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만나다, 반하다(2)>
"그래서 돈은 많이 벌었고?"
"공장 뛰면 벌 만치 벌어. 문제는 그 돈을 생활비에 쓰고 나니 남는 돈이 하나도 없더라 이거야."
"과외는? 너 항상 두세 개씩 했었잖아."
"과외 두 탕 뛰면서 공장도 뛴 거야."
작년 초 엄마가 갑작스럽게 일자리를 잃었다. 홀로 우리 집을 등에 지고 버텨왔던 엄마는 예상치 못한 실업 통보에 많이 좌절했다.
물론 나 또한 그 소식을 듣고 적잖이 당황했다.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며 버는 돈은 한 가정을 운영하기엔 많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나는 어쩔 수 없이 휴학했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아르바이트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대단하네."
"그래도 복학했으니 됐어. 우리 집도 안정을 찾았고, 근로장학생 하면서 받는 돈이 생각보다 꽤 세거든."
"근로장학생 될지 안 될지도 모르면서."
"안 된 적 없어. 내가 얼마나 피똥 싸면서 공부했는데."
근로장학생의 시급은 일반 아르바이트보다 압도적으로 높았다. 따라서 가난한 대학생의 처지에서는 근로장학생이 되는 것이 엄청난 이득이었다.
'언젠간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다' 혹은 '미래에 능력 있는 여성이 되고 싶다.'같은 멋들어진 문장들로도 내가 왜 공부를 열심히 하는지를 설명할 수 있었지만, 가장 코앞에 놓인 이유는 근로장학생이 되기 위해서였다. 이번 학기는 근로장학생을 향한 절실함이 여느 때와는 달랐다.
나는 면담을 나눴던 그 교수님과 가까워지기 위해 꼭 장학생이 되고 싶었다.
교수님을 만난 뒤로 다른 얘기를 하고 있어도 교수님의 잔상이 보였다.
입학 이래로 내가 우리 과에서 전액 장학금을 놓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말인즉슨 성적으로는 나를 따라올 학생이 없었다는 말이다.
내가 신청하는 근로장학생 자리는 언제나 나의 것이었다. 이번 학기도 예외는 없을 것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불안하긴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김은성 교수의 조교 자리는 나의 것이다.
"그래. 인간적으로 너는 근로장학생 시켜줘야지."
"너 시간표는 잘 짰어?"
"잘 짜고 못 짜고 할 게 어딨어. 나는 4학년이고 남은 학점도 얼마 없어. 올해는 임용 달려야지."
"… 나도 내년이 되면 너처럼 되겠지."
"응. 근데 넌 워낙 공부를 잘하니까 임용도 금방 붙을 거야."
"몰라.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래."
"헐. 나 수업 시작한다. 빨리 가야 돼."
나는 휴학을 했었기 때문에 나연이와 학년이 어긋나버렸다. 물론 시간표도 아예 달라져 버렸다.
조금 씁쓸하긴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서로 성인이고. 각자 가야 할 길은 따로 있었다.
2학년 때까지 똑같은 시간표에 항상 붙어 다녔었는데, 이제는 이별에 익숙해져야 할 시기가 온 것 같아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나연이가 떠나고 나는 다음 수업까지 한 시간이 더 남아있는 상태라서 우리 학교에서 위생상태가 제일 좋은 휴게실을 찾았다.
그리고는 김은성 교수의 수업시간이 언제 들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시간표 앱을 켰다.
슬프게도 오늘 시간표에는 교수님 수업이 없었다. 담당 과목이 통계학이네. 교수님께서 수업하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 모습은 정말이지 온몸의 감각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교수가 누구냐와 관계없이 항상 최선을 다해왔지만, 맹세컨대 통계학만큼은 내가 수학자가 되었다는 자세로 집중할 계획이다.
-띠링
입술을 앙다물며 이번 학기 성적에 관한 다짐을 하고 있을 때 핸드폰 문자 알림이 울렸다.
-한결 학생. 다른 학생들도 모두 면접을 마쳤는데, 아무래도 성적이 가장 높은 한결 학생을 뽑는 게 이치에 맞는 것 같네요. 조교로서 해야 할 일을 설명해줘야 하는데, 언제 시간이 가능한가요?
됐다. 세상이 나를 돕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 * *
나는 수업을 모두 마치고 교수님을 뵙기 위해 청운관으로 향했다.
사실 아직 개강하는 주라 수업은 거의 없었다. 모든 수업이 오티만 하고 마쳤지만, 나는 일부러 시간을 조금 벌기 위해 교수님에게 저녁 7시까지 가겠다고 말했다.
가방에 있는 콤팩트라도 한 번 더 두드리고 싶은 것이 그에게 잘 보이고 싶은 내 속마음이었다.
청운관 일 층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아주 어두웠다. 아직 겨울느낌이 완전히 가시지 않아서 해도 일찍 지는 편이었다.
돈이 없어 저녁을 못 사 먹었더니 배 속에서 밥 달란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배를 어루만지며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타일렀다. 그리고 곧 교수님 방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 똑똑
노크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학교 학생들은 해가 지기 전에 전부 다 학교를 벗어난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학교에 적막이 흐를 리가.
"교수님. 저 왔어요."
"그래요. 앉아요."
낮에는 하늘색 와이셔츠만 입고 있었는데, 지금은 저녁이라 쌀쌀해서 그런지 정장 재킷까지 걸치고 있었다.
교수님이 입고 있는 정장은 마치 그를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완벽한 모양을 자랑했다.
나도 모르게 교수님 쪽으로 손이 갈뻔한 걸 미친년이라 스스로 되뇌며 만류했다.
"개강이라 동기들이랑 놀고 싶을 텐데, 자꾸 불러서 미안해요."
"아…. 아니에요!"
나는 약간 과하다 싶을 정도로 부인했다. 황홀하다. 자꾸만 다시 듣고 싶은 목소리다.
내 유난에 교수님이 책상을 보고 있던 시선을 나로 옮겼다. 그리곤 몇 초간 내 눈을 응시하며 빙그레 웃었다.
나는 정말로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
"혹시 전에 조교 일 했었나요?"
"아뇨."
"아, 그래요. 괜찮아요. 어차피 교수님마다 조교에게 시키는 일이 전부 다를 테니까."
"뭐든지 시켜만 주시면 다 할게요."
"한결 학생 공부도 해야죠. 이 정도 성적을 유지하려면 종일 공부만 해야 할 텐데."
다시 한 번 열심히 공부한 과거의 나에게 격한 하이파이브를 했다. 고맙다. 과거의 한결.
교수님의 저 뿌듯한 미소를 보니 폭풍같이 공부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긴 것 같았다.
그의 자상함에 넋이 나간 나는 혼자만의 생각에 빠진 채 교수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로 공부는 어디서 해요?"
"학교 도서관이요."
"그렇구나. 따로 학원 다니거나 그런 게 있나요?"
생활비 없어서 휴학한 나에게 학원이란 사치는 가당치도 않았다.
"아뇨. 그런 건 전혀 없어요."
"동아리는요?"
"없어요."
"그래요……."
교수님이 인상을 쓰더니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화의 흐름으로 보아, 교수님은 나를 재정적인 문제로 청춘을 즐기지 못하는 안쓰러운 대학생으로 여기는 것이 분명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동정이기에 불편한 감이 있었지만, 그래도 그를 향해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약간의 적막이 흐르던 도중 눈치 없이 내 배는 요동치기 시작했다.
귀로 대충 데시벨을 측정해보자면, 이 방 옆방에 있는 다른 교수님도 들을 수 있을 정도의 굉음이었다.
"저녁 못 먹고 왔어요?"
"……네."
누군가 '쪽팔리다'라는 단어의 의미와 활용을 묻는다면, 단언컨대 그저 이 상황을 설명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민망한 마음에 애써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나저나 난 창피하면 귀까지 빨개지는데 진짜 큰일이다.
밥도 못 먹고 다니는 거지 이미지도 모자라서 홍당무 이미지까지 생길 판이다.
"조금 더 늦게 만나자고 하지 그랬어요. 밥은 먹고 다녀야지."
"……. 네."
조금 더 늦게 만나도 못 사 먹어요. 저 거지거든요.
"지금 나랑 면담하고 따로 약속 있어요?"
"아뇨."
"그럼 밥 먹으러 갑시다."
교수님은 자신의 책상 위에 있던 서류들을 소리 나게 정리했다. 아니 지금 뭐 하자고요? 같이 밥을 먹자고요? 나는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뭐해요. 밥 사줄 게 나와요."
전신이 홍당무가 된다 해도, 배 속에서 위장이 노래를 부른다 해도 나는 지금 너무나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