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정말이지 자기 애비를 빼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벌써부터 권력을 등에 업고 으스대는 꼴이 우습기까지 했다.
당장에 죽을 정도로 두드려 패 주고 싶었지만 적월은 꾹 참았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현감 아들인 엄대웅을 두드려 팰 수는 없다. 그건 적어도 적월 자신을 돌봐 주는 두 명의 가족에게 피해가 갈 일이니까 말이다.
적월은 주먹으로 엄대웅의 어깨를 팍 치면서 말했다.
“볼일 없으면 가라. 너랑 놀아 줄 정도로 한가하지 않으니까.”
말을 마친 적월이 다시금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바구니를 덮고 있던 천을 치웠다. 천을 치우자 안에는 감춰져 있던 곶감이 모습을 드러냈다.
적월은 곶감 하나를 들고 말없이 씹어 먹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엄대웅은 자신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생각해 보니 눈을 뜨자마자 적월을 잡겠다고 뛰쳐나오는 바람에 아침 식사조차 하지 못했다.
방금 전까지 별 생각이 없었는데 먹는 걸 보니 갑자기 뱃속에서 아귀들이 아우성이다.
더군다나 군것질이라면 환장을 하는 엄대웅이다.
엄대웅은 스리슬쩍 바구니의 건너편에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적월의 눈치를 슬슬 보면서 몰래 곶감을 꺼내어 먹었다.
적월은 아무런 것도 모른다는 듯이 앞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생각했는지 엄대웅은 연신 곶감을 집어먹었다. 그렇게 엄대웅이 곶감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 적월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가 사라졌다.
두 가지의 것 중 하나는 이미 먹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복숭아씨 가루다.
바로 해코지를 하려 했다면 이 곶감에 두 가지 모두를 묻혀 놨을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단번에 적월 자신이 범인이라는 것이 밝혀지게 된다.
그래서 준비한 것이 있다.
적월은 소매 속에 든 조그마한 나무로 된 통을 어루만졌다. 집을 나설 때만 해도 그 통 안에는 복숭아씨 가루가 가득했다. 하지만 지금 이 통 안에는 다른 종류의 향신료만이 존재했다.
이곳 공터로 오기 전에 이미 바꿔치기한 것이다.
적월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야 할 일은 끝났다.
더는 이곳에서 엄대웅과 같이 있을 필요는 없었다. 이제 뒷일은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진행될 것이다.
공화를 다녀오고, 오늘만 해도 아산을 돌아다니느라 며칠 동안 제대로 무공을 익히지 못했다. 이제 집에 돌아가 천천히 내공심법을 운기할 생각이었다.
적월은 뒤에서 뭐라고 중얼거리는 엄대웅을 무시한 채로 집을 향해 걸었다. 뒤돌아 걸어가는 적월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사달이 벌어졌다.
오후 늦게 즈음이 돼서야 돌아온 엄대웅이 저녁밥을 먹다가 입에 게거품을 문 것이다.
처음엔 뭔가가 목에 걸렸거니 했지만 아니었다.
엄대웅은 입에 게거품을 문 채로 배를 잡고 뒹굴뒹굴 굴렀다. 찢어질 듯한 비명 소리를 들은 엄등은 그제야 상황의 심각함을 짐작했다.
당장에 아산촌의 유일한 의원인 문보생(文寶生)이라는 자를 불렀다. 연락을 받은 문보생이 허겁지겁 관부의 문을 넘었다.
문보생은 이미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다. 그런 그가 관원들의 안내를 받아 엄대웅의 방에 들어섰다. 이미 방 안에는 걱정스러운지 왔다 갔다 하고 있던 엄등이 있었다. 문보생의 등장에 엄등이 화색을 띠며 말했다.
“어서 아들의 상태를 보거라!”
“예, 현감 나리.”
문보생 또한 이 마을의 주민이다. 현감인 엄등에게 억한 감정이 있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감정 같은 건 뒤로 밀어야 했다.
당장에 자리를 잡은 문보생은 이미 혼절한 채로 식은땀만 줄줄 흘리는 엄대웅을 바라봤다.
우선은 맥을 짚은 문보생의 안색이 변했다.
맥이 정상이 아니다.
문보생의 표정이 좋지 않은 걸 본 엄등이 재촉하듯이 말했다.
“왜 그러느냐? 설마 뭐 심각한 상황인 것이냐?”
“그것이…….”
사방으로 날뛰는 맥, 그리고 온몸에 나기 시작한 반점들. 잠시 머뭇거리던 문보생이 입을 열었다.
“독입니다.”
“도, 독이라고?”
놀란 엄등이 되묻자 문보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엄등으로서는 생각도 못 한 대답이었다. 그러했기에 잠시 멍하니 서 있던 엄등은 이내 소리쳤다.
“그럼 당장 치료해라! 왜 그리 멍하니 손 놓고 있는 것이냐?”
“나, 나리, 저는 치료할 수 없습니다.”
“치료할 수 없다고? 이놈이 지금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냐. 당장 네놈의 혓바닥을 뽑아서 걸어 줘야 그 요망한 입을 바르게 놀릴 테냐!”
멱살을 부둥켜 잡고 말하는 현감의 위세에 문보생은 겁을 집어먹었다.
이곳 아산촌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 엄등이라는 작자는 아랫사람들의 목숨은 파리처럼 여기는 자다. 문보생 자신을 죽이는 일 같은 걸로는 눈 하나 깜짝 안 할 게 틀림없었다.
문보생이 다급히 싹싹 빌며 말했다.
“무슨 독인지 모릅니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몰라?”
문보생을 확 집어던진 엄등은 발로 그를 마구 짓밟기 시작했다. 거구의 덩치의 엄등에게 노인인 문보생이 입술이 다 터지도록 짓밟혔다.
금방 지친 엄등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헉헉, 이놈. 고쳐 내지 못한다면 당장 네놈을 죽여 버리겠다.”
“하, 하오나 정말로 저는…….”
“그래도 이놈이!”
엄등은 벽에 걸려 있는 장도(長刀)를 뽑아 들었다.
차앙!
단 한 번도 검을 제대로 휘둘러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이 정도 노인쯤이야 단칼에 베어 버릴 수 있다. 그리고 문보생 또한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덜덜 떠는 문보생을 향해 엄등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기 시작했다. 문보생의 몸이 사시나무 떨듯이 떨렸다.
하지만 문보생은 정말로 엄대웅을 치료할 방법을 알지 못했다.
성큼 다가온 엄등이 검을 치켜 든 바로 그때였다.
문보생의 머릿속에 하나의 희망이 스치듯 지나갔다.
“나, 나리! 방법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높게 들렸던 검이 멈췄다.
엄등이 검을 내려트리고는 물었다.
“있을지도 모른다니?”
“하, 한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라면 이 독에 대해서 아실지도 모릅니다.”
이 독에 대해 아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말에 엄등이 얼굴에 화색을 띠며 물었다.
“그게 누구냐?”
문보생이 대답했다.
“……적사문 대인이십니다.”
문보생의 입에서 적사문이라는 이름이 떨어지자 엄등이 순간 표정을 구겼다. 다른 이도 아닌 적사문이라니…… 이 조그마한 마을에서 유일하게 좌지우지하기 애매한 자가 바로 그 아니던가.
정체는 잘은 모르겠지만 제법 학식도 있어 보이고 행동거지가 무엇인가 자신감이 넘친다.
혹여나 뒤에 누가 있을까 아직 눈치를 살피는 단계이긴 하지만 결코 같은 곳을 보며 살아갈 자가 아니라는 건 분명하다.
이 독에 대해 알지도 모르는 이가 적사문이라 하자 엄등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정녕 그자밖에 없느냐?”
“소, 송구합니다만 독에 한해서는 의원인 저보다도 그분께서 더 많은 지식을 지니고 계십니다.”
“끄응!”
엄등은 앓는 소리를 토해 냈다.
하지만 지금 아쉬운 건 적사문이 아닌 자신이었다.
엄등이 이를 꽉 깨물고 바깥을 향해 소리쳤다.
“당장 가서 적 대인인가 뭔가 하는 그자를 데리고 오거라!”
“예!”
바깥에서 대기하던 관원 하나가 빠르게 뛰쳐나갔고, 엄등은 그 자리에 서서 엄대웅을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고통을 참지 못하고 혼절을 했다.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 헐떡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분노가 치민다.
그리고 그 분노가 서서히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독이라 했다.
아들인 엄대웅이 독에 당했다. 그리고 엄대웅은 밥을 먹다가 갑작스럽게 발작을 일으켰다. 그 말뜻이 무엇이겠는가. 밥에 독이 들어 있던 게다.
아마도 노역에 불만을 품은 마을 주민들이 그 같은 일을 벌였을 거라 엄등은 확신했다.
“감히……!”
참을 생각은 없었다.
당장에 모두 요절을 내 줘야 직성이 풀릴 것만 같았다. 엄등은 방문을 팍 하고 걷어차고 걸어 나왔다.
이미 관부에 남아 있던 마을사람들 모두가 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붉게 충혈된 눈으로 그들을 내려다보며 엄등이 소리쳤다.
“주방에서 일한 게 누구냐!”
“쇠, 쇤네들이옵니다.”
여인 두 명이 나섰다. 그들은 최근 들어 관부에 관련된 이들의 모든 식사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 말을 듣기가 무섭게 아래로 걸어 내려온 엄등의 손이 휘둘러졌다.
짝! 짝!
두 여인의 입술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당장 오라를 준비해라! 감히 나에게 불만을 품고 독을 사용해? 이 요망한 년들의 사지를 찢어 버리고야 말테니……!”
“아이고 나리! 저희는 아닙니다요. 독이라니 그게 무슨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이십니까.”
둘 중 더 나이를 먹은 여인이 황급히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렸지만 엄등은 더럽다는 듯이 발로 밀어냈다.
그리고 그때 엄등의 명을 듣고 다가온 관원들이 두 명의 여인들을 오랏줄에 묶었다. 두 여인은 포박당한 채로 엄등의 앞에 무릎이 꿇렸다.
엄등이 무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마지막 기회를 주마. 네년들이 사용한 독이 무엇이냐?”
“모, 모르옵니다. 독이라니요. 저희는 정말…….”
“끝까지 그리 나오겠다 이거냐?”
엄등의 협박에도 두 여인은 울면서 연신 아니라는 말만 계속했다. 그리고 엄등 또한 무조건 이 여인들이 범인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하나 분명한 것은 자신에게 불만을 품은 놈의 소행이라는 것.
그렇다면 이 마을에 있는 의심 가는 놈들을 모두 죽여 버리면 그만이다. 그렇게 죽이다 보면 언젠가 엄대웅에게 독을 쓴 놈도 걸리지 않겠는가.
지금 엄등에게는 당장에 화를 풀 무엇인가가 필요했고, 그 대상으로 이 두 명의 여인이 걸린 것뿐이다.
엄등이 검을 치켜들었다.
“그냥 네년들이 재수 없었다고 생각해라.”
“제, 제발…….”
여인들이 사색이 된 얼굴로 검을 바라봤고, 주변에 있는 마을사람들마저 얼굴이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그리고 막 엄등이 검을 내려치려고 하는 그 순간.
“뭐 하는 짓이오!”
멈칫.
떨어지려던 검이 멈췄다.
검을 휘두르려던 엄등의 시선이 저절로 고함이 터져 나온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다름 아닌 적사문이 와 있었다.
적사문을 보는 순간 마을 사람들 모두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감돌았다. 그리고 엄등은 그러한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근본도 모르는 지방 유지 하나가 이토록 인정을 받고 있다는 게 맘에 안 들었다. 더군다나 양반이라는 작자가 이토록 천한 놈들과 마치 가족처럼 지내고 있는 꼴이라니…….
하지만 지금 적사문이라는 존재는 엄등에게 마지막 희망이었다. 검을 거둔 엄등이 적사문에게 다가갔다. 엄등은 노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적사문에게 예를 취하며 말했다.
“이거 결례를 보였소.”
“됐소. 오면서 대충 이야기를 들었으니 우선 환자를 먼저 살피겠소.”
마을 사람들에게 검을 치켜들던 모습에 분노가 터졌던 적사문이지만 우선은 환자가 먼저다. 환자를 보고 난 후에 이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해도 될 일이다.
엄등과 함께 적사문은 방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좋지 않은 냄새가 진동을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어찌할 줄 모르고 있던 문보생이 적사문을 보며 반갑게 소리쳤다.
“대인!”
“잠시 제가 환자 좀 보겠습니다.”
문보생에게 인사를 건넨 적사문이 우선 엄대웅의 옆에 주저앉았다. 다급히 맥을 짚어 본 적사문은 이내 엄대웅의 몸 상태를 살폈다.
몸에서 흘러나오는 식은땀에 검붉은 노폐물이 보인다.
‘독이다. 독은 확실한데…….’
무슨 독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적사문이 독에 대해 연구를 하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실제로 독들을 접해 보거나 한 경우는 드물었다.
무림의 사천당문처럼 독을 사용하고 그 해독법에 대해 연구한 것도 아니고, 의선 화타처럼 의술에 능통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적사문은 가만히 엄대웅을 살폈다.
분명 독에 대한 경험이 별로 없다 하지만 적사문은 황제의 총애를 받던 문사다. 그는 무척이나 머리가 비상하고 침착한 사내였다.
‘자의든 타의든 독에 중독된 것은 사실. 하면 우선은 이 마을과 가까운 곳에서 구할 수 있는 독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