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세월이 흐른 만큼 변한 것은 적월뿐만이 아니었다. 적사문과 홍초희 또한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많이 변해 있었다.
하지만 둘 모두 아름답게 늙었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 줄 수 있는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그날 이후 아산촌에는 여러 가지 변화가 있었다.
역시나 가장 큰 일은 현감 엄등에 관한 것이다.
안하무인처럼 마을에서 행패를 부리던 엄등이 그날 이후 조용하게 변했다. 덩달아 무슨 말을 들었는지 엄등의 아들 엄대웅조차 잠잠하다.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
적사문을 우습게 여기던 엄등이지만 화룡검문의 설리표를 등에 업고 있는 인물이다. 그 사실을 아는 순간부터 엄등은 개처럼 깨갱하고 꼬리를 마는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아산촌의 현감인 엄등이 적사문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 현 상태였다.
적사문의 눈치를 보는 엄등이 그때처럼 패악 질을 벌일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식사를 하는 적월을 향해 적사문이 말했다.
“녀석, 또 농땡이냐?”
“농땡이가 아닙니다.”
밥을 먹으며 적월이 대꾸하자 적사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이 손바닥만 한 마을에서 네가 뭐 하고 다니는지도 모를까 봐? 사내놈이 하루 종일 빈둥거린다고 이미 소문이 다 났다, 녀석아.”
적사문의 말에 적월은 딱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인적이 드문 곳에 가서 내공심법을 익히거나, 아니면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겨 있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당연히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기에는 빈둥거리는 것으로 착각할 만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밝힐 수도 없는 노릇이다. 적월은 그냥 입을 닫고 식사에 열중했다.
그때 밥을 먹는 적월을 바라보며 적사문이 말했다.
“이제 곧 나이도 한 살 더 먹는데…… 슬슬 혼인 준비를 해야 되지 않겠느냐?”
“혼인이요?”
적월이 당황하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당황한 적월은 아랑곳하지 않고 적사문이 말을 이어 갔다.
“당연한 걸 가지고 왜 그러느냐? 이제 네 나이가 곧 열여덟이다. 오히려 상대인 설 소저가 널 기다려 준다고 혼기가 늦었는데 슬슬 준비를 해야 할 것 아니냐.”
무림인들은 일반적으로 조금 더 늦게 혼례를 올리곤 한다. 자신의 무공 성취를 위해 많은 시간을 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남녀에게 이 나이는 다소 늦은 편이었다.
더군다나 설리표의 딸인 설화는 스무 살이 넘었다. 어찌 보면 늦었다고 생각을 하는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월은 지금 결혼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적월이 황급히 대답했다.
“아직 전 혼인 생각은 없습니다만…….”
“허허. 왜, 설 소저가 맘에 안 드느냐?”
“뭐,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아직 너무 이른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이르긴!”
옆에서 이야기만 듣고 있던 홍초희도 불쑥 끼어들었다. 홍초희는 하루 종일 바깥을 나돌아 다니는 적월의 행동이 마음에 안 들었다.
부인이 생기고 가정이 생긴다면 조금 더 집 안에 진득하니 붙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혼인을 강력하게 밀어붙이는 그녀였다.
홍초희까지 나서자 적월은 어서 자리를 떠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의 협공은 마교 교주였던 자신조차 도저히 버텨 낼 수가 없다.
적월이 허겁지겁 남은 밥을 퍼먹고는 젓가락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잘 먹었습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적월이 황급히 방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도망 나가는 적월을 보며 홍초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에휴,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요. 저렇게 바깥이나 싸돌아다닐 거면 어서 혼례를 하고 손자나 하나 안겨 주면 늘그막한 때 얼마나 좋겠어요.”
“그러게 말이오. 나처럼 여인들깨나 울리고 다닐 놈인데…….”
실제로 적월의 인기는 이곳 아산촌에서 하늘을 찔렀다. 시집을 가지 않은 여인이라면 어찌 적월에게 시선을 뺏기지 않겠는가.
훤칠한 키에 아름다운 얼굴, 그리고 신비한 분위기까지 여인들의 시선을 빼앗아 가기 충분했다.
그 탓에 혹시나 약혼녀를 두고 다른 여인과 연분이라도 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건 기우에 불과했다. 수많은 여인들이 적월에게 관심을 드러냈지만 그는 마치 돌멩이를 상대하는 듯 행동했다.
그런 부분에서는 한결 걱정을 덜었지만…….
홍초희는 적월을 향해 내뱉는 적사문의 말에 눈초리를 살짝 올리고 말했다.
“대체 누굴 그리 울리고 다니셨어요?”
“……말이 그렇다는 거요, 말이. 하하.”
적사문이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두두두!
말발굽이 땅을 박차면서 흙먼지와 함께 시끄러운 소리들이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여섯 필의 말이 이끄는 커다란 마차는 겉모습만으로도 위용이 넘쳐흘렀다. 미칠 듯이 내달리던 마차가 점점 속도를 줄이고 섰다.
그 뒤쪽으로는 말에 탄 열 명가량의 무인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멈추어 선 마차의 주변으로 말들이 감싸듯이 빙 둘러쌌다. 그리고 말에 올라타 있던 누군가가 뛰어내려 문을 열며 말했다.
“도착했습니다.”
마차 안에서 나른한 사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곳이 아산촌?”
“옙.”
“그래?”
말을 마친 사내가 천천히 마차에서 걸어 내렸다.
사내의 정체는 놀랍게도 승상 주천영이었다.
희끗한 머리를 단정하게 뒤로 넘긴 주천영은 아산촌의 입구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겨우 이딴 마을에 정말 네가 있단 말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말을 내뱉었지만 주천영은 알 수 있었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마치 첫사랑을 다시금 만나는 사내의 심장처럼 멈출 줄을 모르고 뛰어 댄다. 어찌 모를 수 있단 말인가.
보지 않았음에도 알 수 있었다.
이곳에 그가 있다.
“와룡 적사문…… 내가 왔다.”
그때였다.
“아버지, 저도 내려요?”
마차에서 들려온 여인의 목소리. 그 목소리에는 짜증이 잔뜩 묻어 있었다.
주천영이 마차를 바라보며 말했다.
“길이 좁아서 내려야겠구나.”
그 말이 떨어지자 마차 안에서 화려한 옷차림을 한 여인 하나가 천천히 발을 땅으로 내렸다.
엉망인 길을 보며 얼굴을 찡그리는 여인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침어낙안 폐월수화라는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
주천영의 딸, 주영령(朱英零)이었다.
주천영과 마찬가지로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 드러난 피부는 잡티 하나 없이 깨끗했고 눈동자는 마치 사람을 빨아 당길 듯한 매력을 풍긴다.
흑단 같은 검은 머리카락에 붉다 못해 새빨간 입술.
하지만 심술이 가득해 보이는 얼굴로 아산촌을 두리번거리던 그녀가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여기에 제 신랑이 될지도 모르는 자가 있다는 거예요? 농담이시죠?”
“후후, 애비가 농담하는 걸 본 적 있느냐.”
“알아요. 아는데…….”
이딴 촌구석에 자신의 배필이 될지 모르는 자가 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주영령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아버지인 주천영을 바라봤다.
이런 시골까지 직접 온 주천영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영령이 크게 반발하지 않는 것은 아버지에 대해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이다.
주천영은 결코 이유 없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그런 주천영이 이토록 먼 외지까지 딸인 자신까지 데리고 왔다는 것은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게다.
주천영과 주영령이 마주 서자 함께 따라왔던 무인들이 둘을 호위했다. 그러고는 이 무인들을 이끄는 대장인 풍도건(風棹乾)이 나서서 말했다.
“모시겠습니다.”
말을 마친 풍도건이 손을 들어 올리자 무인들은 적당하게 거리를 벌렸다. 거리를 벌린 열 명의 무인들은 주변을 둘러보며 천천히 아산촌 안으로 들어섰다.
갑작스러운 외지인의 등장은 마을 사람들의 눈을 끌기 충분했다. 너무도 화려한 행색을 한 그들을 향해 마을사람들은 멀찍이 서서 수군거렸다.
그런 마을 사람들의 모습에 주영령은 미간을 찡그렸다. 지저분한 행색의 그들이 자신을 보며 뭔가 수군덕거리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냄새나는 곳에 있는 자라니. 최악이야.’
주영령은 당장이라도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내리눌렀다. 아버지인 주천영은 자신의 명에 반하는 자라면 혈육이라도 용서치 않는 자임을 너무나 잘 아니까.
주천영이 향하는 곳은 다름 아닌 관부였다.
당장이라도 적사문을 만나고 싶었지만 그건 추후의 일. 우선은 관부에 들러 형식적으로나마 자신이 온 것을 알려야만 했다. 그리고 적사문을 만나기 이전에 관부에 들러 먼저 알아봐야 할 것들도 있었다.
아산촌이 워낙 작은 마을이었기에 입구에서 관부까지 도달하는 데 채 반 각이 걸리지 않았다.
관부의 입구를 지키고 있어야 할 관원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워낙 조용한 마을인지라 관원들 또한 그냥 관부 안에서 시간이나 죽이고 있었다.
현감인 엄등이 부임하고 나서 사 년이 넘었다. 그 긴 시간 동안 단 하나의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당연한 결과다.
앞장서서 걷던 풍도건이 관부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조용한 바깥과는 다르게 관부 안에는 그래도 제법 많은 이들이 모습을 보였다.
점심시간이 막 지난 탓에 뒷정리를 하는 아낙들의 모습과, 식사를 마치고 떠들어 대고 있던 관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뭐가 그리도 재미있는지 낄낄 거리며 웃던 관원 중 하나가 열린 문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 등장한 승상의 일행을 발견했다.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았던 자들이다.
그러던 차에 승상 주천영이 모습을 드러내자 관원은 얼굴이 굳어 버렸다.
그뿐만이 아니다. 승상 주천영이 등장하는 그 순간 관부를 침묵이 조금씩 뒤덮기 시작했다. 모두의 시선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주천영에게로 쏠렸다.
사람을 내리누르는 기운, 모두의 시선을 잡아끄는 묘한 마력을 풍긴다.
패왕의 기운!
관원들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이자가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단숨에 알 수 있었다.
관원들이 엉거주춤 선 채로 어찌 행동해야 할지 몰라 할 때였다.
정신을 차린 관원 하나가 황급히 안채 쪽으로 달려 들어갔다. 현감인 엄등에게 보고를 하기 위해서였다.
후다닥 달려간 관원이 엄등의 방문 앞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혀, 현감님!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뭐야?”
식후에 잠에 빠졌던 엄등이 짜증스럽게 문을 열고 나왔다. 엄등의 옆에는 애첩인 앵앵이 붙어 있었다. 잠이 들깬 표정으로 엄등이 관원을 내려다봤다.
짜증이 잔뜩 묻어 있는 얼굴이었지만 관원은 그런 것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무지한 자신이 보기에도 지금 나타난 자는 보통 인물이 아니다.
관원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누, 누군가가 찾아오셨는데…… 서둘러 가 보셔야겠습니다.”
“누군데?”
엄등이 심드렁하게 되묻자 관원이 어색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게…… 잘은 모르겠습니다.”
“누군지도 모를 놈 때문에 나보고 서둘러 가 보라는 거냐. 네놈들도 내가 그리 우스워?”
엄등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적사문 때문에 쥐 죽은 듯이 살고 있는 엄등이다. 그런 처치가 못내 불만스러웠거늘 이제는 수하들까지 자신을 우습게 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막 엄등이 폭발하려고 하는 그 순간 관원이 서둘러 말을 했다.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엄등이 화를 내려던 것을 멈추고 더 말해 보라는 듯이 고갯짓을 했다. 그러자 관원이 말을 이어 나갔다.
“옷차림부터 따르는 자들까지 모두 보통이 아닙니다. 한눈에 봐도 고관대작임이 분명한지라…….”
“고관대작이라고? 이놈아! 그걸 왜 이제야 말해! 앵앵아, 어서 내 겉옷 좀 가지고 오너라!”
화가 나 있던 얼굴은 고관대작이라는 말에 단숨에 변했다. 이곳 아산촌이 지겨웠던 엄등이다. 정말로 상대가 고관대작이라면 그의 눈에만 잘 들어도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벗어날 수 있다.
황급히 겉옷을 챙겨 입은 엄등은 관원의 안내에 따라 허둥지둥 달려왔다. 관부의 입구 근처에는 여전히 승상인 주천영 일행이 서 있었다. 멀리서 달려온 엄등이 황급히 상대들의 상태를 살폈다.
수하의 말대로였다.
‘보통 자들이 아니로구나.’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주천영과 주영령이 입은 옷은 고급스러웠다. 더군다나 지키고 서 있는 무인들 또한 몸에서 범접하기 힘든 기운을 쏟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