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사랑을 하는데 경계가 있다면 그건 아마도 마음이 만든 벽이 아닐까?
화려한 불빛으로 가득 찬 큰 사거리를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리고 어디에서 왔을까? 이곳에 내가 서있을 곳은 있을까?
모두가 걷고 있다.
나 역시 걷고 있다.
내가 갈 곳은 싸늘하게 식어있는 작은 방이고 그곳에 사랑은 존재하지 않았다.
[제1장] 반하는데 이유가 있어?
1화.
“왔다! 왔어!”
바닐라 시럽 펌프를 꺼내 닦는데, 민지가 저 멀리서부터 호들갑을 떨며 내게 손짓했다.
갈색 앞치마 끈이 포스기 사이에 끼여 있던 모양인지 그런 민지를 따라 포스기가 같이 내 쪽으로 기우뚱, 움직였다.
“억, 야, 조민지!!!!!! 포스기! 포스기!!!!!”
그런 내 말에 그제 서야 뒤를 돌아본 민지의 입에서도 짧은 비명이 나왔다.
간신히 손으로 밀어 넣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내 옆에 붙어 선다.
“8시 방향 유리창 쪽 13번 테이블에 앉아있음! 13번!!”
잔뜩 얼어있는 입술 사이론 잘도 복화술이 튀어나왔다. 그런 민지의 말을 따라, 힐끗 바라 본 방향으론, 단정하게 정리된 남자의 뒤통수가 눈에 들어온다.
세상에. 뒷모습이 저렇게 잘 생길수도 있구나. 들고 있던 시럽 펌프가 새어나가는 것도 모른 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옆에 바짝 붙어선 민지가 또다시 복화술을 보인다.
“이름 김시혁, 나이 25세. 재원대학교 경영학과 전설의 복학생, 일명 전복남.”
“와, 그걸 어떻게 다 알아왔어?”
“모르면 간첩이지. 그리고 너 저 남자 여기 올 때마다 입이 헤벌쭉, 늘어져선 침 나오기 직전까지 가는 것도 딱 보이는데. 이 언니가 힘 좀 썼다. 가서 말이라도 붙여보던가, 쫌!”
“........그래도, 너무 갑자기 그러면.........”
“세달 내리 뒤에 숨어서 지켜본 게 갑자기냐? 그게 갑자기야? 그러다 파릇파릇, 자라나는 신입생들이 꿰면 어떻게 하려고? 아니면 진짜 완전 쭉빵한 여자친......워. 야. 저 것 봐라?”
복화술로 떨어질 줄 모르던 민지의 입이 떠억 벌어졌다.
그런 민지의 시선이 카페 출입문으로 향해있었고, 그런 카페 문 뒤로 멀리서부터도 끝장나는 몸매와 그 위로 딱 붙은 타이트한 검은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들어섰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아, 누나! 여기요.”
..........잘생긴 뒤통수, 전설의 복학생이라는 남자가 부르는 소리에 그 자리로 가 앉는다.
“이런 제기랄, 내가 그럴 줄 알았어, 그럴 줄 알았다고!!!”
“.........”
“이 답답아, 그러니까 내가 복학 하자마자 잡아야 한다고 했지? 어!?”
“.........”
남자를 봤을 때 방방 뜨던 기분과 달리, 갑자기 온 몸에 힘이 쭉 빠지는 기분 이였다.
“..........그래, 저런 남자가 애인이 없을 리가 없잖아.”
“얘가 또또, 남의 복장 터트리는 소릴 확성기에 대고 한다. 야, 애인인지 아닌지는 아직 모르거든? 그리고, 애인이면 어때? 니가 저 언니보다 부족한 게,
...........많지. 그래 많은데, 야, 너도 너만의 매력으로 승부하면 되는 거 아냐? 빨랑 가서 테이블 정리 하는 척 하면서 뭐라고 하는지 엿들어봐, 어? 아, 빨리이!!!”
아예 내 손에 행주까지 쥐어주며 바 밖으로 밀어내는 민지 덕분에, 나는 결국 쭈뼛쭈뼛 카페 홀로 나와 테이블을 닦는 척 하기 시작했다.
슥- , 슥 -,
의심을 살까봐 일부러 더 멀리 돌고 돌며 테이블 하나하나를 벅벅 닦으니,
“.......그러니까요.”
서서히 두 남녀의 말소리가 들린다.
.........뭐라고? 잘 안 들려! 나는 더 열정적으로 근처 테이블 닦기에 열중했다.
쓱싹! 쓱싹!
“이게 뭐니, 주말에 내가 학교까지 나와야 하는지, 진짜.”
“조별과제 때문에 죽겠죠, 누나도 그 교수님 수업 드랍 못했구나,”
어쩜, 평소에 아메리카노 한 잔이요. 하던 목소리가 무척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목소리까지 잘생겼다. 게다가 저 다정한 말투는 가히 완벽한 남자라고 정의할 만했다.
“학생, 이거 좀 버려줘요, 내가 급하게 나가봐야 해서.”
쓱- , 쓱 -,
“........”
“학생?”
진짜..... 멋있어, 게다가 한 가지 더 기쁜 소식이 있다면, 이 둘은 사적인 만남이 아니라, 같은 교수님 아래, 같은 조별과제라는 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거였다!!!!! 세상에!
“아, 학생!!!!!!!!”
“완전 조......., 네?!!?!?!?”
카페를 가득 채우는 고함소리에 놀라 바라보니, 무섭게 생긴 할아버지가 쟁반을 거칠게 내민다. 덕분에 순식간에 내게 카페 안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짐을 느꼈다.
“젊은 사람이 정신을 어디다 팔고 다니는 거야? 똑바로 안 해?!”
“아......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쟁반은 저쪽에 따로,”
얼떨결에 쟁반을 드니, 그런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홱 돌아서 가버리는 할아버지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시선 중 하나가 남자일거란 생각에 얼굴이 빨개졌다.
“어머, 저 할아버지가 노망이 났나, 카페 직원이 무슨 쓰레기통도 아니고...”
“그러게요. 괜히 소리나 지르고. 아무튼, 누나도 주제 정한 거 있으면...”
아, 이런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은데 그런 나를 두고 대화하는 남녀 소리까지 다 들린다.
창피한 마음에 쟁반을 들고 자리를 빠져나가기 위해 걸음을 재촉해서 걸었다.
괜찮아, 아직 내 얼굴 못 봤어, 괜찮아........ 하고 스스로를 위안하며 홀을 가로질러 걷는데,
퍼억-
“으악!”
홀 밖으로 삐져나온 누군가의 긴 다리에 걸려 그대로 몸을 앞으로 꼬꾸라트렸고,
촤르륵- ,
“어머!!!! 시혁아!!!!!”
간발의 차로 여자의 앙칼진 소음이 카페를 울렸다. 그리고 눈앞으론..........
“.........”
뚝- 뚝- ,
남자의 앞머리에서 갈색의 커피국물이 방울방울. 다부진 어깨가 그대로 드러나는 하얀색 스웨터 위로도 마치 먹물로 절여진 한지처럼 물들어 있다.
저 멀리서 이 모든 걸 지켜보고 있던 민지의 입모양이, 쉣! 하고 단말에 멈췄다.
“으아아아아!!!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해요, 어떻게 해, 다 젖어서, 엄마야,”
나는 그제 서야 파악되는 상황에 일단 하고 있던 앞치마로라도 그의 스웨터를 박박 닦았다.
“후우, 괜찮, 괜찮아요.”
“아니, 그래도 이거 얼른 빨아야 얼룩이 안남을....!”
“아니, 괜찮다는데!!”
탁- ,
허둥지둥 정신없이 닦던 내 손길은, 남자의 차가운 손에 의해 미련 없이 떼어졌다.
짧은 정적이 남자와 내 사이를 채웠고 남자 앞에 앉아있던 여자는 그런 우리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하하, 괜찮은데, 자꾸 더 미안해하시니까, 민망해서 그래요 민망해서.”
남자가 빙긋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저는 괜찮아요, 직원분이 더 걱정이네요, 그런 일을 당하셔서.....”
금세 따뜻한 미소로 변한 남자의 얼굴이, 아까보다 한층 더 잘생겨져선 아예 빛이 났다.
“아 글쎄, 걱정 말래두, 나도 다 생각이 있거든요~”삑삑삑- 잠금 버튼이 오래된 모양인지 잘 먹히질 않는다. 컵라면이 든 봉지를 쥔 손을 바꿔 쥐며 다시 꾹, 꾹, 누르니, 그제 서야 뻑뻑한 문이 열린다.
“아, 엄마! 요즘엔 거 학자금 이자도 얼마 안한대, 나라에서 하는 건데, 뭐 설마 잡아가기야 하겠어? 걱정 붙들어 매셔, 졸업하구 바로 취직하면 등록금 대출도 금방이래, 금방.”
띠릭-
낡은 문이 등 뒤로 닫히며 작은 소음을 냈다. 잘 벗겨지지도 않는 신발을 가지고 실랑이 하랴, 등록금 걱정에 전화하는 엄마와 실랑이 하랴 정신이 없다.
“응, 나 이제 집이야, 아부지는. 주무셔? 그래, 엄마도 그러니까 걱정 말고 쉬어, 알겠지. 응? 내일 또 전화 할게, 응.”
통화를 끝내자마자 그대로 침대로 철푸덕 몸을 뉘였다.
“........아아, 이놈의 지긋지긋한 돈은 언제까지 따라다니려나......”
학자금에, 대출 이자에, 고시원 월세며 핸드폰 요금까지......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세도 줄어들기는커녕 늘어나기가 끝이 없다. 멍하니 누워 검은 벌레가 몇 마리 낀 형광등을 바라보고 있으니, 새하얀 빛이 꼭,
‘저는 괜찮아요, 직원분이 더 걱정이네요, 그런 일을 당하셔서....’
환하게 웃는 남자와 닮았다. 어쩜, 커피로 물든 스웨터는, 누가 보면 일부로 천연 염색을 한 거라 해도 믿을 만큼, 김시혁이란 남자는 완벽했다. 정말이지 딱, 내 이상형인데.......
“병신이지, 병신이야. 이놈의 손모가지, 병신 손! 병신 손!”
처음 말 붙인 기회를 이렇게 날려 먹냐, 으이구, 등신, 등신!
손을 천장으로 쭈욱 뻗어 남자의 손에 닿았던 내 손가락을 하나하나 살폈다. 닿을 때 분명 후끈후끈 해졌던 것 같은데. 괜히 웃음이 씩 나온다.
“.....잠깐,”
아니지, 아니야. 어쩌면 이건 더 좋은 기회일지도 몰랐다.
나 때문에 더러워진 스웨터를 드라이 크리닝 해주겠다는 빌미로 다가갈 수도 있지 않을까?
다시 한 번 사과하면서, 이왕 이렇게 된 거 말도 한 번 더 붙이고, 운이 좋으면 그의 핸드폰 번호까지도........,
“푸흑, 난 몰라, 어떻게 해!!!!!!!!”
상상만 해도 손가락 발가락이 엿가락처럼 사정없이 늘어나는 기분이다.
“나는 진짜 경악했다는 거 아니냐. 진짜 화난 것처럼 보였는데,”
“아니야, 나한테 웃으면서 괜찮냐고 물어봐 줬다구.”
“아니, 그거야, 뭐, 앞에 앉아있는 여자한테 잘 보이고 싶었다거나...... 뭐, 그런,”
“야 조민지. 너 누구편이냐? 어제는 먼저 다가가네 마네 떠밀더니. 오늘은 또 왜이래?”
“아니 내 말은...... 그 남자, 왠지 잿밥에 관심이 더 있어보였단....”
“어!”
민지와 학식을 먹고 올라가는 길에, 건너건너 앞으로 걸어가는 익숙한 잘생긴 뒤통수가 보였다. 벌써 그 모습에 웃음이 입가에 걸렸다.
“나도 매력 있다며, 충분히 꼬실 수 있다며! 기다려라. 내가 당당히 가서.......!”
민지의 만류에도 뿌리치고 호기롭게 남자에게 다가서는데, 그런 내 앞으로 여러 명의 여자애들이 우르르 앞서 가로막았다.
“선배님!”
“어? 보배네. 안녕, 세희도 안녕.”
“시혁 선배님! 저희 밥 한번만 사주세요, 네?!”
“맞아요, 저두, 선배님이랑 같이 밥 먹고 싶은데, 지연이네만 사주시구!”
“.......”
나의 위치는 그런 남자를 둘러쌓는 새내기들로 인해 그들 뒤를 맴도는 전형적인 질척대는 구여친 포즈처럼 올렸던 손을 천천히 내려 다시 주머니에 곱게 넣었다.
남자는 그런 상황에 익숙한 모양인지, 내게 보여줬던 웃음을 그대로 보이며 새내기 무리에 끼여 사라졌다. 내 옆으론 민지가 다시 바짝 붙어 선다.
“.......야, 거봐. 뭐랬냐. 상희야, 이러지 말고, 우리 다른데서 찾아보자, 엉? 이 언니가 책임지고 진짜 멋진 놈 하나........!”
“민지야.”
“응?”
“너 유아 교육과 잖아.”
“그, 그렇지?”
“.........위, 아래 학번 다 여자잖아.......”
“........그, 그렇지.......”
어쩐지 나보다 민지의 어깨가 더 축 내려앉았다.
“그동안 왜 안 왔어요? 상희씨,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네?”
“은근히 내 주위 맴돌았던 거 다 알아요. 나는 상희씨가 조금 더 용기 내주길 기다렸는데.”
“아, 그, 그건, 시혁씨에게 실수한 것도 있고..... 게다가, 주변엔 여자 친구든, 남자친구든 늘 바글 바글 거리니까..... 다가가기가.......”
진짜 그랬다. 요 며칠간 지켜본 남자는 확실히, 인기가 많았다.
드라이 크리닝을 핑계로 물어물어 찾아간 남자의 강의실 앞에선 동기들에게 둘러싸여 나가는 통에 말 한마디 못 걸었고, 시험기간이라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인 도서관 자리도 그를 따라다니는 새내기들이 맡아주는 통에 턱턱 앉았다. 물론 나는 자리가 없어 다시 돌아가야 했던 일이 허다했지만.
학교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도, 꼭 ‘특명 김시혁 옆자리 사수하기’ 대회에 나간 것처럼, 식판을 들고 기 싸움 벌이는 여 학우들을 본 것만 수차례였다.
“야, 이제 그만해, 너 진짜 그러다 스토커로 끌려간다니까?!”
그렇게 그의 주변을 맴도는 나를 보다 못한 민지는 학교폭력 예방단체에 전화를 넣겠다고 난리였다. 다 부질없는 짓이라고.
“난, 상희 너만의 매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너만의 매력.”
“......매력이요? 제 매력? 어, 음........ 제가, 아, 악성곱슬 인데.... 이것도.....포함되나요.......?”
“악성 곱슬이니? 예쁘다. 나는........ 이런 악성곱슬이 좋더라.”
그러나 봐라! 결국엔, 이렇게 내 매력을 먼저 알아봐 주는걸! 시혁오빠는 내 머리카락에 코를 묻고 흐음, 하고 향기를 맡았고, 그리고 자연스럽게 우리는 얼굴을 맞대고.......
쿵-!
“으악!”
번쩍. 눈이 떠졌다. 다리는 침대 밖으로 뻗쳐 장롱 문과 부딪혀 통증을 만들어내고 있었고, 좁은 고시원 침대 사이로 낀 머리카락이 두피를 잡아당겼다.
눈앞으론 빛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아 초라하기 짝이 없는 내 방 전경이 보였다.
젠장, 꿈까지 나오다니. 안 그래도 이리저리 쫒아 다닌다고 나를 스토커 취급하던 민지의 말은 안 들리는 척, 무시했었는데. 이처럼 꿈에도 나와 버리고.
“.......하....미쳤어, 이상희....”
빼도 박도 못하게 밤낮없이 그 남자 생각만 하는 모양새였으니, 이 쯤 되니 나조차도 내가 스토커인가, 하는 의심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내 나이 스물 셋. 좋아하는 남자랑 연애는커녕 말도 제대로 한번 안 섞어봤는데 스토커가 되긴 싫었다. 아무리 주변에 사람이 많으면 뭐해? 정작 애인은 아직 없다는데. 아니, 게다가 삼 개월, 아니 이번 달까지 4개월을 내내 쫒아 다녔는데 고백한번을 못해보는 건 억울했다.
그 남자는 특별하니까, 분명 나를 알아봐줄지도 모른다. 나만의 매력, 유일하게 내가 가지고 있는 그런 것들. 아 물론 여기서 악성 곱슬은 제외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비장하게 화장대 앞에 앉았다. 오늘 결단을 내고야 말겠다.
.........아아, 맞다. 화장하기 전에 먼저 씻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