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적월의 목소리가 흘러 나가자 문이 벌컥 열렸다.
그러고는 쌍심지를 돋운 채로 여인 한 명이 적월을 향해 말했다.
“일각만 늦었으면 혼을 내 주려고 했는데…….”
매섭게 말을 하던 여인은 이내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적월을 바라봤다.
이 여인이 바로 적월을 낳아 준 어머니였다.
이름은 홍초희(洪草嬉)고 지금은 불혹의 나이가 훨씬 넘었지만, 그래도 젊었을 때는 이름깨나 날렸을 것 같은 미모를 지녔다.
그리고 그런 홍초희의 뒤편에 있는 중년의 사내.
“이 녀석! 매일 그리 어딜 싸돌아다니는 거냐? 그래서 어디 뛰어난 학자가 될 수 있겠느냐?”
짐짓 고함은 치지만 그거와 반대로 항상 웃고 있는 그는 다름 아닌 적월의 아버지인 적사문(赤史文)이었다.
그리고 둘은 누가 봐도 알 정도로 적월을 끔찍이 아끼고 사랑했다. 하지만 그것이 적월은 못내 어색했다.
비록 몸은 어린아이지만 그 속에 있는 건 큰 성인이다. 그리고 예전 삶을 살며 그가 느꼈던 부모라는 존재는 결코 이렇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부모의 얼굴조차 잘 기억나지 않는다.
지독한 동굴에 처박아 놓고 일 년에 한 번 얼굴을 비출까 말까였다. 그리고 그 성취가 맘에 들지 않으면 채찍질을 당하기도 했다.
처음엔 그런 부모들이 무척이나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러한 감정은 점점 사라져 갔다. 강해지기 위해 그러한 삶은 당연하다 생각하게 됐으니까.
친부모들이 정파와의 싸움에서 죽었다고 했을 때, 그때도 적월은 울지 않았다.
슬프지도 않았다.
하지만 복수는 해 주리라, 그리 생각했었다.
그리고 약속한 대로 복수를 끝낸 그 이후부터 적월의 머리에 부모라는 존재는 싹 잊어졌다. 자신을 낳아 준 보답은 이거면 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한데…….
“우리 아드님, 오늘은 뭐 했어?”
옆에 찰싹 달라붙어 살갑게 말하는 홍초희는 예전에 자신이 느꼈던 부모라는 존재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 충분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고민하는 적월을 향해 짐짓 심각한 얼굴로 홍초희가 말했다.
“설마 친구들 또 때리고 그런 건 아니지?”
“내가 애예요?”
자신도 모르게 적월이 버럭 소리쳤다.
두어 달 전 마을에서 세 살 많은 동네 형을 때려눕힌 것을 가지고 두고두고 장난치는 것이다.
별것도 아닌 장난에 흥분한 것이 부끄러웠는지 적월의 얼굴이 살짝 붉어지고 있을 때였다. 식탁에 앉은 적사문이 절대 안 된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 아들이 동네 대장이 됐다는 말도 있던데 걱정이네. 너는 이 아비를 닮아서 주먹 말고 머리로 성공해야 한다니까?”
“아, 정말…….”
적월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조그마한 놀림거리만 생겨도 이토록 장난을 거는 두 사람. 하지만 그들이 왜 그러는지 적월은 잘 알고 있다.
애교 한 번 부린 적 없고, 딱히 속을 썩이지도 않았다. 아마도 부모 입장에서 감정 표현 없는 자신이 안쓰럽고 걱정이 되는 게 분명했다. 그랬기에 더 이토록 장난도 치고 말도 걸고 있다는 걸 적월은 너무나 잘 알았다.
아주 어릴 적 적월이 꿈꾸던 그런 부모란 바로 이런 것이었을 게다.
좋은 사람들이다. 정말로 아주 많이 좋은 사람들이다.
알지만…… 애교는 죽어도 무리다.
“밥이나 먹죠.”
적월은 푸짐하게 차려 놓은 생일상 앞에 털썩 주저앉으며 그렇게 말했다.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적월은 침상에 푹 하고 쓰러졌다. 잘 깔아 놓은 이불에 몸을 맡긴 적월은 커다랗게 부른 배를 어루만졌다.
생일이라는 이유로 장작 한 시진 내내 꾸역꾸역 먹어야만 했다.
홍초희의 요리 실력이 제법이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토록 많은 음식을 먹인단 말인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월이 그 음식들을 최대한 먹어 주는 시늉이라도 하는 건 이유가 있다.
아주 어렸을 적에 내공과 요력을 몸에 담는 과정에서 크게 앓았던 적이 있었다.
막상 본인은 자신이 왜 아픈지 알기에 태연했지만, 부모들은 아니었다. 마을의 의원은 물론이거니와 근처 큰 마을까지 나가 갖가지 약재들과 의원들을 데리고 왔다.
물론 내공과 요력이 천천히 몸에 적응되며 씻은 듯이 나았지만 그 이후부터 홍초희는 적월이 건강할 수 있게 식사에 많은 신경을 쓰곤 했다.
더군다나 오늘은 생일, 평소에도 많았던 양이 그 배는 되어 버렸다.
잠시 침상에 누웠던 적월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밤이 찾아왔지만 아직 적월의 하루는 제법 많이 남아 있었다. 포식으로 인해 몸이 무거웠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내공과 요력을 모아야만 했다.
낮 시간엔 내공심법에 비중을 둔다면 저녁은 요력을 쌓는다. 아무래도 요력이라는 것 자체가 밤에 더 그 기운이 강하고 모으기가 쉬운 탓이다.
우선은 간단하게 씻고 요력을 모으기로 마음먹은 적월은 웃옷을 벗었다. 그러자 딱 보기 좋을 정도의 근육이 잡힌 새하얀 몸이 드러났다.
사내라고 믿어지기 힘든 백옥 같은 피부.
물론 그것은 몸뿐만이 아니다.
여인이라고까지 하기는 그렇지만 남자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곱상한 얼굴. 잠시 동경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 보던 적월은 혀를 찼다.
“쳇.”
마교 교주 용무련이었을 때의 그는 사내다운 외모를 지녔었다. 우락부락까지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험상궂고 선이 굵었다. 한데 지금의 몸은 완전히 그 반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경을 엎어 버리며 방을 나가려던 적월은 무엇인가 묘한 느낌을 받았다.
어깨였다.
마치 조그만 벌레가 기어 다니는 느낌이다.
황급히 어깨를 손으로 털었지만 아무런 것도 손에 닿지 않는다.
그 순간, 조그마한 불 하나만이 타오르던 방 안에 적색 빛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어어?”
뭔가 하고 놀라던 적월은 이내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붉은빛은 적월의 오른쪽 어깨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윽!”
동시에 갑자기 찾아온 고통은 이내 온몸을 바늘로 찔리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만들었다.
하지만 참지 못할 정도의 고통은 아니었기에 적월은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몸을 바라봤다.
붉은색 선이 오른쪽 어깨를 시작으로 해서 팔꿈치 살짝 아래까지 이어지더니 이내 멈추었다. 그리고 그 붉은색 선은 아주 잠시 동안 그렇게 불타듯이 빛나다가 이내 잦아들었다.
밝은 빛은 사라졌지만 어깨부터 시작해서 팔꿈치까지 생겨 버린 붉은 문신은 사라지지 않았다.
놀란 얼굴로 오른쪽 어깨부터 생겨 버린 문신을 바라보고 있던 적월은 창문가에서 들려온 조그마한 소리에 황급히 몸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누구냐?”
창문을 타고 넘어온 조그마한 무엇인가가 천천히 적월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이내 그 얼굴이 드러났다.
어린 적월의 반도 안 되는 크기. 얼굴은 도깨비와 닮았고 머리에는 조그마한 뿔까지 달려 있다.
하급 요마였다.
모습을 드러낸 하급 요마가 적월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존경 어린 어투로 말했다.
“지옥왕을 뵈옵니다.”
지상과 지옥을 이어 주는 통로를 넘나들 수 있을 만큼 요력이 약한 요마다. 당연히 그런 그에게 지옥왕인 적월은 마주 보기조차 힘들 정도로 고귀한 존재였다.
자신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요마를 보며 적월은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토록 기다리던 지옥에서의 연락이 온 것이다.
그리고 오른쪽 팔이 붉게 빛나기 시작한 것과 동시에 연락이 온 것은 분명 우연이 아닐 게다.
의자에 앉은 채로 적월이 물었다.
“할 말이 많은데…… 그냥 너한테 물으라는 거냐?”
하대가 자연스레 흘러 나왔다. 물론 지옥왕이라는 위치에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적월은 원래부터 마교의 지존으로 군림했던 자다. 비록 이곳 아산촌에서 조용히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성정까지 죽은 것은 아니다.
적월의 질문에 요마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어찌 이런 중대한 일에 대해 말씀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저 대왕님의 눈과 귀, 그리고 입이 되어 줄 뿐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적월이 되물었다.
그러자 자리에서 일어난 요마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금 눈을 뜨는 그 순간, 요마의 눈동자가 아까와는 다르게 변해 있었다.
요마가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구나.”
“……!”
변해 버린 눈동자, 그리고 말투에서 적월은 단숨에 상황을 알아차렸다. 또 방금 전 요마가 했었던 말도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염라대왕이오?”
“그래.”
고개를 끄덕이는 요마를 보며 적월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어린아이의 신체로 태어나게 한 것과 여태까지 쌓였던 여러 가지 불만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적월의 불만스러운 표정을 보고 그 속내를 알아차린 염라대왕이 요마의 입을 통해 자신의 말을 전했다.
“불만이 많은 모양이로구나.”
“당연하지!”
자신도 모르게 큰 목소리를 냈던 적월은 이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혹시나 자신의 목소리 때문에 집 안에 있는 다른 이들이 이곳으로 찾아올까 염려가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히 주변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적월이 말을 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오? 그놈들을 잡아 죽이라고 할 때는 언제고 어린아이의 몸으로 태어나게 하다니…… 급한 일 아니었소?”
“그걸 알고 있다면 설명하기 쉽겠군. 빠를수록 좋은 일이거늘 내가 왜 갓난아이로 태어나게 했을까?”
“그거야…….”
적월을 향해 염라대왕이 말했다.
“신체가 필요했다. 그것도 인간의 수준을 벗어난 뛰어난 신체. 그리고 요력을 쌓기 위해서는 갓난아이의 신체만 한 것이 없거든.”
“좋소, 그건 그렇다 칩시다. 한데 대체 왜 지금 내 몸에 쌓인 내공과 요력을 쓸 수 없는 거요?”
“아직 그릇이 완성되지 않았으니까.”
“그릇?”
“그래. 아직 네 몸은 요력을 버텨 내기엔 너무 어려. 그리고 그 요력 자체가 내공보다 강한 힘이기에 내공을 내리누르고 있는 게지.”
“그럼 언제쯤 이 힘을 쓸 수 있소? 그리고 그 천왕문인가 뭔가 하는 건 어떻게 열라는 거요?”
“오늘 네 몸에 문신 하나가 생겼을 게야. 그치?”
적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직전에 생긴 그 문신을 말하는 게 분명했다.
염라대왕이 말을 이어 나갔다.
“정확하게 오 년 후 바로 이날 그 문신이 다시금 빛을 발할 게야. 그때부터 너는 천왕문을 열 수 있는 힘이 생길 것이고. 네가 열고자 하면 네 몸에 새겨진 문신이 빛을 발하며 곧 그 의지가 천왕문을 열 힘이 되어 줄 것이야. 그리고 요력과 무공은…… 지금 성취가 나쁘지 않은 편이니 스무 살 전후로 해서 되찾을 수 있을 것 같군.”
“스무 살? 그렇게나 오래 걸린다고?”
아직도 칠 년이나 남았다는 소리에 적월은 펄쩍 뛰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딘가 문제가 있는 몸은 아니었지만, 무공을 사용하지 못하니 근질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더군다나 극강의 경지에 올랐었던 적월로서는 지금이 만족스러울 리가 없다. 더군다나 적월은 지상에 내려오면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자기의 머리를 마구 쥐어뜯던 적월이 고개를 치켜들고 물었다.
“혹시 내공이라도 쓸 수 있는 방법 없소?”
“그건 왜 묻나?”
“뭐, 쓸데가 좀 있어서…….”
“허허, 너를 배신했던 놈들을 찾아가려고?”
정확하게 집었는지 적월은 입을 닫았다.
그러자 염라대왕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없어. 그리고 설령 있다고 해도…… 네 모습을 그들에게 노출시켜서도 안 되고 말이야. 조급해해 봤자 변하는 게 없다는 걸 알아 뒀으면 좋겠군. 최대한 조용히 살며 요력과 내공을 더 충실히 다져 놓도록 해라.”
“…….”
잠시 침묵하던 적월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소.”
“물어봐.”
“솔직히 말해 난 당신들이 시킨 일에 크게 관심이 없소. 다만 그들이 날 죽게 한 헌원기를 뒤에서 조종했다고 하니 묻는 것이오만, 내가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거요?”
환생을 한 이후에 무공을 쓰지 못하는 것이 무척이나 답답했다. 하지만 그러한 모든 것보다 가장 걱정이 되었던 것은 바로 흘러가는 시간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있다.
그동안 죽어야 했지만 죽지 않은 그들의 힘은 더더욱 강해지지 않겠는가. 혹시나 그들로 인해 헌원기의 힘이 더욱 강해져 복수를 할 수 없게 되는 것이 아닐지 그것이 못내 걱정스러웠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