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리더스 왕국의 거대한 규모만큼이나 그 크기가 웅장한 성은 오딘의 한가운데 위치해 있었다. 오딘으로 들어가는 문이 열리자마자 보이는 궁전은 백색의 둥근 아치와 은빛 문양은 리더스 왕국 특유의 깔끔함과 단조로움 절제된 화려함을 보였다.
그 길을 지나다니는 시종들 역시 하나같이 깔끔한 외모에 단정한 모습을 하고 있었으며, 두르고 있는 백색의 옷 역시 약속이라도 한 듯 구김 없이 곱게 다려져 있었다.
쾅-!
누군가 책상을 내려치는 커다란 마찰음이 궁전의 커다란 창문 사이로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졸졸 흐르는 분수대에 앉아 목을 축이던 다람쥐 따위의 작은 짐승들이나, 하늘 높이 뻗어있는 나무 사이사이에 앉아있던 산새들이 겁에 질려 파드득 그 자리를 비워냈다.
창문 사이로 언뜻 궁전의 내부가 보였다. 길고 넓은 복도는 얼마나 깨끗했는지 그 위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의 불빛이 그대로 비출 정도였다. 천장으론 금색 바탕에 깔린 파란 하늘과, 화려한 금장의 장식이 어우러져 천장 벽화 속 백색 옷을 입고 있는 신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나타내고 있었고, 그 사이사이론 긴 화살이나 나팔을 들고 앙증맞은 날개를 금방이라도 펄럭일듯한 아기 신의 형상 또한 틈 없이 화려함을 표현하고 있었다.
금빛의 천장 테두리가 백색과 은색을 두고 유려히 흐르며 크기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복도를 따라 쭉 이어지고, 천장에 높게 매달린 샹들리에의 수정들이 저들 빛도 뽐내기 바빴다. 화려한 수정 빛이 반사되어 매끈한 바닥은 물론 온 복도를 반짝일 무렵, 이내 짙은 고동빛의 두터운 문이 열리며 무거운 책을 잔뜩 들고 있는 늙은 신하 몇 명이 빠져나갔다.
들고 있던 책은 어찌나 무겁고 양도 많은지, 그런 늙은 대신들이 나가는 도중에도 몇 번이나 걸음을 멈췄다.
“그러게 내가 미리미리 들어 나르자 하지 않았소! 우리들이 언제까지 젊지만은 않으니, 이제 이것도 젊은 대신들을 시켜야겠소.”
“젊은 대신들도 이미 뒤에서 따라오고 있습니다.”
얼굴이 잔뜩 빨개진 채로 간신히 걸음을 옮기던 늙은 대신의 뒤론 집무실의 열린 문 밖으로 줄줄이 빠져나오는 젊은 신관들이 더 많은 양의 책들을 낑낑대며 따라나서고 있었다.
쿠당탕-!
그중 어느 어리숙한 신관이 발을 헛디뎌 넘어지면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곤두박질 친 책들이 넓은 복도 구석구석으로 퍼졌다.
“이게 무슨 짓이냐! 이 책들이 언제 또 어떻게 집무실에 들어갈 줄 모르는데, 이리 섞여버렸으니!”
“죄, 죄송합니다!”
“고대 농수로 발전사? 이건 도대체 왜 여기 있는 거야! 분명 황제께서는 새로 경작된 토지수치를 적은 통계지를 바라셨는데!”
“그, 그게.... 경작된 토지 수치를 보시더니 농업관련 정책이 부족하시다면서....... 일주일을 꼬박 지새우며 읽으셨습니다.”
“그럼 읽으신 책들은 바로바로 정리를 했어야지, 이렇게 매번 온 신관들이 불려나와 책을 날라야 한단 말이냐! 도대체 다들 게을러 빠져서는!”
“.......신관님, 이게 다 황제께서 어제 읽으셨던 책들입니다.”
“뭐, 뭐야?”
“황제께서 바로 어제 하루 만에 읽으셨던 책들입니다.”
늙은 신관은 복도를 줄지어 나가는 젊은 신관들과 시종들이 하나같이 양손 가득 들고 있는 책들을 바라보다 기가 찼다. 도대체 이게 가능한 일인가. 리더스 왕국의 역대 황제들이 죄다 지독한 일벌레에 앉으나 서나 업무에만 빠져 있다는 것은 왕국 내에서도, 아니, 단 한번이라도 리더스를 방문했던 사람이라면 다들 알고 있는 사실 이였다.
근면하고 성실한 자만이 리더스의 황제 자리에 앉을 수 있고, 그 청정 수렴한 계보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아마 그 누구도 이정도 일 것이라곤 상상을 못할 것이다.
쾅-!
다시 한 번 열린 문틈 사이로 책상의 거친 마찰음이 들렸다.
“지난해부터 올 해까지 도시로 이주한 자들의 생활과 계급 상태를 적은 책이 왜 아직도 내 손에 들어오지 않는 건가!”
“그, 그게, 아직 1년이 완전히 지난 것도 아니옵고, 지난달까지 도시로 옮겨온 이주민들의 출입증까지 일일이 가지고 계시다 하시기에,”
하얗다 못해 은색에 가까운 풍성한 머리카락과 윤기가 흐르는 수염을 거칠게 쓰다듬는 손이 못마땅함을 가득 담아 쾅- 쾅-! 하고 울려댔다.
“귀족들과 토지 소유주들이 자꾸만 도시로 이주하니, 그들이 오딘은 물론, 그들이 떠나옴으로 발생되는 피해까지, 우리들은 한발자국 앞서서 생각하고 대비해야 한다는 걸 잊었소! 그것이 나와 국가 녹을 먹는 대신들이 해야 하는 일임을!”
무섭게 소리치는 황제의 옆으론 표정 없이 무서운 속도로 쌓인 책들을 독파하는 첫 번째 왕자 휀이 있었다. 저 속도라면 분명 내일 아침이 오기도 전에 기껏 집무실로 들여온 수많은 책들을 다시 내보내야 했다.
“그, 그게......”
늙은 대신이 머리를 조아렸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던 참 이였다. 이미 나라가 가지고 있는 자료들은 모조리 읽으셨습니다, 하고 사실대로 말하면 자신의 진짜 머리가 바닥에 굴러다닐 수도 있었다.
그때였다.
벌컥-!
“황제시여!!!!!”
황제의 집무실이 요란하게 열렸다. 집무를 할 때 방해 받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황제임을 알기에 이는 신관이 제 목숨을 걸고서 들어온 것과 다름이 없었다. 다급히 무릎을 꿇는 신관은 자신을 차갑게 내려 보는 황제에게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소리쳤다.
“공주님께서, 아가스 공주님께서.......!!!!!!”
어린 신관의 말과 함께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황제와 더불어 그 옆에서 무표정으로 책만 읽어 내려가던 왕자 휀도 함께였다.
“무엇이냐! 무슨 일이야! 아가스, 우리 아가스가 왜!”
황제는 머릿속으로 가장 먼저 드는 끔찍한 생각을 애써 지워내려 많은 노력을 해야 했다. 파리한 입술과 생기 없는 눈동자, 이미 오래전에 잃어버린 웃음....... 그마저도 며칠 전 지독하게도 내린 비를 맞고 쓰러지며 남아있던 숨마저 하루하루 옅어지고 있는 중이였다.
그런 아가스가, 아가스가.......!!
“황제시여!!!!”
“아버지!!!!!”
황제가 집무실을 나서다 말고 비틀거렸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화이트 색의 기둥과, 맑은 백색을 띄는 수정 빛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복도 가득 깨질 듯 한 소녀의 비명이 들어찼다. 어찌나 그 소리가 앙칼지고 컸는지, 복도에 나란히 세워진 촛대 위 촛불은 물론, 레이스가 엮인 화려한 침실 커튼까지도 흔들흔들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그런 방 안으론, 삼면이 새하얀 커튼으로 막혀있는 상자와, 그 앞으론 열 댓 명의 시중들이 안절부절 못하고 몰려 서있었다.
“공주님, 왜 그러세요!!”
“나가요!!!!!!다들 나가라니까요!!!!!!!!!!”
“공주님, 제발, 어서 커튼을 거두셔요!”
“아니,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예요?!!? 말했잖아요! 지금 나는 한 시가 급한 상황이라고!!!!!”
“저희도 한시가 급한 상황 이예요, 이대로 커튼을 열지 않으시겠다면, 차라리 공주님을 제대로 모시지 못한 저희를 죽여주세요, 네?”
“맞아요, 죽여주세요, 공주님!”
“죽여주세요! 흑흑,”
“.......으아아아아!!!!아니, 그쪽들은 느닷없이 왜 죽여 달라는 건데요! 미치겠네, 진짜!!!!”
옆에서 끌어온 커튼으로 뚫린 한쪽 면을 간신히 막고 있는 여자의 손이 바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그런 여자가 들어가 있는 간이 형태의 네모난 상자 앞에 서있는 열 댓 명의 시종들이 저들끼리 어찌할 바를 모르며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네모난 상자 안에 들어가 있는 아가스는 불안한지 손끝을 잘근잘근 씹어대며 빼꼼, 커튼을 거둬 시중들을 훔쳐보다 말기를 반복했다. 이상하다, 분명히, 분명히 시혁 오빠와, 편의점 앞에서 우산을 쓰고 있다가, 번쩍- 하는 빛과 함께 찌리릿.
전기통구이에 통째로 들어갔다가 나오는 치킨들의 기분이 바로 이런 걸까.
“헉!”
뻥하고 터지듯 뜨여진 눈과, 그대로 보이는 천장은 어쩐지 평소에 보던 노란 색의 고시원 천장과는 달라서 의아했다. 누워있는 그대로 눈동자만 뎅구르르 굴려도, 고시원의 얇은 판자벽이나 갑갑하게 늘어선 책상과 비좁게 쌓여있는 제 옷가지들은커녕 온통 새하얀 벽과 은색 빛 문양이 가득 찬 방이 보인다. 꿈인가?
음. 어째 기분이 묘한데.......? 꿈이 이렇게 생생할 수가 있나?
하는 천진난만한 생각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여니 보이는건,
“........와아,”
끝이 보이지 않는 드넓은 정원으로 곳곳에서 뿜어져 올라오는 수정 빛의 물줄기와, 구름 한 점 없이 시야를 하나 가리지 않는 하늘전경. 서울 고시원에선 창문을 열었을 땐 하늘은커녕 반대편에 위치한 고시원에서 시원하게 탈의한 나체만 보지 않아도 큰 행운 이였거늘.
끝없는 창공으로 내리쬐는 햇빛이 얼굴에 닿자 절로 감기는 눈 위로 부숴지 듯 내리쬐는 오렌지 빛이 눈두덩이를 가득 덮는다. 꿈 치곤 제법, 아니, 매우매우 나이스 땡큐한 꿈이다.
아, 여긴 근데 화장실이 어디지.
.......음? 잠깐만. 꿈에서도 소변이 마렵나? 하는 생각은, 두 눈을 시퍼렇게 뜬 열 댓 명의 시종들 앞에서 볼일을 보는 상황까지 이어지더니,
“으아악!! 도대체 왜 남의 볼일까지 수거해가는 건데요! 으억, 제가 할게요, 제가 한다고요오!!!!!!!!!”
결국 이 사태까지 만들고야 말았다.
이건 아무리 꿈이라고 해도 좀 너무....... 심하게, 생생한데?
게다가, 내가 볼일 보는 걸 왜 공유해야 하는 거야? 변태들의 나라인가?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익숙하지도 않은 옷을 쭈욱 끌어 올리며 투덜투덜. 침대로 다가가는데,
문득, 그런 방 한가운데 보이는 거울로 보이는 여자. 금빛 머리칼에, 피부가 투명하다는 건 이런 걸두고 하는 말이구나, 싶고. 코도 오똑하니 입술도 올망졸망 잘도 모여 있다. 워. 존예. 진짜 예뻐 저 언니.
“........누구세요?”
“........누구세요?”
거울 속에 있는 존예가 내게 물었다. 누구냐고? 그건 방금 내가 그쪽한테 물어 봤는데요?
“.......응?”
“.......응?”
왼쪽 눈을 찡긋, 감았다 뜨고, 오른쪽 눈을 찡긋, 감았다 떠도,
다시, 왼쪽 콧구멍을 후비는 척 하다가 빠르게 오른쪽 콧구멍에 손가락을 쑤셔 넣어도,
거울 속에 있는 예쁜 언니는 잘도 나를 따라한다. 이 언니, 얼굴만 예쁜 게 아니라 뭘 좀 아시네, 흐흐흐, 하고 웃다가, 잠시만. 거울? 거울이라고?
“......그럼 설마......”
“......그럼 설마......”
“왁!!!!!!!!!!!!!!!!!!!!!!!”
저 언니, 나야?!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