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序
참으로 햇살 좋은 날이다.
엊저녁 내린 눈이 아직도 새하얗다. 덕분에 태양이 쏟아 내는 햇살이 반사돼 눈이 부실 지경이다.
반쯤 감겼던 눈이 햇살 때문에 억지로 뜨였다.
정신을 차리는 것과 동시에 밀려드는 고통에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시선은 저절로 욱신거리는 가슴으로 향했다.
가슴팍을 마치 뜯어내듯 지나쳐 간 커다란 자상이 눈에 들어온다. 가슴뿐만이 아니다. 전신에 걸쳐 수도 없는 부상들이 가득하다.
주변에는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 소리, 새 소리…… 심지어 살아 있는 그 어떠한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무사히 도망쳤다?
하하! 웃기는 소리다.
지금 나를 쫓는 자들이 누구인지 너무나 잘 알기에 그런 생각 따위는 애초부터 하지 않았다.
혈전대(血箭隊).
마교 최고의 무력 집단. 목표한 것을 결단코 놓치지 않고, 반드시 죽이는 녀석들이다. 오 년 전까지만 해도 내 수족과도 같았던 놈들이니 그들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와서 생각하는 거지만 혈전대를 그놈에게 준 건 큰 실수다.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를 한들 무엇하랴.
나는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처 부위에서 새어 나오는 피가 연신 가슴팍을 움켜쥔 손가락 사이로 비집고 흘러내린다. 당장이라도 정신을 놓고 쓰러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천하를 호령한 생사도(生死刀)가 이렇게 초라하게 죽을 수는 없으니까.
차가운 바람이 전신을 훑고 지나간다.
쿠웅!
손에 들린 도가 땅에 틀어박히며 굉음을 토해 낸다.
동시에 나는 주변이 쩌렁거릴 정도로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언제까지 쥐새끼처럼 숨어 있을 생각이냐! 반송장인 내가 아직도 그리 두렵더냐!”
나의 외침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놈을 보는 순간 절로 입가에 걸리는 미소를 감출 수가 없었다.
“이제야 나타났구나.”
“…….”
한겨울의 서릿발을 연상케 할 정도로 차가운 인상의 사내. 한때는 나의 그림자와도 같았던 놈.
하지만 이제는 그 그림자가 내 숨통을 끊으러 왔다.
혈전대 대주 전귀(戰鬼) 추잔양(鄒殘陽)은 애써 냉정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내 눈까지 속일 순 없다. 평소 감정을 감추기로 유명한 놈의 그런 모습에 웃음을 거두는 게 힘들었다.
추잔양이 뭔가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교주님…… 용서하십시오.”
“많이 컸구나. 세상 그 누가 나에게 용서를 하라 마라 말할 수 있단 말이냐.”
“죄송합니다. 주제넘었습니다.”
나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놈의 모습을 보며 나는 비웃음을 머금었다.
알고 있다. 이놈은 그저 명령을 따른 것뿐.
그리고 혈전대를 이렇게 키운 것 또한 나 아니던가. 그것에 대해 원망할 생각은 없지만 키우던 개가 이를 드러낸 꼴이니 내 사육 방식이 어쨌든 간에 불쾌한 것은 당연지사다.
파앙.
땅에 박아 두었던 도가 뽑히며 맑은 음을 토해 냈다.
내가 도를 뽑아내자 추잔양은 놀랐는지 뒤로 반보쯤 물러났다.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큭큭, 다 죽어 가는 송장인데도 무섭긴 무서운 모양이구나.”
“……그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팔 할 공력을 잃으시고도 저희 혈전대 거의 전원을 도륙하셨습니다.”
놈의 말투에는 깊은 공포심이 묻어났다.
상황은 최악인데도 불구하고 추잔양의 나에 대한 감정이 썩 유쾌했다.
“내가 네놈들을 잘 키우긴 한 모양이야. 독에 당했다고 해도 이렇게 날 죽일 놈들은 흔치 않으니까.”
나의 비꼬는 말투에 잠시 머뭇거리던 추잔양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꺼내어 들었다. 그는 검을 든 손을 앞으로 한 채로 깊게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 죄, 훗날 죽어서라도 갚겠습니다.”
“나에게 이 죄를 갚고 싶다면 당장 돌아가서 헌원기(軒元奇) 그놈의 목을 쳐서 가지고 오너라.”
“…….”
굳이 대꾸하지 않지만 알고 있다.
한때는 비록 내 충실한 사냥개였지만 이제 이들은 마교 부교주 헌원기의 직속 수하들이다. 내 명령보다 그의 명령을 따를 것은 안 봐도 자명하다.
추잔양은 내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억지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를 보며 내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직도 그 버릇은 여전하구나. 아는 사람을 죽일 때 두 눈을 마주하지 못하는 건. 그 멍청한 습관 못 고치면 언젠가 네놈이 죽을 게다.”
“……쳐라!”
입술을 꽉 깨물며 외치는 추잔양을 보며 나는 다시금 실소를 머금었다.
살 생각은 버렸다.
이렇게 깊은 상처를 입은 채로 지금 쏟아져 들어오는 수십 명의 절정고수들을 막아 낼 힘은 없으니까.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생사도, 사람들은 날 그리 불렀지.’
생(生)과 사(死)를 정할 수 있는 세상 유일한 사내. 그게 바로 내가 아니던가.
손에 들린 도에서 검붉은 강기가 피어올랐다.
“오너라! 애송이들!”
무림맹에 급보가 날아들었다.
서찰의 내용은 간단했지만, 그 내용만큼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단 한 줄의 문장이 무림을 뒤흔들었다.
마교 교주 생사도(生死刀) ― 사(死)***
끼이익. 끼이익.
기괴한 나무들의 부대끼는 소리에 정신을 잃고 있던 사내가 꿈틀했다. 사내는 자신의 손가락이 움직인다는 것을 느끼고 놀라 버렸다.
그 이유는 단 하나였다.
‘살아 있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분명 자신의 몸에는 셀 수도 없이 많은 검과 암기들이 틀어박혔다. 개중에 심장을 관통한 것도 있었거늘 어찌 자신이 살아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사내의 정체는 바로 마교 교주 생사도 용무련(龍無憐)이었다.
딱딱한 나무 위에 엎어져 있던 용무련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난 용무련은 자연스레 자신의 몸을 살폈다. 수도 없이 입었던 상처들이 거짓말처럼 보이지 않는다.
보통 사람이라면 깜짝 놀라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용무련은 침착했다. 원래부터 어떠한 일에도 놀라지 않는 담대한 성격을 지닌 그다. 그런 용무련이었기에 지금 같이 믿어지지 않는 상황에서도 이토록 냉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인지 파악하기 위해 용무련은 주변의 전경을 살폈다.
세상이 온통 새까맣다.
너무나 짙은 어둠 때문에 한 치 앞을 분간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이 있다. 지금 자신은 조그마한 나룻배를 탄 채로 강을 가로지르고 있다.
주변을 살피기 위해 안력을 끌어 올린 덕분에 용무련은 이곳 나룻배 위에 자신이 아닌 다른 자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자신의 몸에 있는 상처가 없어진 것도 놀랐지만, 그것보다 이토록 지척에 상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알아차리지 못한 게 용무련에게는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고작 일 장이다.
일 장 간격 안에 누군가가 다가온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게다가 정체불명의 괴인은 키가 무려 팔 척을 훌쩍 넘을 정도였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산다는 무림에서조차 이토록 큰 자는 본 적이 없다.
용무련은 상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어이.”
“…….”
“귀머거리냐?”
무시하고 있던 괴인은 용무련의 말투에 기분이 나빴는지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괴인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용무련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섬뜩함을 느꼈다.
‘이놈…… 보통 인간이 아니군.’
드러난 얼굴은 보통 사람과 크게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흰자위가 없이 온통 새까맣기만 한 눈동자는 결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거기다 하얗다 못해 창백한 피부. 시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용무련을 향해 시선을 돌렸던 괴인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오만한 놈이라더니 틀린 소리는 아니군.”
오만하다는 말에도 용무련은 오히려 미소를 흘렸다. 크게 틀린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용무련이 입을 열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 능력이 없는 놈한테는 오만이겠지만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이런 걸 자신감이라고 부르거든.”
“…….”
괴인은 용무련의 말에 기가 차다는 듯이 쳐다봤다. 그러고는 무시하려는 듯이 고개를 휙 돌리고는 다시금 노 젓기에 열중하려 했다.
그러자 용무련이 살기 어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이, 경고하지. 함부로 내게 등을 보이지 마라. 일 장 거리라면…… 네놈이 누구든 간에 죽여 버릴 수 있으니까.”
“뭐야? 큭, 큭큭큭!”
괴인의 시선이 다시금 용무련에게로 향했다. 그러고는 미친 듯한 웃음까지 터트렸다.
괴인은 자신 앞에서 이토록 건방지게 구는 용무련의 태도에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괴인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걷혔다. 미소가 사라진 얼굴에는 무시무시한 분노가 자리했다.
“건방진 놈. 네놈 따위가 날 죽이겠다고?”
“왜? 못 할 것 같아?”
용무련은 자신의 어깨 뒤로 손을 치켜들었다. 언제나 함께했던 용무련의 마병 요란도(妖丹刀)를 뽑기 위해서다. 한데 요란도를 뽑기 위해 등 뒤로 향했던 손이 허전하다.
내심 당황하며 어깨 근처를 곁눈질로 살폈지만 있어야 할 요란도가 존재하지 않았다.
‘젠장.’
상대는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고수다.
그런 자를 상대로 빈손으로 싸운다는 건 분명 쉽지 않은 일. 하지만 용무련은 결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잠시 용무련을 향해 살의를 불태우던 괴인은 억지로 화를 내리누르며 말했다.
“운이 좋군. 지금 당장이라도 손봐 주고 싶지만…… 네놈을 데려오라는 명령이 있으니 참지. 그러니 네놈도 더는 내 신경 건드리지 말고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거다. 이 나룻배 위에서 싸움질을 벌여 봤자 피차 좋을 일은 없을 테니까.”
상대가 물러서자 용무련은 치켜들었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어차피 용무련 또한 지금 이 괴인과 싸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금 벌어진 이 알 수 없는 상황. 그 모든 것을 풀어 줄 수 있는 자는 당장으로써는 눈앞에 있는 이 괴인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 막 내뱉은 괴인의 말에서도 하나의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용무련은 다시금 노를 젓기 시작한 괴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누가 날 데리고 오라고 한 모양인데, 그게 누구냐?”
“곧 알게 될 거다. 그리고 이렇게 시끄럽게 떠들 정도로 기운이 남았으면 같이 노라도 젓든가.”
용무련은 노라도 저으라는 말을 못 들은 척하며 다시금 배 후미로 가서 걸터앉았다.
궁금한 것이 많다.
저 괴인이나, 자신을 데리고 오라고 한 그자에 대해서도 궁금하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신경이 쓰이는 것이 있다.
몸을 기대고 앉아 있던 용무련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이.”
“뭐야, 또?”
괴인의 목소리에 절로 짜증이 묻어 나왔다. 하지만 용무린은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너무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말해.”
“분명히 내 몸에 수십 개의 병기들이 틀어박혔단 말이야…… 그런데 날 어떻게 살린 거냐? 그것도 이렇게 멀쩡하게.”
전신이 찢겨져 나갔다. 그때 느꼈던 고통이 아직까지도 뇌리에 생생하거늘 어찌 이토록 멀쩡하단 말인가. 찢겨져 나갔던 상처는커녕 바늘만 한 자상조차 보이지 않는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사지가 찢겨져 나간 사람을 살려 내는 건 천하제일명의라 불렸던 화타가 살아온다고 해도 불가능하다.
용무련의 질문에 노를 젓고 있던 괴인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 모습에 용무련의 주먹이 꿈틀했다.
뭐가 우습냐며 용무련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고 할 때였다.
“네 말대로다. 네놈의 시신은 갈가리 찢겨졌고 머리도 효수되어 나무에 매달렸었지.”
“뭐야? 효수까지 시켜서 구경거리로 만들었다는 거야? 이 망할 새끼들이…….”
상대가 눈앞에 있다면 씹어 죽일 듯이 말을 내뱉던 용무련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당황한 듯이 되물었다.
“잠깐, 그럼 목까지 잘려서 걸렸던 나를 살려 냈다는 거야? 대체 누가?”
뒤통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용무련의 시선을 느꼈는지 괴인이 고개를 돌려 그를 마주 봤다. 잠시 말없이 용무련을 바라보던 괴인이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목까지 잘린 놈을 살릴 수 있겠냐?”
“당연히 없지.”
“잘 아는군. 그럼 됐지?”
삐걱, 삐걱.
말을 마친 괴인은 다시금 노를 젓기 시작했고, 용무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