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모두 출입증을 준비하시오! 출입증 상단 색깔로 신분을 확인하겠소!”
문지기의 위엄 있는 목소리가 보기만 해도 웅장한 성문 앞을 울리며 퍼졌다. 줄 지어 서있는 사람들의 옷차림 색뿐만 아니라 피부 색깔, 눈동자 색깔까지 다양했다. 리더스 제국의 상징을 나타내는 백색에 은색 자수가 담긴 깃발은 거대한 규모의 제국을 나타내듯 성문 앞에 줄지어 서있는 사람들을 모두 덮고도 남을만한 크기로 휘날렸다.
반짝이는 은색의 갑옷을 입고 있는 문지기 사내는 보통의 흔해빠진 다른 제국의 문지기들과 다르게 깔끔한 외모였다. 수더분한 모양이 아닌 깔끔하게 각 잡혀 정리된 수염과, 푸른색으로 빛나는 눈동자는 산호색을 띄고 있었으며, 입고 있는 은색의 갑옷은 새하얀 조개 빛처럼 사내가 움직일 때마다 작은 빛이 반짝거렸다.
“자고로 사내들은 리더스, 리더스 중에서도 오딘으로 오라던 말이 맞구나!”
“내 눈에게도 보이기 미안한 배불뚝이 사내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러게 내가 뭐라고 했어? 이곳에 도착하는 순간 그런 배불뚝이에 말라비틀어져 가뭄이 이는 내 마음은, 저 잘생긴 남자들로 인해 홍수로 댐이 범람 하는 수준이라고.”
제국에 들어가기 위해 외성 벽에 서있던 수많은 여성들은 그런 문지기의 외모에 저들이 입고 있는 얇은 천조각의 드레스를 살랑거렸다. 높은 산기둥을 타고 뻗은 외성곽 아래로도 수많은 건물과, 어느새 자그맣게 보이는 사람들이 시장을 이뤄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 마을 곳곳에도 리더스 제국을 알리는 은색의 깃발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방문 목적이 무엇인지 말하시오.”
“성 안쪽에 있는 무역상과 거래를 하고 있어요.”
“무역상의 이름을 말하시오.”
세계 한가운데 위치한 이점을 이용하여 각국에서 드나드는 무역상들은 꼭 한 번씩은 리더스 제국의 수도인 오딘을 거쳐 가야 했기에 문지기들의 또 다른 일은 그들의 무역상을 찾아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아.......엄......음......”
그렇기에 이런 식으로 단순히 성을 구경하려는 목적이나, 외성 안쪽에 형성된 고급형 시장을 구경하려는 여자들은 쉽게 곤란에 처하곤 했다. 여타 제국들이라면 그런 여인들은 이미 문지기로 인해 저 멀리 먼지바람에 뒹굴고 있었겠지만,
“젠. 젠 루이스. 왕국으로 들어가는 드레스를 만드는 재단사와 거래하는 이요.”
으레 그런 여인들을 위해 뒤에서 한 번씩 거들어주는 사내들이 있기도 했다. 리더스 왕국의 시민임을 증명하는 은색 패를 든 사내였다. 흔해빠진 천으로 만든 옷이나. 식자재 봉투 속에 든 부피가 큰 빵 등은 한눈에 봐도 소작농이나 되는 신분 이였음에도 건장한 체격이나 젠틀하고 멋진 미소는 메마른 여인들의 댐을 마구 부쉈다.
“감사해요.”
“뭘요.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들이 오딘에 와준 것만으로도 감사할 뿐이죠.”
사내의 미소에 홀린 듯 외성곽을 넘어 따라 들어가자, 딱 봐도 고급스러운 상점들이 즐비해있고, 살랑살랑 화려함이 가득 수놓인 드레스를 입은 여인들은 물론 보기만 해도 눈이 즐거운 장정들까지 모든 것이 완벽해보였다.
왜 리더스 제국이 그토록 온 세계를 휘어잡고 있는지 알 것만 같았다. 그런 성 입구를 따라 멀리 보이는 백색의 궁이 한눈에 보였다. 엄청난 규모의 궁 크기는 그런 오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였다. 여인들의 눈이 그 한곳에 모이자, 그런 시선을 따라가던 남자가 알만하다는 듯 싱긋 웃었다.
“화이트 골드 성.”
“네?”
“리더스 제국의 단 하나뿐인 왕국이죠.”
거대한 규모와, 백색의 궁 벽에 새겨진 은색 자수가 태양에 반사되어 더욱 빛을 냈다.
***
탁탁탁-
분주한 발걸음이 새하얀 대리석 바닥 위로 울렸다. 검은색의 긴 모자를 쓰고 있는 사내 무리들의 발걸음 소리가 길고 긴 정원을 지났다.
백색의 작은 분수대가 푸른 정원 사이사이에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고, 몇 개의 길쭉한 나무들이 만든 그림자가 그런 바닥 위로 늘어지듯 뻗어있었다. 그 외에도 각양각색으로 물든 꽃들은 빛을 받아 더욱 자신의 색을 짙게 만들며 깊은 향기를 뿜어내며 신관들의 코를 간지럽혔다.
졸졸 흐르는 물줄기 소리와, 옅은 바람에 부스스 흔들리는 나뭇잎들의 소리는 한데 엉켜 고요하면서도 생기 있는 정원을 만들어냈다. 곧게 뻗은 나무의 그림자조차 생명력을 얻을 듯 활기가 넘치는 공간이,
탁탁탁-
무거운 구둣발 소리로 가득 들어찼다.
“아가스. 조금 있으면 정오취침을 할 시간이야.”
여린 꽃잎처럼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창문 밖으론 그 끝을 모르고 푸르게 펼쳐진 창공과 두어마리의 새들은 저들끼리 발장난이라도 하는 것처럼 푸른 하늘을 가르며 만났다 떨어 졌다를 반복했다. 정원 한 가운데 놓인 커다란 호수 속 분수대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방울들은 밤이 아닌 낮에도 하늘을 수놓으며 반짝였다.
“아가스?”
그런 창문을 한참 바라보던 고개가, 재촉하듯 들리는 목소리에 돌아왔다. 색 없는 입술과 초점 없이 멍한 눈동자가 곧대로 보였다. 이토록 아름다운 얼굴도 색깔이 하나 보이질 않으니 그저 흑백에 불과한 명화 같은 모습 이였다. 하나뿐인 딸의 얼굴이 웃는 걸 본적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없는 황비의 얼굴에도 빛이 사라졌다.
“알아요. 신관들이 오기전에 잠들어야 한다는 거.”
“.......”
“하지만 오늘은 하늘이 이렇게나 예쁜걸요. 눈을 깜빡이기 조차 아쉬울 정도로. 잠들어 버리면 검게 변해있을게 뻔한데.”
“.......”
작지만 단호한 아가스의 말엔 뼈가 있었다. 한 제국의 황비인 자신 조차 아픈 아가스에게 아무것도 해줄 것이 없어 가슴이 답답할 뿐 이였다. 태어날 때부터 유독 몸이 약해 잔병이란 잔병은 모두 겪으며 이때까지 버텨왔다. 꽤 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게 용할 정도였다. 그마저도 아가스가 공주의 신분이기에 가능한 일이였다.
아가스가 천천히 감는 눈 위로 하늘위로 작게 날던 새의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사라졌다.
곱게 감긴 눈 위로 늙은 대신관의 주름진 손이 왔다 갔다를 반복했다. 검은 그림자가 아가스의 긴 속눈썹에 걸리진 않을까 싶을 정도로 감긴 얼굴은 아름다웠지만, 핏기라곤 찾아볼 수 없으니 꼭 골방에 틀어박혀 있는 오르골 속 모형과 같았다.
“어떤가요. 오늘은 그래도 제법 말도 많이 하고....”
여린 아가스 만큼이나 가녀린 황비의 얼굴에 짧게나마 기대가 들어섰다. 늙은 신관의 고개가 양옆으로 내저어졌다. 고운 얼굴 위론 수심이 가득하면서도 애써 웃음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이 보였다. 아가스의 희미한 정신이 그런 황비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삐- 하는 소리와 함께 멀어졌다.
삐이-
아가스의 귓가로 알 수 없는 소리가 더욱 커졌다. 눈을 뜰 기운조차 없는지 무기력하게 누워 숨을 내쉬는 걸로 자신의 존재를 대신했다. 대신관은 간 걸까. 벌써 밤이 된 걸까? 아가스의 생각을 괴롭히는 알 수 없는 소리가 잦아들었다.
“벌써 일주일 이예요. 이런 적이 없었다구요,”
“진정해요, 프리드리아. 아가스는 깨어날 거요, 분명히! 늘 그랬잖소.”
그제 서야 자신을 둘러싸고 들리는 대화가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비음 가득한 어머니의 목소리와 늘 그렇듯 단호한 강단이 묻어나는 말투의 아버지. 그저 눈을 감았다가 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시간은 일주일이 흐른 모양 이였다. 눈을 감았다 뜨니 일곱 번의 푸른 하늘과, 일곱 번의 별빛 가득한 밤이 지나있었다.
아가스는 이 모든 것에 신물이 나기 시작했다. 희미하게 뜨인 눈으론 아버지의 품에 안겨 울고 있는 어머니가 보였고, 그 옆으론 무얼 그리 심각하게 이야기 하는지, 아가스의 두 명의 오빠인 휀과 아르안이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뒤론 지겹게도 보았던 늙은 신관과 자신의 시중을 드는 시종들이 몇몇 보였다. 자신의 눈 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지겹고 신물이 났다.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는 두 명의 오빠들은 꼭 자신의 장례를 모의하는 것만 같았고, 그 뒤로 서있는 신관이나 시종의 표정 없는 얼굴은 약해빠진 공주의 시중을 들어주다 하루가 다 가버리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자신들의 삶에 대한 회의감으로 가득 찬 것만 같았다.
‘죽고 싶어.’
아가스는 느슨히 뜬 눈동자를 창문 밖으로 옮기며 생각했다.
‘얼른, 하루빨리 죽고 싶어.’
창문 밖으론 아가스가 마지막으로 본 그토록 새파랗던 하늘은 온데간데 없이 온 세상에 암흑이 깔린 것처럼 어두웠다.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만 같았다.
‘당장 나를 데리고 가줘, 누구든. 듣고 있는 거야? 날 그만 데리고 가라구, 이 겁쟁이야.’
아가스는 속으로라도 자신이 알고 있는 최대한 나쁜 말들을 쏟아내며 눈을 감았다.
창문 밖으론 그런 아가스의 말에 반응하듯 사나운 천둥이 우르릉 거렸다. 투둑투둑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르르릉- 콰광!
“하-!”
찰나의 번쩍임이 아가스의 방을 가득 채우다 사라졌다. 포악한 소리에 놀란 아가스의 눈이 번쩍 뜨였다. 날카로운 번갯불이 여전히 아가스의 창문 밖을 배회하듯 번쩍거렸다. 주변은 어두웠고, 시중들 또한 모두 물러 난건지 넓고 어두운 방안엔 아가스 혼자 뿐 이였다. 쿠르릉, 하고 온 하늘을 울리는 천둥소리에 완전히 잠에서 깬 아가스가 겨우 몸을 일으켜 창문 밖을 바로 보려 애썼다.
유리창을 세차게 때리는 빗방울 소리가 거세졌다. 부들부들, 창문틀이 그 힘에 못이겨 마구 움직였다. 아가스는 자신의 몸에 남은 힘을 모조리 쥐어 짜내어 일어나 테라스 창문을 열었다.
맡아본지 오래였던 시린 바깥 공기가 기다렸다는 듯 아가스의 얼굴에 닿았다. 강한 바람에 은색의 잠옷과 아가스의 긴 머리카락은 뒤엉키듯 흩날렸다. 테라스로 한발자국 내딛자, 이번엔 바람대신 차가운 빗방울이 그녀의 메마른 입술을 시작으로 전신을 적셔가기 시작했다. 온몸으로 느껴지는 생경한 빗방울에 아가스는 젖은 탄성을 내질렀다. 살아 있다는 게 이토록 좋은 기분 이였던가.
“세상에, 공주님!!!!!!!!!!!”
테라스에 서있는 아가스의 귀로 누군가의 비명이 들렸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조차 이토록 잘 들리니, 분명 살아있다는 것은 엄청난 것 이였다. 테라스에 서있는 백색의 아가스가 손을 흔들었다. 저 아이의 이름이 뭐였더라. 뭐라고 불러줘야 하지? 하고 짧은 고민을 하는 찰나,
하늘에서 커다란 빛이 번쩍였다. 어둠이 깔린 온 세상이 일시적으로 번쩍였다. 그 눈부심에 잠시 감았던 눈이 떠지고, 그런 시종의 시야론 테라스에 서있던 아가스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아니, 자세히 보니 백색의 아가스가 그대로 쓰러져 있었다.
“꺄악!”
시종의 찢어질 듯 한 비명소리 뒤로, 콰광-! 하고 뒤늦은 천둥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