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마음과는 달리 어떻게, 뭐부터 시작해야 할지 순간 막막해졌다. 일단 흘러내리는 눈물부터 닦았다. 그러다 또다시 자신 곁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슬프게 와 닿았고, 눈물이 또다시 흘러내렸다.
“흑…… 흑.”
아픈 마음을 소리 내어 표현했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었으니깐. 말없이 자신을 보고 있던 휴가 하얀 손수건을 내밀었다. 물끄러미 건넨 손수건을 보다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그 역시 착잡한지 표정이 어두워 있었다. 하지만 자신 만큼 슬플까?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복수 할 거야.”
“어떻게 말입니까?”
“검술을 가르쳐줘.”
자신의 말에 그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어두워져 있었고.
“검만 배워서는 일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알아. 뭐든 다 해볼 거야.”
입을 굳게 다문 그가 자신만큼이나 상처받은 얼굴로 보고 있었다. 자신은 공주의 신분을 잃었고, 사랑하는 부모님과 언니를 잃었다지만 휴는 왜? 기껏해야 수호기사라는 직책을 잃지 않았나, 그거 말고 더?
“도와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꼭 그렇게 하는 게 공주님을 위하는 길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날 위하는 길인지 아닌지는, 내가 판단할게.”
“알겠습니다. 공주님처럼 저 역시 원하는 바입니다.”
“…….”
일리아나 왕국이 그에게 전부였을까? 자신처럼. 머릿속으로 여러 물음이 떠돌아다녔지만, 다이나는 입을 굳게 다물어버렸다. 그가 무슨 이유로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을 도와준다면 그건 고마운 일이었다. 석류처럼 새빨간 머리색에, 짙은 검은 눈동자, 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한 몸. 그가 지나갈 때마다 시녀들의 눈이 아주 바쁘게 움직여댔었다. 마법과 검술을 함께 다룰 줄 아는 그는 어린 나이에 수호기사로 발탁되었다. 그것도 왕국의 후계자의, 수호기사로.
“쉬십시오.”
정중하게 인사를 올리고 그가 밖으로 나갔다. 이미 사라져버린 왕국의 공주에게 아직까지도 그는 친절했다.
“언제까지 갈지.”
그도 하루아침에 일리아나 왕국을 져버린 반역자들처럼 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으니깐. 더구나 언니의 수호기사였지, 자신을 지키는 자는 아니었으니깐. 또다시 절망감이 덮쳐왔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누가 아버지를 배신했을까? 언니처럼 가까이에서 귀족들을 살펴볼 기회가 없었다. 어떤 자들이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었을까? 왜 배신했을까?
“하아, 답답해.”
머리를 쓸어 올려 대충 정리를 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자신의 발치에 휴의 겉옷이 있었다. 바쁘게 온다고 살림살이를 마련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방안을 둘러보았지만, 휑하니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 이런 곳에 익숙해져야 했다. 자신보다는 언니가 살아남는 게 일리아나 왕국을 위해선 좋은 일이었다.
“언니…….”
그럼에도 자신을 희생했을 언니가 눈앞에 그려졌다. 자신을 지켜야 할 수호기사까지 떡하니 보내놓고.
“왜 그랬어?”
아버지와 어머니도 원하는 바가 아니었을 텐데, 왜 바보같이 자신을 살려준 건지. 계속 울고만 있을 수 없어 다이나는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허름하지만 비와 해를 가릴 수 있는 작은 집. 겨우 목숨은 건졌지만, 남은 자신의 어깨에 많은 짐이 쌓였다. 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다이나는 눈에 보이는 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울창한 숲 사이를 지나 안으로 제법 들어가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곳이 열렸다. 작은 호수였고 안개가 자욱해 몸을 가리고 씻기에 제격이었다.
“아…… 일주일이나 누워 있었으니.”
다이나는 팔을 코에다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그때 풀들을 헤치며 누가 오고 있었다. 다이나는 긴장한 채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계속 시선을 던졌다.
“접니다. 공주님.”
“휴?”
“네.”
맥이 탁 풀렸다. 어쩔 수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휴에게 의지하는 수밖에. 이제 겨우 자신은 열 살이었다. 미안하고 염치없지만, 지금은 달리 방법이 없었다. 꾸깃꾸깃해진 원피스 자락을 잡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이곳까지 자신을 데리고 왔는데 여기서도.. 그가 말없이 다가와 손을 뻗었다. 얼핏 그림자로 옷 모양이 보였다. 고개를 들어 그를 보자 손에 파란색 원피스가 들려 있었다.
“돈이 얼마 남아 있지 않아, 좋은 건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야. 고마워.”
다이나는 그가 건네는 원피스를 받아들었다. 먼저 걸어가다 뒤를 흘낏 돌아보았다. 그는 말없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자신이 귀찮은 건 아닐까, 두렵고 미안한 마음에 서둘러 걷기 시작했다.
빠르게 걸어가는 공주님을 보다 큰 나무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산속 깊은 곳이라 사람들의 왕래는 없었지만, 동물들의 습격은 또 다른 얘기였다. 긴 검은 머리가 허리까지 내려와 출렁였다. 신비한 보라색 눈동자를 한 공주님은 누가 봐도 아주 아름다웠다. 여리고 약한 공주님이 복수를 위해 검을 들겠다는데, 말리지 않아도 될까 걱정이 앞섰다. 나뭇가지를 하나 주워들어 바닥에 휘휘 저었다. 뜻 모를 글자들이 흙 위로 하나둘씩 새겨졌다.
“아이리스 공주님, 당신이라면 지금 어떻게 하실 겁니까?”
나뭇가지를 멀리 던져버렸다. 지금 자신 옆에는 열 살밖에 되지 않는 여자아이 하나가 있었고, 주머니엔 얼마 남지 않은 돈이 전부였다. 앞으로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막막해 휴는 눈을 감고 나무에 등을 기댔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아이리스 공주님은 이런 열약한 상황에서도, 어떤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렇다면 자신 역시 다이나 공주님을 포기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녀의 마지막 바람이기도 했으니깐.
“아이리스.”
그리운 그녀의 이름을 잠시 되뇌었다. 가슴 끝으로 차가운 바람이 스며들어왔다. 욱신욱신 거려 손으로 세게 쥐어 잡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녀의 느낌이 고스란히 자신의 가슴속으로 전해져 들어와, 이것마저 행복했다.
다음 날 아침 다이나는 긴 검은 머리를 질끈 묶었다. 거추장스러운 치마는 어쩔 수 없었다. 휴에게 다시 사달라고는 할 수 없었으니깐. 잠시 옷을 점검하다 다이나는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는 큰 바위에 걸터앉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자신이 나오는 소리에 맞춰 시선을 주었다.
“오늘부터 하실 겁니까?”
“하루라도 빨리 배워야 할 거 같아서”
“알겠습니다.”
휴가 바위에서 훌쩍 뛰어 내려와 목검을 건넸다. 무슨 나무인지는 모르겠지만, 잔잔한 향이 검에서 흘러나왔다. 영문을 몰라 휴를 쳐다보고만 있자 그가 말했다.
“이걸로 연습하시면 됩니다.”
“…….”
다이나는 검을 내려다봤다. 솜씨 좋은 장인이 만든 것처럼 아주 부드럽게 손에 잡혔다. 까칠까칠한 면도 느껴지지 않아 다시금 그에게 시선을 주다 휴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손 여기저기에 칼로 베인 상처가 있었다. 다이나는 깜짝 놀라 휴를 보며 말했다.
“휴 손이, 혹시 이걸 만들다가 그랬어?”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한지 모르겠지만, 그가 멋쩍은지 자신의 손을 등 뒤로 감췄다. 다가가 손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가 더 멋쩍을 거 같아 다이나는 슬쩍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고마워.”
“…….”
손을 입으로 가져가 목을 가다듬는 그를 보며 다이나는 다시 시선을 주었다. 왜 귀찮아하지 않을까? 내버려 두고 도망가더라도 자신은 할 말이 없는데. 하지만 물을 수가 없었다. 휴가 자세를 잡더니 자신을 보며 말했다.
“기본자세부터 다시 배우겠습니다.”
“그건 이미 배웠어.”
“저한테 배우시지는 않으셨잖아요.”
“그렇긴 하지, 그래도 뭐 하러 시간 낭비를 해. 나도 그 정도는 할 수 있는데.”
휴에게 보여주기 위해 그처럼 자세를 잡고 공격 준비를 했다. 입매가 잠시 느슨해지며 그가 미소를 살짝 그렸다. 아마도 자신의 도발이 조금 흥미로웠나 본데. 다이나는 조금 큰 기합소리에 맞춰 휴에게 검을 내려그었다. 그러자 그가 가볍게 한 손으로 툭 받아쳤다. 어랏! 그렇게 가볍게 받아칠 만큼은 아닌데. 조금 당황스러워 다시 기합소리를 내며 그에게 검을 내려쳤다.
“소리만 열심히 지른다고 연습이 되는 건 아닙니다.”
“내 소리가 그렇게 컸어?”
입술을 앙다물며 그를 보자 그가 가볍게 웃었다. 하긴 소리만 열심히 질러대긴 했다. 다이나는 한숨을 한번 푹 쉬고 그를 따라 다시 자세를 잡았다. 그의 말이 맞았다. 처음부터 제대로 배워야 했다.
마음을 다잡고 검을 쥐는 다이나 공주님을 보며 휴도 마음을 가다듬고 마주 선 채 시선을 줬다. 이제 시작이었다. 얼마가 걸릴지 모르겠지만, 첫발을 내디딘 셈이었다.
‘부디 공주님에게 행운이 따르길.’
휴는 아주 천천히 자신의 행동이 눈에 그려지길 바라며 다이나 공주님에게 다가갔다. 다행히 총명한 공주님이 자신의 의도를 바로 알아채고 방어 동작을 했다. 가볍게 자신의 검을 받아치고 다시 자세를 잡는 모습을 보며, 자신의 걱정이 어쩜 기우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이른 아침의 차가운 공기가 두 사람 사이를 파고들었다. 시리도록 아픈 감정을 지닌 두 사람이, 서로의 감정을 공유하며 검을 맞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