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현판에 적힌 글씨를 보는 순간 뭔가 낯이 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내 마차에 적혀 있던 글씨가 떠올랐다.
아비인 적사문이 적은 것이 분명했다.
‘역시 필체 하나는 끝내주는군. 나중에 내가 다시금 마교로 돌아가면 그때 하나 부탁하고 싶을 정도야.’
마교로 돌아가는 상상을 하며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던 적월이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다시금 고개를 치켜들었다.
현판에 적힌 이름이 어딘지 모르게 낯익다.
‘화룡검문…… 화룡검문……?’
동시에 머릿속에 한 명의 사내가 스치고 지나간다.
제왕검(帝王劍)……!
황궁(皇宮) 대장군부(大將軍部) 소속의 무인.
황궁에서 활약하며 단 한 번도 무림에 모습을 비추지 않은 자,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림에서조차 인정받을 정도의 인물이다.
아주 오래전 황제는 자신을 지키는 세 개의 방패가 있다고 말했다.
그 첫째가 그 모든 것을 막아 낸다는 태황의(太皇衣)요, 둘째가 군사인 주천영(朱天永)이다. 그리고 마지막이 바로 호위무사 제왕검이다.
그 제왕검이라는 자가 이십여 년 전 황궁을 떠나 만든 문파.
그 문파의 이름이 바로 화룡검문이었다.
적월이 당혹감을 지우기도 전에 적사문이 화룡검문의 입구로 다가가 서찰 한 장을 그들에게 건넸다. 그러자 문을 지키던 두 명의 무인이 바로 깍듯이 예를 취하며 물러섰다.
그 장면에서 적월은 다시 한 번 놀라 버렸다.
화룡검문은 바깥과 교류하는 그런 문파가 아니다. 폐쇄적인 문파인 그들은 외부에서 손님을 받지 않기로 유명하다.
한데 대체 어떠한 연유로 이들이 이처럼 쉽사리 문을 연단 말인가.
물론 십삼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 정도의 시간이 지났으니 화룡검문이 변했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적월은 절대 아닐 거라는 걸 파악해 냈다.
저녁 식사를 할 법한 시간이거늘 그 누구도 이곳 화룡검문 주변을 얼씬거리지 않는다. 원래 이토록 큰 문파라면 주변에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것이 당연했다.
더군다나 저녁 시간이라면 말해 무엇 하겠는가.
분명 화룡검문은 예전과 크게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적월의 아버지인 적사문이 이곳 화룡검문과 무엇인가 인연이 있는 게 분명했다.
열린 문을 통해 성큼 안으로 들어선 적월은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화룡검문은 겉에서 봤을 때 느꼈던 것처럼 무척이나 컸다. 더군다나 무엇인가 무겁게 내려앉은 분위기가 이곳의 절도를 느끼게 해 줬다.
예(禮)와 법도(法度)를 중시하는 문파, 화룡검문이 바로 그러한 문파였다.
적사문은 이곳이 익숙한지 홍초희와 나란히 선 채로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대체 누구를 만나려고 하는 거지?’
단 한 장의 종이로 화룡검문을 출입할 수 있게 할 정도인 걸 보아 보통 인물은 아닐 게다. 아산촌에 사는 조그마한 부자일 뿐이라 생각했던 적사문이 달리 보이는 순간이었다.
누구를 만나러 가는 걸까 하는 궁금증은 얼마 가지 않아 풀렸다.
저 멀리서 풍채 당당한 중년의 사내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옷자락이 휘날릴 정도로 다급하게 달려오는 사내를 보는 순간 적월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비록 요력 때문에 내공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무공을 펼칠 수는 없지만, 전신의 감각은 예리하게 변해 있다. 한눈에 상대가 엄청난 고수라는 걸 알아차렸다.
한 걸음에 그 먼 거리를 단숨에 좁히고 들어온 중년의 사내가 두 손을 와락 펼쳤다.
텁석.
큰 소리와 함께 적사문을 부둥켜안은 중년 사내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중년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못된 놈, 대체 이게 얼마 만이야! 십오 년 만이냐?”
“켁켁, 숨 막히니 이것 좀 놓고 말하게나.”
“엄살은!”
중년의 사내의 솥뚜껑만 한 손이 적사문의 등짝을 후려쳤다.
등짝을 강하게 맞은 적사문이 표정을 잔뜩 구기며 말했다.
“그놈의 무식한 주먹은 여전하구만.”
“허허! 네놈의 세 치 혀도…… 그나저나 제수씨,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이에요, 오라버니.”
홍초희는 반갑게 웃으며 거구의 사내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은 적월 빼고는 모두 구면인 모양이었다. 그때 홍초희와 인사를 나눴던 사내의 시선이 적월에게로 향했다.
자신도 모르게 눈이 마주하는 순간 투지가 인다.
‘재미있군.’
당장이라도 한 수 겨루고 싶은 욕심이 일 정도의 자다. 하지만 지금의 적월은 무공을 사용할 수 없다. 동네 파락호나 일정 수준 이하의 무인이라면 어찌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 정도의 고수에게는 적수가 될 수 없다.
대체 화룡검문에서 이토록 자신의 투지를 불타게 할 자가 누구란 말인가.
선뜻 떠오르는 건 역시나 제왕검.
하지만 제왕검과 자신의 아버지인 적사문이 이토록 반말로 대화를 나눌 정도로 친분이 있다?
자신을 노려보는 적월을 보며 사내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허허, 이 아이가 네 아들이냐? 잘생겼는데?”
“젊을 때의 날 쏙 빼닮은 걸 보면 모르겠는가?”
“무슨 소리야. 얼굴은 너보단 나였지, 하하!”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중년의 사내가 적월을 향해 입을 열었다.
“반갑구나. 이 아저씨의 이름은 설리표(雪利飇)라 한다. 네 아비의 오랜 지기지.”
“……적월이라고 합니다.”
설리표의 이름을 듣는 순간 상대가 누구인지 완전히 알아 버렸다.
화룡검문의 문주, 제왕검 설리표.
그의 이름을 어찌 모를 수 있단 말인가.
알지만 적월은 그러한 사실을 감춰야만 했다. 이들 앞에 있는 건 마교 교주 용무련이 아닌 적사문의 아들 적월이니까.
단지 적사문과 이 정도의 친분을 나누고 있었단 게 놀라울 뿐이었다.
설리표는 자신의 눈을 피하지 않고 또렷이 바라보는 적월이 마음에 들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라고 할지라도 인간인 이상 설리표의 기운엔 많은 이들이 위축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아이는 아니다. 자신을 향한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괜히 사문이의 아들이 아니군.’
당차고 물러설 줄 모르는 것이 어릴 때의 적사문을 쏙 빼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리표는 적월에게서 눈을 떼고 다시금 오랜 지기인 적사문의 어깨에 손을 걸쳤다. 평소 근엄하고 딱딱하기로 소문난 설리표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마음을 여는 사람.
그게 바로 적사문이다.
“어서 가자고. 묻고 싶은 말들이 많으니까.”
“자네는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그 넘치는 힘을 감당 못 하는구먼.”
“하하! 나 설리표에게 힘을 빼면 뭐가 남겠냐.”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앞에서 걷는 두 명의 모습은 무척이나 친해 보였다.
십오 년 만에 만난 어색함이 둘 사이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뒤따라 홍초희와 함께 걷던 적월이 조그마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 두 분 오래전부터 친구십니까?”
“물론이지. 하늘 아래 둘도 없는 친구라고 해야 할까? 이 어미가 예전에 질투를 할 정도였단다, 풋.”
홍초희는 말을 하면서 자신도 우스운지 살짝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을 보며 적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어울리지 않거늘 두 사람은 정말로 가까운 지기였던 모양이다.
그렇게 네 명은 약 반 각가량을 걸어서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미리 준비해 둔 저녁 식사가 상 위에 가득했다.
먼저 자리에 앉은 설리표가 다른 이들에게 자리에 앉기를 권했다.
“어서들 앉아서 식사들 하자고.”
“잠깐, 그보다 약속한 것이 있지 않은가.”
“아아! 곧 온다고 했는데…….”
퍼뜩 생각난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설리표를 보며 홍초희가 옆에 앉아 있는 적월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고는 적월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대고 속삭였다.
“아버지가 생일 선물을 주시려나 보구나.”
“그렇군요.”
솔직히 선물을 준다는 말에 시큰둥했다. 아산촌을 벗어나 멀리 있는 이곳 공화까지 왔을 때까지만 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흥미가 생긴 것이 사실이다.
이곳 화룡검문에 와 제왕검 설리표까지 개입해서 주는 선물이라니, 대체 그럴 만한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기대도 기대지만 뭘 준비했든지 적월은 최대한 기뻐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항상 자신을 걱정해 주는 둘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억지로 웃으며 적월이 말했다.
“선물이 무엇인지 기대가 되네요.”
“아! 마침 오는군!”
문 쪽으로 가서 서성이던 설리표가 화색을 띠며 말했다. 그러고는 바깥으로 손짓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이리로 오거라.”
적월은 문 쪽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대체 이들이 그토록 합심해서 준비한 선물이 무엇인지 보기 위해 말이다.
그때 설리표의 등 뒤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스르륵.
옷자락이 흔들리는 소리가 귓가를 간질인다.
하얀 옷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소녀.
흑단 같은 머리는 곱게 정리되어 있고, 새하얀 피부는 흡사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보는 것만 같다. 그러면서도 입가에 살짝 걸린, 사람을 편안하게 해 줄 법한 옅은 미소가 가히 압권이다.
나이는 적월보다 약간 많아 보였고 이제 갓 봉우리가 피어오르기 시작한 아름다운 소녀였다.
하지만 그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소녀가 되면서 피기 시작한 이 아름다움이 몇 년 안에는 천하에서 꼽힐 정도로 만개할 것이라고.
한데 그 아름다운 소녀의 손에는 아무런 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적월이 두리번거리다가 물었다.
“선물이 뭡니까?”
“눈앞에 있지 않느냐?”
“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되묻는 적월을 향해 적사문이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보이지 않느냐? 내 눈엔 잘 보이는데 말이야. 아주 어여쁜 숙녀 한 분이.”
“설마…….”
“인사하려무나. 네 약혼녀다.”
“뭐, 뭐라고요?”
그 어떠한 선물에도 기뻐해 주리라 마음먹었던 적월의 각오가 깨졌다.
소녀가 미소를 머금은 채로 입을 열었다.
“처음 뵙겠어요. 설화(雪花)라고 합니다.”
설화라고 자신을 밝힌 그녀의 인사가 끝나자 옆에 서 있던 설리표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어떤가? 내 딸아이 많이 크지 않았는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 아예 갓난아이였는데 정말 몰라보게도 컸구나.”
적사문이 설화를 바라보며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설화의 나이는 방년 십육 세. 적월보다는 오히려 세 살 연상의 여인이었다. 설리표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적월을 보며 짐짓 기분 나쁘다는 투로 말했다.
“그런데 월이 너는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아 보이는구나?”
“……너무 갑작스러워서요.”
적월은 생각지도 못한 선물이 당황스러워 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대신해서 식탁 위에 있는 물을 연거푸 들이켰다.
분명 아름다운 여인이다.
소녀의 티를 벗고 점점 여인이 되어 가는 그녀는 적월이 보기에도 분명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적월에게는 그럴 시간이 없었다.
혼인을 하고, 한 곳에 정착하고…….
그런 평범하고 안락한 인생은 아쉽게도 적월에게는 주어지지 않은 삶이다. 지금에야 요력과 내공을 되찾을 때까지 적사문과 홍초희에게 의탁하고 있을 뿐 결국 자신은 떠나야 할 몸이 아니던가.
그런 자신이 또 다른 연을 만든다는 것이 적월은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당장 면전에서 싫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
어차피 훗날 자신이 사라지면 이 모든 이야기는 없던 것으로 돌아갈 게 분명했다. 그때까지만 참으면 그만이리라.
적월이 애써 웃음을 지어 보이자 그제야 설화가 자리에 앉았다.
다섯 명 모두가 둥글게 둘러앉자 설리표가 다시금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허허! 이제 진짜로 식사들 하자고. 네가 온다 해서 특별히 준비 많이 했다. 어떠냐? 고맙지?”
장난스러운 설리표의 행동에 적사문은 씩 웃었다.
고마울 뿐이다.
십오 년이 넘는 긴 시간 만에 찾아온 자신이다. 그럼에도 설리표는 자신에게 서운한 기색 하나 없이 살갑게 대해 준다.
예전부터 이런 사내였고, 앞으로도 이런 사내일 게다.
그랬기에 적사문 또한 진정으로 이 사내만큼은 지기로 여길 수 있는 것이었고 말이다.
그렇게 즐거운 분위기에서 식사가 시작됐다.
준비된 산해진미는 모두의 입을 즐겁게 하기 충분했다.
단 한 명, 적월을 제하고는 말이다.
맛있는 음식들을 앞에 두고도 적월은 끼적거렸다. 가뜩이나 술 생각이 간절했거늘, 갑작스러운 약혼녀의 등장이니 해서 머리가 더 복잡하다. 머리는 온통 술 생각으로 가득 차 버렸다.
대충 이 자리를 파하고 몰래 바깥으로 빠져나가고 싶은데 상황이 그리될 것 같지 않다.
적월이 작은 한숨을 푹 내쉬었을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