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이 염왕전의 주인은 일부러 용무련을 향해 이 같은 기도를 뿜어내는 것이다. 한데 버티고 서 있다. 버텨 내지 못할 것에 모두가 걸었거늘, 이 녀석은 자신들의 생각보다 훨씬 지독한 놈이었다.
쿠웅!
검붉은 문이 마지막 소리를 토해 내고 문이 활짝 열렸을 때 이 길의 가장 안쪽에 있는 한 사내의 모습이 용무련의 눈에 들어왔다.
멀리서 봐도 단숨에 볼 수 있을 정도의 거구.
키가 무려 십오 척이 훌쩍 넘을 정도로 거대했고, 전신은 마치 화상을 입은 것처럼 불그스름하다. 염왕전의 가장 안쪽에 앉아 있던 그가 서서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러자 용무련의 옆에 있던 괴인이 앞으로 나가 부복하며 입을 열었다.
“호세사천왕(護世四天王)의 일인 지국천왕(持國天王)이 지하의 주인이신 염라대왕님을 뵈옵니다.”
괴인의 외침과 함께 염라대왕의 몸에서 풍겨져 나오던 사람을 압도하는 기세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힘겹게 버텨 오던 용무련은 그제야 깊은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염라대왕은 무서운 기세를 거둔 채로 웃으며 입을 열었다.
“기다리던 손님이 오셨군.”
말과 함께 염라대왕은 자신의 앞에 잔뜩 놓여 있던 문서들을 옆으로 밀었다. 그러고는 들어오라는 듯이 가볍게 손짓했다.
그러자 부복하고 있던 지국천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용무련과 함께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용무련은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 염라대왕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염왕전이라는 이름을 봤을 때부터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지옥에서 염왕이라 불릴 만한 존재가 누가 있겠는가.
오로지 단 한 명, 지옥의 주인인 염라대왕뿐이다. 염라대왕이 자신을 불렀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자신을 이곳까지 데리고 온 저놈.
그자의 정체가 다름 아닌 호세사천왕, 즉 동서남북을 상징하는 사대천왕의 일인이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그토록 자신만만했던 이유를 알 법도 했다.
잠시 이들에 대해 생각하는 사이 어느새 용무련은 염라대왕의 앞에 도착해 있었다. 의자에 앉아 있음에도 그 키가 워낙 커서 용무련은 상대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피를 연상케 하는 새빨간 붉은 옷과 붉은 피부를 지녔지만, 염라대왕은 선한 노인의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가 염라대왕이라는 것을 안 이상 전신에 흐르는 긴장은 사라지지 않았다.
옆으로 밀어 둔 서류 뭉치에서 종이 한 장을 뽑은 염라대왕은 그 내용을 읽으며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그리고 이내 종이를 내려놓은 염라대왕이 용무련을 바라보며 말했다.
“참 재미있게 살았구나.”
“그 종이 한 장에 다 적힐 정도로 단순한 삶을 산 기억은 없소만?”
이죽거리는 듯한 용무련의 말투에 옆에서 대성이 터져 나왔다.
“이놈이 감히 누구 안전이라고 까부는 것이냐!”
커다란 고함과 함께 어둠 속에서 세 명의 거한들이 걸어 나왔다.
그들은 제각기 손에 삼차극(三叉戟), 여의보주(如意寶珠), 비파(琵琶)를 들고 있었다.
이들의 정체는 호세사천왕의 나머지 삼인인 광목천왕(廣目天王)과 증장천왕(增長天王), 다문천왕(多聞天王)이었다. 그리고 방금 전에 일갈을 내지른 것은 개중 삼차극을 들고 있는 광목천왕.
노여움을 표출하는 광목천왕을 향해 염라대왕이 가볍게 손을 들어 멈추라는 의사를 표시했다. 그러자 광목천왕은 단숨에 입을 닫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갑자기 일이 이렇게 되니 당황스럽겠지.”
“물론이오. 성격상 질질 끄는 게 싫으니 거두절미하고 말하겠소. 나를 보자고 한 이유가 뭐요?”
상대가 보통 인물이 아닐 거라는 건 처음 나룻배에서부터 직감했다. 하지만 이건 용무련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그 이상의 것이었다.
염라대왕이 자신을 불렀다.
그것도 사천왕 중 하나인 지국천왕에게 시켜서 말이다. 그만큼 염라대왕이 자신을 보자고 한 일 또한 보통의 것이 아닐 거라는 소리다.
염라대왕은 가만히 용무련을 내려다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다.”
“부탁이 뭐요?”
“하계에 내려가서 귀찮은 미꾸라지들을 좀 잡아와야겠구나.”
“미꾸라지?”
용무련이 당황한 듯이 염라대왕을 바라봤다.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당황했던 용무련이 이내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미꾸라지를 말하는 건 아닐 테고…….”
“당연하지. 정말 그 미꾸라지를 원했다면 너를 불렀겠느냐?”
“그럼 대왕이 말하는 그 미꾸라지가 누구요?”
용무련의 말에 염라대왕은 새하얀 수염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잠시 침묵을 유지하던 염라대왕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운명을 거스르는 자들이지.”
“…….”
“인간에겐 정해진 수명이 있다. 그들에게 주어진 수명은 제각기 다르긴 하지만. 물론 넌 딱 스무 살까지 살다가 죽어라 이렇다는 소리는 아니야. 운명이란 것이 그토록 단순한 것이 아니니까. 정해진 수명 안에서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스스로의 운명이 정해지는 것이지.”
모든 사람은 태어나고 또 죽는다.
그것은 태초부터 시작 된 자연의 순리다. 사람뿐만이 아니다. 생명이 있는 그 모든 것들은 이 고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한데…… 그걸 벗어나는 자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계에선 우화등선이라고 하던가? 그런 것이 있지 않느냐.”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는 걸 말하는 거 아니오.”
“그래, 무림인들 중 일부는 고강한 경지에 오르면서 스스로의 수명을 늘리지. 그러다 결국 우화등선을 하고 말이야. 한데 그조차 하지 않고 하계에서 돌아다니는 놈들이 있다.”
보통 사람의 수명은 사십에서, 많이 살아도 백 세를 넘기기 힘들다.
하지만 그에 반해 무림인들의 평균 수명은 꽤 길다. 그것은 무공으로 인한 심신(心身)의 단련이 그들의 영혼을 더 오래 몸에 머물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그 탓에 무림인 중에서는 백 세가 훌쩍 넘고도 정정한 이들이 많은 것이다.
하지만 그토록 오랜 시간 자신의 몸을 버텨 낼 수 있는 절정의 무인들의 대부분은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한다. 그 방법이 평범한 죽음이든, 아니면 하늘로 오르는 우화등선이든 말이다.
이들은 문제가 아니다.
비록 보통 사람에 비해 오래 산다고 하지만 그것은 그들 스스로가 몸을 단련한 덕분에 생긴 일. 거기다 정해진 순리를 벗어나는 것 또한 아니니까.
문제는 바로 이 단계를 넘어선 자들이다.
죽음을 거역하는 자들.
죽어도 한참 전에 죽었어야 할 자들이 버젓이 살아 있다. 그들은 명계의 눈을 속이고 아직까지도 하계에서 버젓이 돌아다니고 있다.
거기다가 그들은 그 막강한 힘으로 하계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다.
아직 죽지 않아야 할 수많은 이들이 그들에 의해 죽어서 지옥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살아 있는 자들의 운명 자체를 바꾸어 버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간과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염라대왕이 말을 이어 나갔다.
“생명이 있는 존재라면 태어난 이상 언젠가 죽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명계의 법! 그 질서를 어지럽히는 놈들, 명객(冥客)이라 불리는 이놈들이 바로 네가 잡아야 할 놈들이다.”
“그럼 내가 잡아야 할 게 사람이라는 거요?”
“엄연히 보면 그렇지.”
“시시하군.”
좀 더 그럴싸한 놈들을 기대했는데 인간이라는 말을 들으니 김이 팍 새 버렸다.
그런 용무련을 보며 염라대왕은 웃음을 흘렸다.
용무련의 마음은 이해한다. 그랬기에 용무련을 바라보던 염라대왕이 말했다.
“쉬운 일으로 보이느냐?”
“물론이오. 저 아래에서 내 적수는 없으니까.”
용무련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하지만 그런 용무련의 행동에 염라대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왜 너를 선택했는지 아느냐?”
“……?”
“그건 네가 그들을 이길 승산이 눈곱만큼이라도 있기 때문이다.”
염라대왕의 말에 용무련이 대꾸했다.
“그 말뜻은 그들이 나보다 강하다는 거요?”
“당연하지. 너보다 약한 놈들이라면 우리가 이토록 골머리를 싸매지는 않았을 게야.”
자신을 얕보는 듯한 염라대왕의 말투에 기분이 상했지만 용무련은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기분이 나쁜 건 사실이지만 이곳 염왕전에 처음 왔을 때 느꼈던 그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거대한 기운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분하지만 염라대왕이 그리 말한다면 그것은 아마 틀리지 않을 게다.
염라대왕은 책상을 탕 치면서 입을 열었다.
“생사도라 불리며 마교의 교주였으니 네 무공에 자신을 지니고 있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인간으로 살아온 너와는 차원이 다른 존재들이다. 더군다나 지금 놈들은 점점 황실과 무림에 손을 뻗치며 도를 넘어서고 있다. 그 덕분에 아직 죽어선 안 될 이들이 저승의 문턱으로 자꾸 넘어오고 있지. 그중 하나가…… 바로 너다.”
“그게 무슨 소리요?”
가만히 염라대왕의 말을 듣고 있던 용무련의 표정이 구겨졌다. 자신의 죽음이 그 자들과 관련이 있다니……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용무련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다시금 입을 열었다.
“혹시 나를 배신한 헌원기의 뒤에 지금 대왕이 말한 그들이 있었다는 소리요?”
“그래. 놈들은 이제 숨어 사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세상을 바꾸려 들고 있다. 그래서 시작한 첫 번째 일이 바로 마교 교주 생사도 용무련, 바로 너를 죽이는 일이었지.”
마교의 교주를 자신들의 수족으로 바꾸었으니, 이제 수많은 일들이 벌어질 것이다. 무림도 황실도 점점 변해 갈 것이고 급기야는 그들이 하계의 지배자가 되어 버릴 게 자명했다.
그걸 막아야 했다.
염라대왕이 용무련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어때? 하계에 내려가 이 일을 할 생각이 있느냐?”
“물론이오.”
용무련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자신을 배신한 마교의 배신자들을 깡그리 도륙해 줄 기회인데 어찌 마다하겠는가.
오히려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다. 당장에라도 부활하기만 한다면 놈들을 찾아가 끝장을 내놓고야 말리라.
전의를 불태우던 용무련은 이내 현실적인 문제로 돌아와 염라대왕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놈들이 나보다 강하다 하지 않았소?”
“전부는 아니겠지만 개중 일부는 지금의 너로서는 상대할 수 없을 게야.”
“그럼 나보고 어찌 그들을 죽이라는 거요? 저들이라도 빌려 줄 생각이오?”
용무련은 양옆에 도열해 있는 사천왕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염라대왕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애초에 저들이 지상으로 가는 게 가능했다면 인간인 너의 손까지 빌리지 않았겠지.”
사천왕의 요력(妖力)은 신장(神將) 급이다.
하계로 통하는 통로 자체가 일정 이상의 요력을 지닌 자들은 통과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 구조다.
중급 신 이상은 그곳을 통과할 수가 없다. 그랬기에 굳이 인간인 용무련에게 이 같은 도움을 청하는 것이다.
물론 그런 그들도 하계로 갈 수 있는 방법이 딱 하나 있긴 하지만…… 그것은 여러 가지로 제약과 걸리는 것들이 있기에 이 일을 해결하는 데 직접적으로 사용할 수 없었다.
염라대왕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너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세 가지다. 첫째는 새로운 무공이다.”
단순한 무공이 아니다.
무림의 무공이 내공을 쌓는다면 염라대왕이 줄 것은 요력이 쌓인다. 평범한 것이 아님은 당연하다.
“두 번째는 바로 새로운 신체다. 뭐, 네 몸은 이미 갈가리 찢겨져 버리기도 했고…… 새로 익힐 무공이 예전 네 몸으로 버텨 낼 수도 없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말을 쏟아 내던 염라대왕이 잠시 말꼬리를 흐리다 이내 결심한 듯이 입을 열었다.
“천왕문(天王門)을 열 권한을 주지.”
“대왕님!”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경청하던 용무련이 깜짝 놀랄 정도의 고함 소리였다. 사천왕들이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모두 무릎을 꿇었다.
다문천왕이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천왕문을 열게 해 주다니요! 어찌 한낱 인간에게 그 같은…….”
“재고하여 주시지요, 대왕!”
광목천왕 또한 다문천왕의 말에 힘을 보탰다.
사천왕이 모두 놀라 펄쩍 뛰었지만 정작 당사자인 용무련은 태연하게 말했다.
“그게 뭔데 이리들 난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