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창립 기념일
초저녁, 영희는 애영을 찾아왔다.
“애영 씨, 미안해요, 진작에 와서 위로라도 해야 하는데….”
영희는 애영을 끌어안으며 등을 두드린다.
애영은 평소와 달리 그대로 영희의 품에 안겨있다.
“고마워요, 영희 씨뿐이네요.”
몸을 떼어내며 잠시 의아한 듯 바라보는 영희다.
“왜요?”
“아니요, 애영 씨가 이젠 저에게 마음을 열게 되었나 싶어서요.”
“후훗, 제 마음은 늘 열려있었는걸요.”
“아….”
무색한 듯 영희가 웃어 보인다.
“앉으세요, 영희 씨.”
평소와 너무나 다른 애영의 태도에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는 영희다.
동현의 말로는 심한 우울증에 대인 기피증도 앓고 있다고 들었는데, 지금 영희 앞에 있는 애영은 지극히 정상이었다.
오히려 예전보다 더욱 밝아 보였다.
애영은 묻지도 않고 쥬스 두 잔을 가져와 테이블에 놓는다.
“영희 씨, 키위 쥬스 좋아하죠?”
“네? 네에….”
영희는 잠시 생각한다.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애영은 한 번에 반잔을 비운다.
“드세요.”
“네, 고마워요.”
영희는 쥬스를 마시며 힐끗 애영을 바라본다.
애영의 표정은 여유 있어 보였다.
“내일 우리 회사 창립 기념일이거든요, 오실 수 있죠?”
애영이 밝게 미소 짓는다.
“당연히 가야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영희 씨를 봐서라도.”
“아, 네에, 고마워요.”
영희는 당연히 애영이 거절할 것이라 예상했고, 상태가 어떤지 궁금한 마음에
방문한 것이었다.
자신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애영의 태도를 보며 영희는 실망하게 된다.
“그 목걸이는….”
영희는 일부러 목걸이 얘기를 꺼낸다.
애영이 목걸이에 대한 얘기를 꺼내면 분명히 다른 반응을 보일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이죠.”
영희는 고개를 끄덕인다.
“다음엔 영희 씨 빌려줄게요, 언제든지 말하세요.”
“네에… 고마워요.”
순간, 영희는 오싹함을 느낀다.
도우미 아주머니 시체에서 발견된 목걸이를 하고 오겠다는 애영이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자신에게 빌려주겠다니, 영희는 어서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너무 늦었네요, 그만 가봐야겠어요.”
“왜요? 좀 있으면 우리 그이가 올 텐데, 보고 가죠.”
“아니요, 내일 보면 되죠.”
“그럴래요?”
영희는 서둘러 애영의 집을 나선다.
애영은 돌아가는 영희의 뒷모습을 보며 손가락으로 각도를 잰다.
“그려 볼까?”
규모가 큰 회사는 아니지만 내실이 강한 상원그룹이다.
최근 구입한 별장에서 파티형식으로 꾸민 창립기념행사는 생각보다 거창했다.
자고로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말이 맞다고 생각하는 애영이다.
“와! 애영 씨! 오늘은 더 아름답군요?”
늘 그렇듯 항상 밝은 상현이다.
“목걸이 때문, 아닐까요?”
애영은 동현을 바라본다.
영희를 바라보던 동현은 흠칫하며 애영을 향해 미소를 보낸다.
애영은 못 본 듯, 고개를 돌려 윤상현을 향해 미소를 짓는다.
동현은 부담스러울 만큼 애영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아….”
애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관자놀이를 꾹꾹 누른다.
“왜? 안 좋아?”
“머리가 좀 아프네… 밖에서 찬바람 좀 쐬고 올게요.”
“같이 가지.”
애영의 팔을 잡은 동현의 손을 떼어낸다.
“아니야, 당신까지 자리를 비우면 미안하지, 걱정 마요, 정원 벤치에 앉아있으면 괜찮아져.”
“그럴래?”
애영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동현과 영희가 이 층 작은 방으로 들어선다.
“하아아… 동현씨, 잠깐만…”
영희의 가쁜 숨소리는 희열로 가득하다.
“미치는 줄 알았어, 널 눈앞에 두고 마누라 손이나 잡고 있어야 하는 기분 알아?”
동현은 거침없는 말들을 쏟아낸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그런데 요즘 상현 씨가 날 의심하는 것 같아.”
“걱정 마, 내가 다 알아서 할게.”
동현과 영희의 포옹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사랑해… 사랑해… 영희야.”
“언제까지 사랑한다는 말만 할 거야?”
“조금만 기다려.”
동현의 입술로 영희의 말을 막는다.
동현의 격렬한 몸짓에 영희는 숨이 차는 황홀함에 빠진다.
그들의 몸짓은 불꽃 속에서 춤을 추듯, 뜨겁고 격렬했다.
인기척에 영희가 발딱 일어선다.
“누구지? 상현 씬가?”
“상현이는 지금 손님 접대하느라 정신없어.”
“나가자, 불안해.”
정작 동현은 여유 있게 웃으며 영희와 뜨거운 키스를 나눈다.
동현을 밀어내며 불안한 듯 영희가 옷을 걸치고 일어선다.
“내가 먼저 나갈게, 조금 있다가 나와.”
“알았어.”
영희가 나가자 동현이 휘파람을 불며 옷을 입는다.
‘쾅’ 소리에 동현은 얼른 뒤를 본다.
상현은 사냥이 취미였다.
그가 애지중지하는 장총이 바닥에 떨어져 있다.
동현은 주변을 살핀다.
인기척이 없다.
“우리가 너무 격정적이었나?”
히죽 웃으며 총을 제자리에 놓는다.
동현은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훑어보고는 방을 나간다.
커튼 뒤에서 애영이 나온다.
방금 떨어졌던 총을 바라보는 애영이다.
“멋지네….”
애영은 소파 밑에 떨어진 영희의 귀고리를 주워 자신의 클러치 백에 넣는다.
애영은 이 층 베란다로 올라갔다.
이 층이지만 워낙 큰 탓에 4층 정도는 되어 보이는 높이다.
시원한 가을바람에 도취되는 애영이다.
“흐음… 너무 좋다….”
그때, 헬멧을 쓴 젊은 남자가 상현에게 뭔가를 건넨다.
상현은 고개를 갸웃하며 봉투를 열어본다.
그 모습을 보던 애영은 조용히 홀로 내려간다.
“두통은 좀 어때?”
영희와 이야기를 나누던 동현이 애영의 어깨를 감싸며 다정하게 묻는다.
“좀 나아졌어요.”
상현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더니 영희의 손목을 잡는다.
“나하고 잠깐 얘기 좀 해!”
“여보!”
“따라와!”
상현은 거칠게 영희의 손목을 잡고 이끈다.
“윤 사장! 무슨 일이야?”
상현은 동현을 말없이 바라보더니 영희를 끌고 이 층으로 올라간다.
따라가려는 동현을 애영이 잡는다.
“부부 일이에요.”
동현은 불안한 시선으로 이 층을 향한다.
“여보, 우리 칵테일 한잔해요.”
애영은 동현에게 칵테일 잔을 건넨다.
동현이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한 모금 마시는 순간,
“아아아악!!!”
“영희야!”
‘쿵’
소리와 함께 파티장은 수라장이 되었다.
동현은 들고 있던 칵테일 잔을 던지고 밖으로 뛰쳐나간다.
애영은 표정 없이 칵테일 한 모금을 마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