나는 그리 생각했네. 내가 나를 스스로 손님이라 칭할 수 있는 것은 문지기가 나를 그냥 통과시켜 주었기 때문이지. 그분께서 나를 들이기 싫어 내칠 생각이었다면, 문지기가 나를 이곳으로 들였겠는가? 날 찾기 위해 혈안이 된 그들이 있는 저 밖으로 내쳤겠지.”
『문……지기?』
사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선 창천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문지기. 만인을 향해 출입불가라 외치고 있는 그것 말이다.”
『아……!』
창천은 그제야 사내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문지기라 칭하는 것은 운무진이다.
운무진은 소요자가 창안하고 은거를 위해 펼쳐 놓은 절진이다. 지금껏 산을 찾은 누구도 해체하지 못했고, 그 구성을 파악하지 못했다. 한 명의 불청객이 있었지만, 그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의도적으로 틈을 열어 소요자가 인도한 것이라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눈앞의 사내는 그러한 절진을 넘어 들어와 진을 구성하고 있는 핵(核)에 대해 논하고 있다.
문지기가 막지 않았다라…….
창천은 그가 꺼내 놓은 말이 처음으로 그럴싸하다 생각했다. 뜬금없는 인사와 서슴없이 건네는 말보다, 지금 이 말을 먼저 했더라면 아마 웃으며 그를 맞았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나는 네 눈에 붙은 의심의 불을 지울 길이 없는 것 같군. 다만, 더는 번지지 않게 할 수는 있는 것 같으니, 네가 네 간격이라 생각되는 자리에 앉아라. 이곳이라면, 어디서든 내 목소리와 네 말이 섞이지 않을 곳이 없을 테니까.”
『……그렇게 하지요.』
사내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열 걸음쯤 떨어진 곳에 자리를 틀고 앉는 창천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