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처럼 울부짖는 함성소리에 다이나는 깜짝 놀라 눈을 다급히 떴다. 어느새 자신은 아버지와, 어머니, 언니 옆에 무릎을 꿇은 채 앉아 있었다.
“언니, 어머니.”
“도망가라고 했는데…….”
어머니가 말소리는 내지 않고 입 모양으로만 전해왔다. 이것도 후계자 수업 중의 하나였고, 다이나는 바로 알아들었다. 후계자 수업은 원래 왕의 뒤를 잇는 언니의 몫이었지만, 언니의 바람이 어우러져 자신에게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뒤이어 이어지는 어머니의 입 모양, 구슬프게 귓가로 직접 스며드는 착각을 일으켰다.
“죽었구나! 이런…….”
다이나는 고개조차 끄덕일 수가 없었다. 허무하게 져버린 시녀장의 죽음이 안타까웠다. 거친 함성소리가 다시금 울렸다. 다급히 시선을 주자, 강한 살기를 띄운 남자가 아버지의 목을 잡아 질질 끌고 갔다.
“무엄하다!”
어머니와, 언니, 자신의 말소리가 겹쳐졌지만 이내 함성 속으로 묻어졌다. 함성을 가르는 근엄한 목소리가 어디선가 흘러나왔다.
“제대로…….”
강한 살기를 띄운 남자가 아쉬운 듯 아랫입술을 빨간 혀로 쓱 훑었다. 손을 강하게 툭 놓자 거칠게 아버지의 몸이 내동댕이쳐졌다. 쓰러진 아버지의 허망한 눈과 다이나의 시선이 부딪쳤다.
“아버지!”
입 모양으로 힘겹게 내뱉자, 멀리서도 아버지의 메마른 입술이 움직여지는 게 보였다.
“울지 마라, 다이나.”
으윽, 날카로운 비수가 꼽히며 가슴이 갈라지는 것처럼 아파왔다.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그러자 다시금 아버지의 입술이 열렸다.
“다이나.”
그 말과 함께 거친 살기를 띄운 남자가 단칼에 아버지의 목을 베어 버렸다. 거친 함성소리와 검을 높이 치켜드는 모습이 눈에 거짓말처럼 확 와 닿았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어머니와 언니의 흐느끼는 소리가 거칠게 귀를 때렸다.
‘이건 꿈이다. 제발.’
아이리스는 빠르게 수호기사를 눈으로 찾았다. 워낙 많은 적들의 수 때문에 황실 기사들이 눈에 빨리 담아지지 않았다. 그때 번쩍 검이 빛을 발했다. 햇빛에 반사된 곳에 다급히 시선을 주자, 그가 서 있었다.
“휴, 다이나를 데리고 빠져 나가!”
“그럴 수 없습니다.”
입 모양으로 휴에게 말을 전했지만, 고집 센 그답게 완강히 거부했다. 아마도 자신이 나가지 않는다면, 어림도 없을 테고. 아이리스는 절망적인 기분이 들어 어머니를 보았다. 다 죽을 필요는 없었다. 아마도 어머니와 자신은 살아남기 힘들었다. 다이나에게 얼른 시선을 던졌다. 어리고 여린 동생이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어여쁜 동생이고, 만약 누군가가 살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면 그건 동생이어야 했다. 눈빛을 날카롭게 무장하고, 다시 휴를 보며 말했다.
“명령이다. 휴, 기회를 보고 다이나를 데리고 빠져나가.”
“…….”
젠장, 휴. 이렇게 고집 부릴 때가 아니라고. 가슴이라도 치고 싶은 이 순간, 왜 휴는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걸까? 다시금 함성소리가 들렸고, 무자비하게 어머니의 목을 움켜쥐더니 죽음이란 곳이 그려진 곳으로 끌고 갔다.
“어머니!”
다이나의 날카로운 소리가 깊게 메아리쳤고, 목이 강하게 움켜잡힌 채인데도 어머니가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다이나 미안하다.”
“어머니.”
입을 아주 작게 움직여 모양을 만들고선, 서로가 서로에게 말했다. 아이리스는 다시 다급히 휴를 보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며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검이 높게 위로 치켜들어졌다.
“안돼…….”
“어머니, 안돼……!”
아이리스와 다이나의 울부짖는 소리가 함성 속으로 이내 또다시 사라졌다. 아름다운 두 여인이 울고 있었지만, 흥미로운 시선만 던질 뿐 어느 누구도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다이나는 두 손을 꼭 잡고 기도했다.
‘살려주세요. 어머니를…….’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검이 그대로 내려쳐졌다. 다이나는 순간 온 몸을 뚫고 나오는 강력한 기운을 느꼈다. 뭐지, 방금 뭐였지? 순간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하지만 이내 잠잠해지자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차마 어머니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울지 않으려고 피가 나도록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울지 않으려고 애쓰는 나는 누구지?’
기껏 후계자 수업 따위가 무슨 소용이라고. 죽어가는 가족도 살리지 못하는데. 얼음보다 더 차가운 고통 어린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울 다이나의 눈에서 흘러내렸다. 언니의 목이 잡히더니 질질 끌려갔다.
“더 이상은 안 돼. 싫어, 싫다고!”
다이나의 날카롭고 고운 목소리가 함성 속을 뚫었다. 잠시 몇 초간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이내 다시 그들은 야유를 보내며 비웃었다. 또다시 강렬한 느낌. 온몸을 강하게 후려쳤다. 몸이 덜덜 떨릴 만큼 자극이 컸다. 다이나는 몸을 옥죄어 오는 느낌에 숨을 고르며, 몸을 앞으로 숙였다. 그러자 강렬한 보호막이 자신의 몸에 둘러쳐졌다. 하얀 연기가 거칠게 내리는 빗속을 뚫고 나오는 것처럼, 강인하게 피어올랐다.
아이리스는 믿기지 않아 두 눈에 힘을 줬다. 일리아나 왕국에서 우수한 인자를 타고난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마법이라는 값진 선물을 태어날 때부터 받았다. 하지만 왜 지금 다이나는 각성 했을까? 한 번도 마법이 발현되지 않았었는데.
점점 크기를 부풀리며 더 진한 하얀색으로 변해갔다. 그러자 갑자기 사방에서 결계가 쳐졌다. 아마도 황궁 마법사들이 다이나를 보호하기 위해 치는 중이겠고, 그런데 오른쪽 방향에서 날카로운 칼날들이 쏟아졌다. 그 결계를 찢으려는 마법, 이미 저들에게 넘어간 자들일 테고. 아이리스는 눈으로 다시 휴를 찾았다. 그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휴, 다이나를 지금!”
“금방 모시러 오겠습니다.”
휴가 그동안 자신과 다이나가 입 모양으로 장난치는 모습을 놓치지 않고 봤었나 보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용케도 알아듣고 대답하지. 기특해 눈으로 휴를 다정히 쓰다듬어 주자, 그의 검은 눈동자에 물기가 스몄다. 잘못 봤겠지 싶어 눈에 힘을 주자, 그가 입 모양으로 말해왔다.
“금방 모시러 오겠습니다.”
“다이나를 잘 부탁해.”
그의 바람이 무엇인지 알지만, 허튼 약속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여길 다시 오는 기적은 없었다. 자신이 하루를 더 살 가능성은 이미 바닥을 치고 있었다.
다이나는 몸을 강하게 뚫고 나오는 거친 기운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풀썩 바닥에 쓰러졌다. 여전히 결계 속으로 칼날들이 꽂혔고, 휴가 움직이자 황실 마법사들이 그의 움직임을 돕기 위해 그에게도 방어막을 둘렀다. 그러자 묶여 있던 황궁 마법사들의 목을 반란군들이 사정없이 검으로 베어버리기 시작했다. 황궁 마법사들이 마법을 이용해 공격을 하려고 하면, 어김없이 다른 방향에서 방해하는 마법이 시전 되었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칼날이 빗발쳐 날아오고, 강한 방어막과 결계, 그 사이 황궁 마법사들의 목이 베어져 갔다. 휴는 빠른 속도로 다이나에게 다가가 그녀를 안아 들었다. 가녀린 몸이 자신의 품에 바짝 안겨들었다. 칼날 빗발치는 속도가 갑자기 빨라졌다. 아마도 결계를 치고 있던 황궁 마법사들이 많이 죽임을 당해서 그럴 테고. 휴는 빠르게 가녀린 다이나를 안고선 뛰었다. 뒤돌아 자신의 주군이자, 사랑하는 여인인 아이리스를 보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를 더 부추기며 발길을 재촉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본채 입구 쪽에 세워둔 말이 보였다. 급하게 다이나를 위로 올리고 자신도 올라탔다.
“이럇!”
말 옆구리를 강하게 차며 휴는 소리를 질렀다. 빠른 속도로 성을 빠져나가기 위해 달렸다. 그 와중에도 살아남은 황궁 마법사들이 결계를 쳐주고 있었다. 하지만 점점 옅어져 갔다. 칼날이 순식간에 휴의 귀를 스쳐 지나갔다. 그러자 다이나 몸에서 하얀 방어막이 순식간에 둘러쳐졌다.
“죽음이 공주님의 각성을 일으켰군.”
살고자 하는 의욕이 숨죽여 있던 미지의 힘을 일깨웠다. 휴가 성을 빠져나오자 우렁찬 함성소리가 들렸다. 빠르게 몰던 말 속도가 잠시 주춤거리며 늦춰졌다. 그러자 다시금 칼날이 날아왔다. 방금 전 소리는 아마도…….
“아이리스.”
한 번도 그녀의 이름을 불러본 적이 없었다. 마음에 품어서는 안 될 고귀한 존재였고, 자신은 그림자였다. 하지만 뻗어가는 자신의 마음을 어쩔 수가 없었다. 평생 그녀를 지키겠다고 기사도를 외우며 맹세했는데.
“빌어먹을.”
지금 자신은 그녀가 아닌 다이나 공주를 안고 있었다. 그녀가 죽었다. 자신의 전부인 그녀가 좀 전에, 휴는 알 수 있었다.
다이나는 귓가에 파고드는 곤충들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누가 문을 열어둔 걸까? 그러다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소리였다. 눈꺼풀이 너무 무거워 눈이 떠지지 않았다. 몸도 움직여지지 않았고, 그저 숨만 쉬는 것만 가능할 뿐. 그러다 아득히 멀어져 숨겨져 있던, 기억들의 파편들이 맞물리며 이어졌다. 아버지, 어머니, 폐부를 채우는 고통에 다이나는 잠시금 당황했다. 그러다 다시금 기억들이 이어졌고
'으윽. 아버지, 어머니!‘
목이 처진 것까지 떠오르자 다이나는 소리쳐 울부짖었다. 그리운 아버지, 어머니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목으로 어떤 것도 내뱉어지지도, 말소리가 귀에 들려오지도 않았다. 나도 죽은 걸까? 차라리 잘 되었다. 그때 자신을 흔드는 손길이 느껴졌다.
‘누구지?’
“다이나 공주님.”
가만가만, 휴 목소리였다. 다시 좀처럼 떠지지 않는 눈에다 힘을 주었다. 파르르 눈꺼풀이 떨려왔다. 하지만 확인해야 했다. 언니가 어떻게 됐는지, 마지막 기억엔 언니가 없었다. 마지막 힘을 다해 눈을 들어 올렸다. 희미한 초점 때문에 휴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흐릿하고 전혀 보이지 않던 시야가 점점 밝아지며, 어렴풋이 윤곽이 잡혔다. 휴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일주일 만입니다. 공주님.”
그의 서글픈 목소리가 자신의 마음을 가슴 아프게 울렸다. 이런 상태로 자신은 일주일간이나 누워 있었다. 가족들은 험한 꼴을 당했는데.
“언니는?”
겨우 말소리가 새어 나왔다. 탁한 목소리에 잠시 이질감이 들었다.
“…….”
시선을 피하는 그를 보며 다이나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의 하늘이자 자신이 꿈꾸던, 되고자 했던 언니가 죽었다는 사실을. 소리 없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머니와 아버지, 언니가 더 이상 자신 곁에 없었다. 반란군 때문에.
“다 죽일 거야.”
다이나는 이를 악 다물었다. 남은 자신의 인생을, 행복을, 꿈을, 가족을 무참히 살해하고 짓밟아버린 그들을 응징하는 것으로.
‘반드시, 받은 만큼 돌려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