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연재 > 무협물
은거기인
작가 : 건아성
작품등록일 : 2016.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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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화
작성일 : 16-11-25     조회 : 450     추천 : 0     분량 : 5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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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화

 

 

 제12장 물과 같이

 

 

 

 

 

 따악!

 커다란 소리가 계곡을 울렸다.

 밤새 눈이 내렸는지, 계곡은 하루 만에 설원이 되어 창천을 반겼다.

 ‘계절이 바뀌어도 지치지 않는 모양이구나.’

 청명한 소리로 울며 눈 위를 뛰어다니는 새들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들은 언제나 저 새들처럼 바쁜 모양이다.

 곰도 깊은 잠에 든 겨울이건만 그들은 설풍에 몸을 웅크리지도 않고 여전히 운무진을 헤매고 있었다.

 ‘얼음…… 물이라.’

 창천은 딱딱하게 얼어붙은 계곡물을 보며 품에 넣은 서찰을 꺼내 펼쳤다. 벌써 몇 번이나 읽었는지, 손때 묻은 서찰 끝머리가 반질거렸다.

 ‘사부님…….’

 서찰을 읽는 창천의 눈에 그리움이 걸렸다.

 소요자가 남긴, 혈마소가 넘겨준 서신은 길지 않았다. 한 마디 인사만큼이나 짧고, 단숨에 읽어 내릴 만큼 숨 가쁘다. 그렇기에 더욱 그리운지도 모른다.

 『하아…….』

 하얗게 서리가 앉을 만큼 긴 숨을 뱉어내며 창천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엉덩이가 냉기로 발갛게 달아올랐지만, 개의치 않았다. 육신의 추위보다 마음이 더욱 시렸다.

 

 ―무위(無爲) · 무지(無知) · 무욕(無欲).

 

 서찰에 쓰인 말을 되뇌며 그리운 마음 위에 점을 찍어 넣었다.

 물처럼 살라 했다.

 굳은 듯 멈춰 있지 말고 유연히 움직이라 했다.

 툭툭, 엉덩이에 묻은 눈을 털어내며 꽁꽁 얼어붙은 계곡 위를 걸어 건넜다.

 뽀득 뽀득―

 얼음 위에 쌓인 눈에 창천의 발자국이 깊게 남았다.

 

 * * *

 

 “지금!”

 콰앙!

 커다란 폭음과 함께 굳건하게 계곡 입구를 지키고 있던 바위가 부서져 내렸다.

 선인곡.

 모용혜미는 부서져 내리는 바위를 바라보며 숨을 돌렸다. 이 견고한 진을 부수는데 꼬박 한 계절이 다 지나갔다. 낙엽이 질 때 시작한 일이 눈이 내리고 나서야 끝이 났다.

 그토록 찾고 싶어도 찾을 수가 없던 선인곡의 기인…….

 모용혜미는 서서히 걷히고 있는 선인곡의 안개를 바라보며 꽉, 입술을 깨물었다.

 선인을 다시금 만나기 위해 선인곡을 다시 찾았던 여름.

 그녀는 계곡 주변을 철통처럼 지키고 선 마천루의 고수들을 발견하고 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혼자 상대하기에는 그들이 가진 힘이 너무나 강대했다.

 맹에 기별을 넣어 힘을 빌릴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욕심이 그 마음을 닫게 했다.

 선인이 가진 힘과 비밀…….

 모용혜미는 안개 속으로 드러나는 계곡을 바라보며 발목까지 쌓인 눈을 사박사박 밟았다.

 “전원 도열해 대기해 주세요. 사자의 자격으로 그에게 맹의 당부를 전하고 오겠습니다. 혹, 제가 일 각이 지나도 오지 않는다면…….”

 모용혜미는 도열한 사내들을 바라보며 잘근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때는 제가 가진 권한을 모두 단주님께 위임하겠습니다. 설사 제가 잘못되더라도 단주님께서는 맹을 위해 결코 경솔한 행동을 보여선 안 됩니다. 아셨지요?”

 “그리하겠소, 모용 소저. 부디, 모든 일이 잘 풀리기를 기다리고 있겠소이다.”

 모용혜미는 포권을 하는 청룡단주 무룡진을 바라보고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토록 고대하고 고대하던 만남.

 선인곡으로 걸음을 옮기는 모용혜미의 가슴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 * *

 

 디잉―

 산세를 울리는 소리에 창천은 잡은 토끼를 놓아 주었다. 한 계절을 품고 있더니, 드디어 운무진을 뚫은 모양이다.

 파다닥!

 귀를 놓아 주자 토끼가 쏜살같이 산속으로 달음질쳤다.

 먹지 못할 일이 생겼으니, 짐승을 잡아 무엇 할까.

 창천은 달아나는 토끼를 바라보며 하얗게 웃었다.

 뽀득―

 놓아준 토끼를 뒤로 하고 소복이 쌓인 눈길을 걸었다. 멀리 오두막 앞을 서성이는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으나,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기다리는 이는 오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토옥.

 걸어 나가던 걸음에 속도를 붙였다.

 진이 깨어진 이후 들어온 것을 보면, 그는 새처럼 바쁘게 움직이던 사람 중 하나가 분명했다.

 “아!”

 서로를 확인할 만큼 지척에 이르자, 오두막을 서성이던 이가 소리쳤다.

 선인곡에 내린 눈만큼이나 흰 피부와 발갛게 달아오른 두 볼 위로 호수같이 깊은 눈이 자리잡고 있는 인영은 낯선 여인이었다.

 “당신이…… 선인곡의 마검. 아, 아니 검수인가요?”

 동그랗게 눈을 뜨고 묻는 여인의 말에 창천은 말없이 웃었다. 그리고는 오두막에 들어가 미리 데워 놓은 물에 찻잎을 넣어 가지고 나왔다.

 “아……, 감사합니다.”

 여인은 창천이 내미는 찻잔을 받아 추위에 언 손을 녹였다.

 ‘저것이 바로 그 검일까?’

 여인은 창천의 허리춤에 덩그러니 걸려 있는 검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계곡에 들어서기 전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다.

 맹에서 본 검수들은 한결같이 차갑고 매서워 보였는데, 그는 마치 서생마냥 유순해 보였다.

 “저는 무림맹에서 온 모용혜미라 합니다. 일전에 선인곡에 사시는 고인과 인연이 있어 사신의 자격으로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이렇게나마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꾸벅 고개 숙여 포권을 취하는 모용혜미의 모습에 창천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맹이라는 곳이 왕을 내세운 나라도 아닐진대, 사신을 파견한다는 말이 어쩐지 우스워 보였다.

 “흠흠!”

 모용혜미는 씩 웃는 창천의 모습에 헛기침을 터트렸다.

 무시하는 것일까?

 한 마디 인사말조차 건네지 않는 그의 모습에 마음이 한층 더 조심스러워졌다. 가을 내내 운무진을 두드릴 때도 그러했다.

 그의 의중을 알 길이 없다.

 악한 마음을 먹은 것은 확실히 아니다.

 그간 귀찮을 만큼 진을 두드렸다. 그럼에도 그는 얼굴 한 번 비치지 않았다. 만나는 걸 꺼렸더라면, 진을 파훼할 수 없을 만큼 깊게 파거나 더 깊은 곳으로 숨어 버렸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그렇다고 악한 마음을 먹고 공격을 한 것도 아니다.

 그는 그저 보고만 있었다. 진을 부수는 것을, 진이 부서지는 것을 계곡 안에서 방관해 왔다. 그렇기에 더욱 의중을 알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서신을 전하기 이전에, 일전에 있었던 일들은 모두 잊어주셨으면 좋겠다는 맹주님의 전언과 함께 무림의 안팎으로 도는 수많은 소문 역시 저희는 믿지 않고 있음을 밝혀둡니다. 마지막으로 이 서신에 찍힌 직인은 맹의 초청장이기도 하니, 후에 혹 훼손을 하시게 된다면 먼저 이야기를 주시길…….”

 어렵게 말을 꺼낸 모용혜미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오래 전부터 모용혜미가 가슴에 품어온 서신.

 창천은 모용혜미가 건네는 서신을 받아 들고는 조용히 걸음을 돌렸다. 얼마나 오래 품에 품고 있었는지, 받아든 서찰이 체온만큼이나 뜨겁다.

 “아…… 저 그럼 서신에 대한 답은…….”

 말없이 돌아서는 창천의 모습에 다급해진 모용혜미가 한걸음 나서며 물었다.

 맹에 자청해서 나선 일이다.

 대답을 들어야 한다.

 아니, 좋은 결과를 얻어야 한다!

 창천은 한 걸음 나서며 외치는 모용혜미를 바라보며 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눈 속에 비치는 것이 무엇인가.

 웃음을 지운 창천의 검이 웅― 소리를 내어 울었다. 이미 오래 전 내린 결정이다.

 마음이 칼처럼 섰다.

 『저는…….』

 머릿속을 울리는 말.

 모용혜미의 머릿속을 울리는 소리에는 푸름이 서렸다.

 『물처럼 살려 합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불쑥 튀어나온 말에 모용혜미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알아듣지 못할 말, 창천의 말 속에 들어 있는 푸름 따위는 금세 잊혀졌다.

 『말 그대로입니다. 물처럼 살겠다 하였습니다.』

 “소녀는 숭산의 고승들과는 달리 선문답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 물처럼 살겠다니요? 그것이 어떠한 뜻인지 알기 쉽게 이야기해 주실 수는 없나요?”

 다시금 말을 묻는 모용혜미의 모습에 창천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제 말은 선문답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물처럼 살려 합니다. 고여 있지 않고 자유롭게 흘러가는 물처럼 말입니다.』

 “그 말씀은 이곳을 나가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글쎄요. 제 마음이 그렇게 흘러간다면 그리 하겠지요.』

 “아…….”

 모용혜미는 창천의 말에 가슴이 꽉 막히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자신과는 달리 느긋하기만 하다.

 지금 같은 혼란한 시대에 물처럼 살겠다니…….

 그 얼마나 허황된 말인가.

 “소녀가 드린 전서가 무엇인지 혹, 생각하고 계시나요?”

 『초청장을 겸한 서신. 그밖에 또 다른 용도가 있습니까?』

 “아니……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만, 시급을 요하는 일입니다. 공자께서는 공자께서 처한 상황을 아시는지요.”

 『처한 상황?』

 모용혜미는 가늘어지는 창천의 눈빛에 이를 악물었다. 물러서기 위해 걸음한 것이 아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힘든 걸음을 자청한 것이다.

 “공자께서는 아실지 모르겠으나, 지금 공자님이 수많은 소문을 야기하고 계십니다. 매화검수 무자홍에게 보여 주었던 신기에 대한 소문이 부풀려지고 왜곡되어 가고 있습니다. 선인곡에 들기 전 마주쳤던 수많은 낭인 검객들이 바로 그 반증입니다. 게다가 마천루주 혈마소가 선인곡에서 나왔다는 소문이 나돌자 수많은 정파들이 불편해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맹에서는 어지러워진 정파인들의 마음을 다잡고, 현 무림의 정세를 어지럽히고 있는 소문을 진정시키고자 공자를 무림맹으로 모시려고 이리 소녀를 보낸 것이옵니다. 그러하니 부디, 서찰을 읽어 보시옵고…….”

 『저를 이곳에서 데리고 나가고 싶으십니까?』

 창천이 길고 긴 모용혜미의 말을 단박에 잘라 말했다.

 “…….”

 모용혜미는 한층 더 날카로워진 창천의 눈빛에 바로 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그렇습니다. 이미 맹은 긴 시간을 보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소문은 점점 퍼져 정론이 되어갈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이라도 공자께서 나서서 사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상선약수(上善若水)라 하였습니다.』

 “아! 물처럼 사시겠다 하신 말이 혹, 노자에 나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인가요. 그렇다는 것은 함께 가시겠다는…….”

 휘적.

 기쁘게 말을 하는 모용혜미를 향해 창천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한 말이 아닙니다. 노자의 도덕경은 이미 고어가 된 지 오래라 개개인에 따라 해석이 갈린다지요?』

 “그게 무슨…….”

 『제가 본 물이 모용 낭자가 본 물과는 조금 다를 수도 있다는 이야기지요.』

 “……!”

 씩, 웃음 짓는 창천의 눈빛에 강맹함이 서렸다. 물러서지 않는 것은 그녀뿐이 아니다. 창천 역시 그녀의 말에, 그녀의 행동에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있었다.

 『서신은 잘 받았습니다. 어떠한 말이 어떻게 쓰여 있는지는 얼추 다 들었으니, 그저 간직해 두겠습니다. 그럼 돌아가 보십시오. 언젠가 흐르다 보면 만날 날이 있겠지요.』

 단호히 말하는 창천의 모습에 모용혜미의 눈이 커졌다.

 안 된다!

 이렇게 그의 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어떻게 맡은 일이던가.

 어떻게 뚫은 운무진이던가.

 “그런…… 공자님, 공자님께서는 꼭 무림맹에 가셔야 합니다. 지금의 일이 후에 어떠한 화를 부를지 모릅니다. 소문이라는 것은…….”

 다급히 말을 뱉는 모용혜미의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저는 이미 제 뜻을 밝혔습니다. 모용 낭자께서는 한 번 굽어진 물줄기를 바꿀 수 있습니까? 저는 그럴 수 없을 것 같은데요.』

 우웅―!

 묵룡의 울음소리가 계곡을 울렸다.

 검이 울며 내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호랑이의 울음처럼 듣는 이의 가슴을 사정없이 물어뜯었다.

 칼처럼 선 것은 창천의 마음만이 아니다. 묵룡 역시 그의 마음과 같이 날카롭게 이빨을 세우고 있다.

 “저, 저는…….”

 검이 뿜어내는 예기에 모용혜의 입술이 파랗게 질렸다.

 물러서면 안 되는데…….

 이렇게 물러설 수는 없는데…….

 내려앉은 가슴은 다시 설 줄을 몰랐다. 검의 울음소리에 기세가 죽어버렸다.

 주춤 주춤.

 모용혜미는 무를 수 없는 걸음을 뒤로 무르다 결국 고개 숙여 포권을 건네고는 계곡 밖으로 돌아섰다.

 서생처럼 온유하게만 보이던 그의 첫인상이 산산이 부서져 쌓인 눈처럼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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