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연재 > 무협물
은거기인
작가 : 건아성
작품등록일 : 2016.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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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화
작성일 : 16-11-25     조회 : 442     추천 : 0     분량 : 5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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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화

 

 

 

 

 

 “운무진이 깨졌다지?”

 바둑알을 퉁기며 검왕이 슬쩍 물었다.

 세간을 시끄럽게 만들어 놓은 선인곡의 운무진이 한 계절을 다 보내고 나서야 열렸다.

 “흐음……. 글쎄. 깬 것인지 깨어 준 것인지 모르겠군. 쉴 틈 없이 두드렸음에도 이제야 깨진 절진이야. 그가 열어 주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더라면 일 년이 다 가도 깨지 못했겠지.”

 “그러한가?”

 따악!

 “그럼. 진이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니까.”

 세차게 바둑알을 내려치는 신권의 얼굴에 웃음이 서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백중지세로 보이던 바둑판 위 싸움이 신권의 한 수에 승패가 갈리고 있었다.

 “허! 좋은 한 수구먼. 설마 지금껏 이 한 수를 기다려 왔는가?”

 “물론. 그렇지 않았더라면 자네가 어찌 나와 바둑으로 동수를 둘 수 있겠는가. 자네의 바둑은 검만큼 날이 서지 못했어.”

 “허, 그렇구먼. 내 수를 읽혔구먼. 고작 작은 바둑판이라 우습게 보았더니 허! 쉽게 마음을 읽혀 버리다니…….”

 검왕은 신권의 말에 길게 자란 수염을 쓰다듬으며 판세를 들여다보았다.

 “첫 수는 내 마음대로 둔 것이니 내 뜻일 것이고, 두 번째 수 역시 내키는 대로 둔 것이니 내 뜻일진데, 어디서부터 자네의 뜻이 섞여 수를 읽혔는지 도무지 모르겠구먼. 자네가 내게 십 수나 내어준 판인데 대체 어디서부터 내 수를 읽은 것인가?”

 “말해 봐야 고루한 이야기가 될 뿐일세. 어디서 읽히고 어디서 읽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야. 중요한 것은 자네가 내 수에 휘둘려 졌다는 것이지.”

 “허……, 그도 그렇구먼. 그래 내가 내기에서 졌으니, 말해 보게. 자네는 내게 무엇을 말하려 했는가?”

 “별것 아닐세. 사실 내기도 필요 없을 만큼 심심한 이야기지.”

 신권은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검왕을 바라보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오늘부터 무림맹에서 내 이름을 빼 주게나. 허허. 오래 전부터 생각해 왔던 일인데, 늦어 버렸어. 잠시 앉아 있겠다는 것이 벌써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가 없구먼.”

 “……그게 무슨 말인가? 맹에서 이름을 빼 달라니?”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하는 신권의 말에 검왕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무림맹에서 이름을 빼 달라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어차피 구색을 갖추기 위해 만든 자리가 아닌가. 맹은 이미 맹주인 자네를 중심으로 단단히 뭉쳤네. 더 큰 것을 생각한다면 이만 나를 보내주게. 방금 전 보지 않았는가. 하나쯤은 빈자리가 있어야 더 크고 높게 도약할 수 있는 것이라네.”

 “허……, 자네!”

 “그간 고마웠네. 모두가 함께 했던 시절 맺은 불변의 약속은 잊지 않을 테니 걱정 마시게.”

 신권은 채 말을 잇지 못하는 검왕을 향해 말하고는 서둘러 방을 나섰다.

 “선인곡의 은거기인이라…….”

 걸음을 옮기는 신권의 얼굴에 웃음이 걸렸다.

 

 * * *

 

 모용혜미가 다녀간 후.

 새처럼 바삐 운무진 안을 움직이던 이들이 사라졌다. 텅 빈 공터처럼 황량해진 선인곡의 입구를 바라보며, 창천은 말없이 부서진 바윗돌을 쓸어 넘겼다.

 

 출입불가

 

 검으로 써내려간 유려한 글귀가 더는 보이지 않는다.

 다시 세워 볼까?

 멀리 떨어진 바위를 하나 주어와 생각했다.

 오랜 시간 바라보던 것이 사라지고 나니, 어쩐지 마음이 휑해진 기분이 들었다.

 차앙―

 허리춤에 찔러 넣은 검을 조심스레 뽑아들었다. 그러자 검신이 햇빛에 반사되어 산 위로 늘어선 나무 그림자를 쪼갰다.

 사악, 사악.

 창천은 검을 놀려 쪼개어지는 나무 그림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햇빛에 비춰진 검광은 일전에 도귀가 달빛을 가를 때와는 또 다른 검선을 그리고 있었다.

 파악!

 베어져 나가는 그림자를 향해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검신을 스치는 빛이 아닌, 예기를 머금은 날로 그림자를 베어 보고 싶었다.

 슉―!

 길게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든 검날이 나무 그림자를 파고들었다.

 서걱.

 눈의 착각이라고 느낄 만큼 찰나의 순간, 창천은 검에 닿은 나무 그림자가 움찔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과연…… 이런 방법도 있구나.』

 빛 무리에 갈라지는 그림자들을 바라보며 창천은 싱긋 웃었다. 머릿속에서 꽉 막혀 있던 무언가가 깨어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허, 굉장하구먼. 혹, 산이 사부라도 되는 것인가? 굉장한 검을 배웠구먼.”

 『……?』

 운무진을 헤집고 다니던 사람 중 하나일까?

 창천은 천천히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끼며 손에 쥔 검을 검집에 넣었다.

 『모두 떠나간 줄로만 알았는데, 아직 남은 분이 계셨습니까?』

 청아하게 퍼져 나가는 창천의 말이 다가서는 이에게 닿았다.

 “허, 선인곡의 기인이라더니 과연 명불허전이로구먼. 혜광심어라…… 이게 얼마만에 듣는 마음의 소리인가?”

 다가선 이가 창천의 소리에 놀라며 물었다.

 얼마만이던가, 이 소리를 다시 듣는 것이…….

 창천은 혜광심어를 알아듣는 그를 바라보며 공손하게 포권을 취했다.

 『선인곡에 살고 있는 창천이라 합니다. 고인께서는 어찌 이곳을 찾으셨는지요? 무림맹에는 마음을 밝힌 것으로 아는데…….』

 “아아……. 그래, 그 이야기는 맹을 나올 때 들었네. 나는 신권이라 불리는 사람일세. 오래 전부터 그리 불려 이제는 이전의 이름이 기억나질 않는구먼. 그래, 맹에 가지 않겠다 말했다지?”

 『꼭 가지 않겠다 말한 것은 아닙니다. 아직은 제 마음이 그리 흐르지 않아…….』

 “상선약수라…… 그 말도 들었네. 물처럼 살겠다 했다지?”

 딱 잘라 말하는 신권의 모습에 창천이 가볍게 고개 숙여 답했다.

 “그래, 물은 아래로 흐르는 법이니까. 맹처럼 높은 곳으로 흐를 리는 없겠지. 어린 나이에 강단이 제법이구먼. 다른 이들은 못 가서 안달인 곳인데 말이야.”

 『알지 못하는 것을 탐낼 정도로 욕심이 과하지는 않습니다.』

 “그도 그렇겠구먼. 알지 못하는 것이라…….”

 신권은 가볍게 웃으며 답하는 창천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른 젊은이다. 신권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을 하고, 그 말을 지키고 산다.

 예와 도와 격이 물질에 무너져 가고 있는 세상이 아닌가.

 과연 이와 같은 젊은이가 현 무림에 몇이나 될까?

 “흠……. 날이 춥구먼. 혹, 따듯한 차 한 잔 없는가? 나이를 먹었더니 추위에도 몸이 축나는 것 같아서 말이야.”

 『안으로 드시겠습니까? 질 좋은 차는 아니나, 몸을 따듯하게 해 줄 감로차 정도는 있습니다.』

 “오, 감로차라. 좋지! 좋아!”

 기쁘게 소리쳐 말하는 신권의 모습에, 창천은 오두막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기운이 나쁘지 않다.

 커다란 눈망울에는 악의도, 욕망도 보이지 않는다.

 고승처럼…….

 아니 한 걸음 떨어져 보면, 무림인이나 고승이 아닌 초로의 노인처럼 보이기도 했다.

 다륵.

 다기를 꺼내어 불 위에 데워 놓은 물을 따라 감로차를 우렸다. 쌓인 눈을 치워낸 오두막 앞 공터는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했다.

 “좋은 곳이구나.”

 잘 다듬어진 공터를 바라보고 신권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람의 손길이 닿았음에도 자연스럽다. 있는 그대로 뒤죽박죽 자란 나무들이 비질에 쓸려나간 눈을 그림자로 덮는다.

 처음부터 그랬다는 듯, 신권은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공터를 훑어보며 양지 바른 자리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무엇이 있어 좋은 곳이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응? 아, 뭐 별거 있겠는가. 해 뜨는 게 좋고, 산새가 우는 것이 좋고, 넓은 마당이 좋으며, 산 전체를 정원처럼 다루고 있으니 이 얼마나 좋은 곳이냔 말이야. 이런 절경을 품에 안고 있는 집은 다시 구하기 힘들 걸세.”

 『그렇습니까?』

 신권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음미하고는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껏 많은 곳을 둘러보았지만, 이토록 탐이 나는 곳은 진정 처음이야. 부럽다 못해 샘이 날 정도네.”

 『저 역시 그렇습니다. 부러운 집이지요. 사부님께서는 참 좋은 곳에 터를 잡으셨다 생각합니다.』

 “아…… 사부님이 계셨는가? 하긴, 자네만한 인재가 그냥 날 리 없지. 어떤 분이신가? 혹, 말해 줄 수 있겠는가?”

 신권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짐작은 하고 있지만, 그의 입에서 확실한 답을 듣고 싶었다.

 『글쎄요. 좋은 분이라는 말밖에는…….』

 “말할 수 없다?”

 『예, 죄송합니다.』

 “흐음…… 뭐 그리 말한다면 더는 캐물을 수도 없지. 그것을 묻기 위해 온 것도 아니고. 또 솔직히 말해 모르고 있는 것도 아니니 말이야.”

 『역시…… 알고 계실 것 같았습니다.』

 신권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창천을 바라보며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꿀꺽.

 단번에 삼킨 감로차가 한기가 스며든 몸을 따듯하게 데웠다. 별 볼일 없는 차라 말했지만, 그가 내온 차는 그 어떠한 차보다 깊은 맛이 있었다.

 “검귀, 그 사람이 무어라 말하던가? 혹, 우리들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해 주던가?”

 『그분도 알고 계십니까?』

 “응? 아아, 그리 말하는 것을 보니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은 모양이로구먼. 당연한 것을…… 주책이구먼. 그가 남의 귀에 독을 풀 사람은 아니지. 그래, 나도 참 나이를 먹으니 한심해졌어. 그런 한심한 생각이나 하다니 말이야.”

 신권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는 창천의 모습에 휘휘 고개를 저었다.

 “오랜 시간 어울리지 않는 곳에 앉아 있었더니, 나도 모르게 물이 든 모양이야. 허…… 늦게라도 나왔으니 이제라도 제 색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삐익―

 창공 위로 날아오른 매 한 마리가 길게 울었다.

 좋은 날, 좋은 만남, 좋은 인연.

 얼지 않은 눈이 바람에 날려 주름진 신권의 얼굴을 두드렸다.

 “자네를 보니 이제야 알 수 있겠구먼. 나 역시 다르지만 물이 되고 싶었던 게야. 상선약수라,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니, 내 맹을 나오며 이렇게 자네에게 흘러들어온 것은 어찌 보면 자연의 섭리만큼이나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군. 그래, 그럼 어디 노부와 손을 한 번 섞어 보겠는가?”

 톡톡.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신권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잘 모르겠습니다. 어이해 무림인들은 이렇게나 저와 손을 섞고자 하는 것입니까? 물처럼 살고 싶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헌데 어이해 그러십니까?』

 신권은 투명한 창천의 두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물에도 종류가 있다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라 믿네. 자네가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고 싶다면, 노부는 격하게 흐르는 격류이고 싶네. 평생을 치열하게 살고 싶었지만, 둑이 높아 그러지 못했지. 허나, 황혼이 다 된 지금 노부를 막고 있던 둑이 터졌으니, 격류가 되어 흐르는 것이 당연치 않은가.”

 『…….』

 “자네가 진정 물처럼 살고 싶거든 다른 물줄기들의 흐름 역시 막지 말게.”

 거침없이 말하는 신권의 말에, 창천의 눈이 커졌다.

 파악.

 숨김없이 뿜어져 나오는 그의 투기가 몸을 두드렸다.

 싸우고 싶다.

 싸우고 싶다.

 싸우고 싶다!

 메아리처럼 가슴을 울리는 신권의 투기가 심장을 쳤다.

 두근!

 잦아진 맥박이 살아나 창천의 몸을 뜨겁게 달궜다. 말보다, 이성보다, 감정이 빠르게 섰다.

 “흐르는 물은 동이라, 멈춰 있지 않는 법일세.”

 창천의 변화를 느낀 신권이 웃으며 말했다.

 좋은 기운이다.

 솔직하게 내뿜은 투기에 반응해 일어나는 산악과도 같은 기세.

 신권은 가볍게 몇 걸음을 물러나며 거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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