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엄등은 황급히 그쪽으로 다가갔다.
차앙!
풍도건의 검이 길목을 막아 섰다.
상대가 갑작스레 검을 출수하자 관부에 있던 모두가 움찔했지만 그뿐이었다. 그 누구도 섣부르게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검이 목에 닿자 오들오들 떨기 시작한 엄등을 바라보며 주천영이 입을 열었다.
“네가 이곳의 현감이냐?”
“그, 그렇습니다만 뉘신지…….”
주천영은 풍도건을 향해 간단하게 손짓을 보냈다. 그러자 풍도건이 검을 치우고 옆으로 물러섰다.
주천영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현감이 앉는 자리까지 걸어 올라간 그가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그런 주천영의 옆으로 주영령 또한 따라 걸었다.
자리에 앉은 주천영이 엄등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본인의 이름은 주천영이라 한다.”
“주천영…….”
조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엄등의 머리가 빠르게 돌았다. 분명 자주 들어본 이름이다. 그리고 이내 엄등의 머릿속에서 그 이름의 주인을 기억해 내는 순간 그는 놀라 나자빠질 뻔했다.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이 떨려 온다.
처음엔 자신의 머리를 의심했다. 하지만 이내 자신만만한 주천영의 모습과, 그 몸에서 풍겨 나오는 압도적인 기백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야만 했다.
그저 일개 고관대작이 아니다.
“스, 승상을 뵈옵니다!”
엄등이 바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승상 주천영!
황제를 제하고는 그 누구도 그의 앞에서는 고개를 들지 못한다. 그만큼 주천영이라는 존재는 절대적이고, 권력의 중심에 있는 자다.
머리를 땅에 박고 있는 엄등을 내려다보며 주천영이 말했다.
“고개를 들어라.”
“예, 예.”
고개를 든 엄등은 여전히 덜덜 떨고 있었다.
같은 벼슬에 있는 자라고 하지만 자신과 주천영은 그 격이 다르다. 이처럼 한 자리에 있을 수조차 없는 신분, 그것이 바로 엄등과 주천영이다.
엄등은 도저히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찌 승상인 주천영이 눈앞에 있단 말인가.
이곳 아산촌은 지도에조차 제대로 표시되지 않은 조그마한 마을에 불과하다. 이런 곳에 승상 주천영이 온 것이 믿어지지가 않는다.
불안함과 알 수 없는 기대감이 뒤섞이며 묘한 감정을 만들어 낸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엄등의 표정에서 그런 그의 생각을 읽어서일까? 주천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궁금한 게 많은 모양이군.”
“아, 아닙니다. 소인이 어찌…….”
“아니다. 묻고 싶은 게 있으면 물어야지.”
주천영의 말에 엄등은 침을 꿀꺽 삼켰다.
계속 아니라고 잡아떼면 오히려 심기를 건드릴 수도 있다. 이럴 땐 차라리 적당하게 속내를 드러내는 것이 낫다.
엄등이 조심스레 물었다.
“하오면 하나만 여쭤 봐도 되겠사옵니까?”
“그러게.”
“어, 어찌 이런 촌에 승상께서 직접 오셨는지…….”
엄등의 질문에 주천영이 손가락으로 의자의 손잡이 부분을 툭툭 두드렸다. 그 모습에 엄등은 혹시나 자신이 뭔가 실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짝 긴장한 채로 몸을 움츠리고 있는 엄등을 향해 주천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곳에…… 내 오랜 지기가 있어서 말이야.”
“지, 지기라 하오시면.”
지기라는 말에 엄등은 깜짝 놀랐다.
이런 시골 마을에 승상의 지기라 불릴 만한 자가 대체 누가 있단 말인가.
그때 엄등의 머리에 한 사내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때를 맞추어 주천영도 입을 열었다.
“와룡 적사문, 그를 만나러 왔다네.”
예상은 했던 이름, 하지만 막상 주천영의 입에서 그 이름이 떨어져 나오자 엄등은 까무러칠 것만 같았다.
‘대, 대체 그 작자는…….’
설리표에 이어 이번엔 주천영이다.
대체 어떠한 작자인지 감조차 오지 않는다.
놀라서 말조차 못 잇고 있는 엄등을 향해 주천영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 친우를 만나기 전에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들어주겠는가?”
“무, 물론이지요!”
주천영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엄등을 바라봤다.
눈을 꾹 감은 적월은 단전에 손을 모은 채로 깊은 명상에 잠겨 있었다.
내공이 빠르게 일주천을 한다. 하지만 이내 내공을 다른 곳으로 움직이려는 순간 그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적월의 몸을 감싸고 있는 요력이 아직도 내공의 움직임을 원치 않아 하는 듯했다.
하지만 익숙한 일이었기에 적월은 당황하지 않았다.
내공의 움직임은 이내 잠잠해지며 이번에는 폭발적으로 요력이 흘러넘친다. 요력은 몸 주변으로 퍼져 나가며 붉은 기운을 토해 냈다.
요력을 쌓아 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각이다.
몸 주변으로 넘실거리는 이 막대한 기운은 항상 적월을 설레게 만든다. 당장엔 이 요력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지만 마침내 몸이 완성되는 그 날을 상상만 해도 두근거린다.
이 힘은 예전 마교 교주 시절에도 지니지 못했던 압도적인 강함이리라. 적월의 두 눈이 번쩍 떠졌다.
사르륵.
마치 연기처럼 몸 주변을 감싸던 붉은 요력이 사라져 버렸다.
적월은 천천히 앉아 있던 바위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요력이나 내공을 사용하지는 못하지만 이처럼 두 가지 기운을 운기한 후에는 한결 몸이 가벼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덩달아 온몸의 감각도 예민해진다. 졸졸거리는 시냇물 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적월은 소매를 들어 올려 자신의 오른팔을 바라봤다.
붉은 문신이 요란스럽게 장식하고 있다.
이 문신을 들키지 않기 위해 얼마나 고생하는지 모르겠다. 아마 적사문이나 홍초희가 이 문신을 본다면 놀라 나자빠지려고 할 것이다. 귀찮은 일을 방지하기 위해 적월은 그들 앞에서 항상 이 문신을 잘 감춰 왔었다.
문신을 바라보며 적월은 일전의 만남을 떠올렸다.
‘천왕문이라.’
염라대왕은 말했다.
오 년 후에 다시금 문신이 빛을 발할 것이고, 그때부터 적월은 천왕문을 열 자격이 생길 것이라고. 그리고 그 오 년이라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내공이나 요력을 사용할 수 있는 시간도 마찬가지다.
스무 살 전후로 그 두 가지 모두 사용할 수 있을 거라 들었다. 성취에 따라 다르다고는 했지만 그때도 염라대왕은 내심 적월의 실력이 상승된 것에 만족하는 눈치였다. 아마도 빠르다면 일 년, 늦어도 이 년 안에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적월은 자신했다.
슬슬 때가 다가온다는 사실에 적월은 기쁘면서도 뭔가 아쉬움이 남았다.
이곳을 떠나야 할 게다. 이곳에서 살면서 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알지만 아쉬운 감정이 남는 건 사실이었다.
이곳 아산촌은 무척이나 평화로웠다. 항상 죽음과 함께 살아가던 저번 생과는 완전히 달랐다.
오히려 너무 할 게 없어서 무료하기까지 한 삶.
그게 지겹기도 했지만 그래서 좋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다시금 적월은 전생과 같은 삶, 아니, 그보다 훨씬 치열한 인생에 뛰어들어야 할 것이다. 그 사실을 알기에 적월은 더 지금의 평화를 즐기기 위해 노력했다.
눈을 꽉 감은 채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던 적월의 손가락이 꿈틀했다.
쏴아아!
불어오는 바람들 사이로 새들이 날아오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동시에 무엇인가가 날아드는 것을 느낀 적월이 눈을 번쩍 떴다.
내공과 요력을 막 운기한 덕분에 감각이 최고조로 달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적월의 손이 움직였다.
탁.
날아든 것을 재빠르게 잡아 낸 적월은 이내 손바닥을 펴 보았다. 손 안에 든 것은 조그마한 돌멩이였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돌이 날아든 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일련의 무리가 있었다.
적월의 시선은 개중에 가장 가운데 있는 여자에게로 향했다.
적월과 여인의 시선이 공중에서 얽혔다.
여인은 자신의 돌멩이를 잡아 낸 적월을 보며 잠깐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그런 표정을 지우며 입을 열었다.
“살아 있었나 보네.”
“…….”
적월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신 쥐고 있던 돌멩이를 다시금 그 여인에게로 던졌다. 내공은 실리지 않았지만 돌멩이는 빠르게 날아들었다.
여인의 손이 허공에서 흔들렸다.
파악.
돌멩이를 받아 낸 여인이 슬쩍 몸을 옆으로 돌린 채로 적월을 바라봤다. 요염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여인이 피식 웃었다.
“생긴 거랑 다르게 제법 성깔 있는데.”
“아가씨께 이게 무슨 무례한…….”
“아냐, 괜찮아.”
여인은 나서려는 수하를 손을 들어 제지했다.
여인의 정체는 아산촌에 찾아온 주천영의 딸 주영령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지키는 무인들에게 적월의 행동은 천인공노할 짓에 가까웠다. 하지만 주영령의 명이었기에 무인들은 물러서야만 했다.
주영령이 성큼 적월에게 다가섰다.
둘 사이의 거리가 일 장 거리로 좁혀졌다.
점점 다가오던 주영령의 표정이 살짝 흔들렸다. 멀리서 보았을 때도 그 외모가 제법 되어 보였지만 가까이서 본 적월은 실로 눈을 잡아끄는 미남자였다.
하지만 주영령은 다름 아닌 주천영의 딸이다.
놀라면서도 그 도도함은 잃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그녀였다.
주영령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 마을 사람?”
“그러는 넌 누구냐.”
적월이 하대를 내뱉었다.
어차피 부모의 눈도 없기에 서슴없이 한 행동이다.
그런 적월의 행동에 호위무사들은 쌍심지를 켰지만 오히려 그러한 게 주영령은 더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재미있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주영령을 보며 적월을 속으로 그녀에 대한 것을 파악해 갔다.
‘날아드는 돌멩이를 잡아 내는 모습이 보통이 아니었어. 그리고 행색이나 따르는 무인들의 수준을 보아하니…… 보통 신분은 아니겠군.’
내공은 실리지 않았지만 그 돌은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이 여인은 아무렇지 않게 잡아 냈다.
문제는 그게 아니다.
이 여인을 지키는 무인들의 수준, 그 수준이 보통을 넘어선다. 그런 그들이 날아드는 돌을 막아 내지 않았다. 한마디로 여인이 이 정도쯤은 아무렇지 않게 막아 낼 것을 잘 알았다는 소리다.
이 정도로 뛰어난 무인들에게 그런 믿음을 준다는 것은 이 여인의 실력이 결코 그들의 아래가 아니라는 걸 말해 줬다.
적월이 주영령에 대해 파악하는 동안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주영령은 적월을 자세히 뜯어봤다.
옷으로 가려져 있지만 몸은 잘 단련된 듯하다. 그렇지만 신기하게도 내공을 익힌 흔적이 전혀 없다. 아름다우면서도 잘생긴 얼굴은 여심을 뒤흔든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주영령의 마음에 드는 것은 바로 저 오만함을 감추고 있는 눈동자다.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호위무사들이 보통이 아니고, 자신이 고귀한 신분일 것이라는 것을.
일반적이라면 고개를 숙이고 들어온다.
하지만 이자는 아니다.
오히려 그런 자신을 오만하게 내려다본다. 그 눈이 마음에 들었다. 아래에서 사는 자들이 제아무리 가지려 해도 가질 수 없는 그 오만함이.
그리고 그런 눈을 지닌 자라면…….
주영령이 뭔가를 생각해 내고는 화색을 띠고 물었다.
“네 아버지 이름이 뭐지?”
“뭐 하자는 거냐?”
적월의 입장에서는 갑자기 돌을 던지고 이어 자신의 아버지의 이름을 묻는 주영령의 행동이 어처구니없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내 주영령이 됐다는 듯이 손을 저었다.
“말하기 싫으면 됐어. 말 안 해도 알 것 같으니까.”
“대체 뭔 소리야?”
적월은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가뜩이나 안하무인처럼 구는 주영령에게 어찌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짜증이 잔뜩 치솟은 상황이다. 그런데도 연신 알 수 없는 소리로 사람을 짜증나게 하니 절로 마음이 표정으로 드러났다.
그때 뒤쪽에 있던 호위무사 중 하나가 다가와서 말했다.
“아가씨, 시간이 많이 지체됐습니다. 이만 가시지요.”
“그러지.”
나이가 많은 호위무사에게도 거침없이 반말을 내뱉은 주영령이 적월을 향한 시선을 고정시킨 채로 천천히 몸을 돌렸다. 입가에 요염한 미소를 머금은 주영령이 마지막으로 뜻 모를 한마디를 던졌다.
“아무래도 우린 또 만날 것 같지?”
“뭐?”
자신이 할 말만 마치고 주영령은 휙 하니 몸을 돌려 다시금 온 길을 거슬러 가기 시작했다.
너무 심심하던 차에 잠깐 산 구경을 왔던 그녀다. 한데 그곳에서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다.
‘저놈이야.’
아버지가 자신의 짝으로 정한 상대.
본 적도 없고 이름조차 듣지 못했거늘,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토록 조그마한 마을에 저 같은 사내가 또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확실하다.
저놈이 바로 주천영이 찾는 적사문이라는 자의 아들일 것이다.
아산을 걸어 내려가던 주영령이 입가에 색기가 넘쳐흐르는 미소를 머금었다.
‘뭐, 일단은…… 맘에 들어.’
이곳 아산촌에 오고 나서 처음으로 유쾌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