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리더스 국의 전성기는 약 100년 전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는 아주 오래전부터 ......”
낮은 목소리가 방 안에 퍼졌다. 두꺼운 고동색 책상을 앞에 두고 앉아있는 남자의 자세는 꼿꼿했다. 작은 움직임 하나 없이, 은색의 긴 장발을 한데 묶어 뒤로 넘기고, 얇은 은테의 안경을 쓰고 있는 그는 한눈에 딱 보아도 지성적인 분위기가 팍팍 풍겼다.
라일론은 리더스 왕국의 꽤 저명한 역사학자다. 얼마나 저명했냐면, 그의 할아버지를 시작으로, 아버지, 자신까지 3대에 걸쳐 리더스 왕국의 역사학자로서 명성을 떨쳤다. 이 쯤 되면 자신은 그림을 그리겠다는 둥, 조각을 하겠다는 둥의 삐뚤어진 사춘기 감성이 튀어 나올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아니, 그러기는커녕 만약 자신이 결혼을 하게 되면 낳을 아들에게도 역사 교육을 시키고 싶어 했다. 본투비 역사학자 집안의 핏줄 이였다.
게다가 늘 옆구리엔 한손으로 들기도 버거운 두꺼운 책을 끼고서 왕국을 거닐 때면 알게 모르게 여 시종들이 그 뒤를 따랐다. 단 한번만이라도 저 두꺼운 책에 두개골을 맞아 혼절 해봤으면! 라일론을 뒤따르던 여 시종 한명이 말했다. 그 옆에 있던 다른 여 시종들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섬뜩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그 순간만큼은 진지했다.
사실 역사학자라고 해서 하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건국 이래 100여년이 넘는 전성기를 맞고 있는 리더스 왕국이기에 그가 하는 일이라곤 하루 종일 왕국의 도서관이나 지하 깊숙이 위치한 역사 기록관에서 책들에 둘러싸여 있는 일이 전부였으나, 최근 들어 그의 하루 스케줄이 종잡을 수 없이 변해갔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이는 오래 전부터 황제의 근면함과 성실함이 제국민의 평화와 비례하였기 때문입니다. 황제께서 1년 365일, 하루 24시간을 꼬박 정사에 힘쓰는 이유도 그 때문...”
“.......세상에....”
“......공주님.”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이냐고......”
“.........아가스 공주님.”
라일론의 고개가 들리는 동시에 시야로 보이는,
“안되지, 말이 안 되고말고. 아니, 사람이 이렇게 생길 수가 있냐고......”
“.......공주님.”
“그렇죠? 그쪽도 이게 지금 말이 안 되는 거죠? 그, 이름이, 뭐였더라.....”
“라일론입니다. 리더스 왕국의 일흔 세 번째 역사학자. 제 소개만 오늘로서 벌써 세 번째입니다.”
“아아, 미안해요 라일락. 내가 정신이 없어서.”
약하기론 새벽녘의 횃불만큼이나 한치 앞도 볼 수 없었던 왕국의 안 하나뿐인 공주, 아가스 때문 이였다.
‘아가스 공주님이 번개를 맞고 의식을 잃었다.’
늘 상 도서관에 틀어박혀 있던 그이기에 그 소식을 들은 것 또한 남들 보다 한참은 뒤에서였다. 원체 몸이 약하기로 유명했던 공주이기에, 그렇군. 이제 국 장례를 치루는 일로 왕국이 바빠지겠는 걸, 하고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생각하고 말았던 그였다.
“큰 일 났습니다, 학자님!”
“무슨 소란이야, 황제의 부름이 아니고서야 나를 방해하지 말라 말한 걸로 기억하는데.”
“그, 그게,”
“황제의 부름인가.”
“아니요, 그건 아니지만.......!”
“그렇다면 내가 자네에게 무슨 벌을 내리든 타당성이 있다는 말이군,”
“........그, 그게 아니라, 황제......! 황제께서 이곳으로 오고 계십니다.....!”
물론, 여느 때처럼 먼지만 풀풀 날리는 텅 빈 지하 역사기록관에 홀로 앉아 책을 읽어대는 그에게 부리나케 뛰어온 작은 신관이 전한 황제의 행차가 전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라일론입니다.”
왕국은 물론 주변국에 까지 거의 노출이 되지 않았던 공주였던 터라 같은 왕국에 살면서도 그녀를 실제로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던 그였다. 그럼에도 그 존재가 유명했던 이유는 어릴 때부터 심하게 병약했던 탓이리라. 늘 침대 위에 누워 언제 숨을 넘길지 몰랐던 창창하고 아름다웠던 비운의 공주. 아마 그는 공주가 벼락을 맞았다고 했을 때 이런 식으로 기록을 남겨야겠다. 하고 생각했을 거다.
그러나,
“하하, 맞다. 아니, 지금 그게 중요 한 게 아니고요.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제 얼굴이요, 이거. 자세히 좀 봐보세요, 거울로 보이는 이 얼굴이, 사실적으로 가능한 이야기냐, 이 말이죠.”
한 손에 들기도 버거운 탁상용 거울을 들고서, 이리 보고, 저리 보는 공주는 한 눈에 봐도 온 얼굴에 호기심과 생기가 가득했다. 도무지 번개를 맞고 쓰러져 기억을 잃은 비운의 여인의 모습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 오똑한 콧날은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 진 걸까요? 제가 눈치로, 눈치로 짐작컨대 이 시대엔 성형 수술 같은 것도 따로 없을 것 같은데 말이에요!”
.......아니, 번개를 맞은 뒤로, 확실히 이상해지긴 했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단어를 쓰질 않나, 틈만 나면 거울을 보며 제 얼굴을 만지작대느라 정신없질 않나. 그 매섭던 천둥과 벼락을 맞고도, 기억력만 상실 되었을 뿐인 천운에 감사해야하는 건지, 혹은 그 상실된 기억력과 함께 완전히 달라져 버린 성격에 안쓰러워해야 하는 건지.....
“나일론! 내 말을 듣고 있나요? 어떻게 생각 하냐는 말이에요. 이 얼굴, 이 몸매. 진짜 혼자 보긴 너무나 아까워, 아까워 죽겠어!”
“.......오늘 수업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죠. 아무래도 의신관들의 진단을 정밀히 받아 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공주님.”
아무래도 벼락을 맞으면서 기억을 잃는 동시에 현실적인 인지 능력 같은 것이 저하되었을 수도 있다. 라일론은 그렇게 조심스레 결론을 내렸다.
“그것 참 밥시간을 알리는 종소리만큼이나 즐거운 소리군요! 나일론! 고마워요! 당신은 정말 최고야! 여보세요, 시종님! 시종님!!!!!!”
“공주님, 그렇게 부르지 말아달라고 부탁 드렸는데, 왜 자꾸,”
“그러지 마세요. 비록 제 긴 옷가지를 잡아주시지만, 당신은 하나의 인격 이예요. 요즘엔 아르바이트생들의 최저 임금도 보장하기 위한 법들이 얼마나 잘 되어있는데. 그나저나, 이 귀찮은 옷가지들은 왜 자꾸 주렁주렁 늘어놔선. 정말 쓸모없어! 자! 갑시다!”
“공주님, 천천히요, 천천히! 품위를 지키셔야,”
“아 배고파. 나일론! 오늘 수업 좋았어요! 먼저 산책에 나가보겠습니다! 내일 봐요!”
“........라일론 입니다.......”
“으악!”
“조심 하세요 공주님! 걸음 폭을 줄이셔야 드레스를 밟지 않는다고 몇 번 말씀 드려요!”
라일론은 치렁치렁 늘어지는 드레스를 배려할 생각이 없는지 성큼성큼 앞장서 걷다가 휘청대는 아가스의 뒷모습을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쓰고 있던 은테를 벗어 미간을 문지르는 그에게선 답지 않게 낮은 한숨소리까지 나왔다.
“세상에, 이게 진짜 금이라고요? 말도 안 돼. 한번 깨물어 봐도 돼요?”
“예? 공주님, 이걸 왜 깨무시는, 어머!”
“으으, 아파라. 오. 금 맞네. 맞아. 이건 내가 봤을 때 순도 100이야, 100.”
막 황제의 업무실에서 나서던 휀은 저 멀리서 들리는 낭랑한 목소리에 절로 웃음이 띄워졌다.
그간 그 목소리로 들었던 말이라곤, 늘 힘없는 눈커풀을 겨우 올리고서 희미하게 웃으며 휀 오빠, 하고 들릴 듯 말듯했던 짧은 단어 뿐 이였다. 그러나 지난 폭풍우가 거세게 몰아쳤던 그 밤 이후로,
“아가씨, 그걸 왜 주머니에 넣으세요, 손 더러워 진다구요, 네?”
“허허, 봐, 봤어요? 아니 나는 그냥...... 장식용 자갈로 쓰기엔 아깝잖아요,”
“아가씨!”
“알겠어요, 알았어. 거 참, 되게 빡빡하게 구시네요, 내가 없이 살아서 그래요, 없이 살아서!”
“풉.”
그 힘없는 목소리는커녕 도무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천방지축이 되어 버렸다.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했던, 듣기만 해도 신이 나는 목소리에, 차갑게만 보였던 휀의 얼굴에 단박에 웃음이 터졌다. 짧은 웃음소리가 은백색의 복도에 울렸다.
“오라버니!”
그러자 저 멀리서부터 먼저 휀을 알아본 아가스가 저를 부르며 걸음을 옮겼고,
“으억!”
“공주님! 제발요!”
“이런 젠....... 아아. 흠, 으흠! 나쁜 것! 속치마를 없애버리겠어!”
또다시 드레스 길이와 제 발걸음이 꼬여 기우뚱댄다. 그리곤 휀에게 우다다 뛰어오니, 그 뒤를 따르던 시종들만 곤욕스럽게 따라붙었다.
“아가스, 몸은 좀 어때? 아직 걷는 것엔 적응을 해야 할 듯 싶구나, 너무 오랜만에 걸어보지?”
“그럼요! 내 인생 최고의 꿈...... 이~ 아니라. 하하! 하하하!!!! 꿈만 같다고요! 모든 것이요!”
“다행이다. 많이 걱정했어.”
다정하기 이를 데 없는 휀의 얼굴이 아가스가 제게 낀 팔짱을 바라봤다. 동그란 눈을 뜨고 저를 바라보는 아가스의 싱그러움이 그대로 자신에게도 닿는 것만 같았다. 아가스가 이토록 귀여운 동생 이였던가. 어릴 때부터 약한 몸 때문에 그저 멀리서 바라보고 안부를 묻는 것이 고작 이였던 지난 과거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하나둘씩 늘어갔다.
“......역시, 이런 비주얼은 현실에선 있을 수가 없지.”
그런 휀을 바라보던 아가스도 똑같은 생각으로 중얼거렸다. 반듯하기 그지없는 이목구비와, 굵고 남성진 콧대, 강인해 보이는 짙은 눈썹. 단단한 입매까지 저만큼이나 완벽한 얼굴 이였다.
“형, 아가스. 둘이서만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때마침 승마 수업을 끝내고 오던 아르안이 그런 둘을 발견하곤 걸음을 멈춰 섰다. 보통 때 같으면 데면데면 인사만 하고 말았을 두 형제였지만, 벼락을 맞고 살아난 아가스가 그의 형제들 사이에 있을 땐 달라졌다.
“아가스. 형에게만 문안 인사를 하고, 내게는 안 오는 거지? 아가스는 아르안을 싫어하지?”
“아니, 작은 오라버니, 그게 아니라 이제 막 작은 오빠에게도 가려고......!”
“아르안. 아가스를 난처하게 만드는 거냐?”
“난처 하라지. 둘째오빠는 안중에도 없는 아가스!”
잘생긴 눈매가 살풋 구겨지며, 뾰루퉁하게 변한 아르안의 말에 휀은 받아치면서도 입가에 띈 미소를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는 아가스의 눈에선 더욱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미쳤어. 저렇게 잘생긴 남자가 내 오라버니라니. 게다가, 심지어 둘이 지금 나를 두고 싸우는 거야? 아니, 이참에 그냥 둘이 곱해버리면 안 돼? 난 그게 더 좋을 것 같은데. 아냐, 둘은 친형제라고. 정신 차리자. 아무리 꿈이라도 상도덕이라는 게 있는 거야.
그렇지만, 정말 눈은 호강하다 못해 즐겁다. 눈이 즐겁다는 건 이런 때 사용되는 것이구나.
신이시여. 이 엄청난 꿈을 영원히 꾸게 해주신다면, 영혼이라도 팔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