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이 세계는 정말 미친 게 틀림없다. 아무리 꿈이라고 한들,
“파, 파티요?”
“그럼요! 공주님이 깨어나셨으니 당연한 일 아니겠어요?”
“아니, 아무리 제가 공주라지만.......,”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성곽에 가까이 가보셔요, 공주님이 깨어나신 이후로 온 국민들이 3일 내내 밤낮없이 술과 음악으로 지새운 다구요! 그 모습은 보기만 해도 얼마나 신이 나는지!”
내가 깨어났다고 온 국민이 밤새 음악을 틀고 춤을 춘다니 이건 정말이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건 정말이지 신생아가 된 기분이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 눈을 뜨면,
“오오, 공주가 눈을 떴어, 아침을 맞이했단 말이야!”
하고 내게 그 크고 풍성한 수염을 부비는 할아버지가 있지를 않나, 아. 정확히 말하자면 리더스 제국의 황제, 즉 나의 아버지였지만. 산타할아버지 같은 수염만 조금 적었어도 훨씬 젊어 보였을 텐데. 아무튼.
그런 내가 침대에서 일어나 한 걸음 내딛으면,
“아아, 우리 공주가 이제 혼자서도 잘 걷는구나! 땅을 딛고 서있어!”
결혼식 날 입는 신부 드레스 마냥 가슴은 풍만하고, 허리는 바비 인형처럼 쏙 들어간 선녀를 닮은 여인이 눈물을 글썽인다. 그 선녀는 리더스 제국의 황비이자 나의 어머니였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어떻게 저 신부 드레스를 입고 일상생활이 가능할까 궁금하다.
그것뿐인가.
숟가락을 들면 숟가락을 들었다고 놀라시고, 머리를 매만지면 스스로 머리카락도 정리한다며 경악을 금치 못하신다. 이러다가 입에 들어갈 음식물도 조만간 대신 씹어서 넘겨주겠다고 할 정도였다. 으, 이건 상상하니 무지 별로다.
그런 이 엄청난 꿈속에서 이제는 내가 건강을 회복했으니 파티를 열어주겠단다. 정말 돈이 넘쳐 나는 제국이다. 그럼 그 파티의 제목은 뭐지? 이상희 건강회복 기념 파티? 아니, 아니지. 이 꿈속에서 나는 아가스잖아. [경/우리 아가스 돌잡이/축] 뭐 이런 거 아닐까. 풉.
이런저런 생각에 혼자서 큭큭대며 시종에게 몸을 맡겼다. 여기선 옷도 갈아입혀주니 신생아 맞네. 그럼 오늘은 가만히 앉아서 파티 음식이나 왕창 먹을 수 있다는 건가? 신난다.
“......컥!”
“공주님, 조금만 더요, 더!”
“억! 이런 젠자........어억! 그만! 예, 예쁜 드레스 입혀 주신 댔잖......컥.”
“네! 어여쁜 드레스죠! 이건 왕실로 들어오는 최고급 비단으로만 만든 옷이거든요! 조금만! 조금만 더 숨을 들이켜 보세요!!!!!!!!거의 다 됐어!!!!!!!!!!!”
“뜨흡!”
“됐다!!!!”
는 생각은 든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모두 산산조각이 되어버렸다. 침대 커튼 봉을 잡고서 갓 잡은 짐승마냥 숨을 거칠게 쉬어대니, 옆에서 땀을 닦으며 나타나는 시종이다.
“가, 갑옷 아니고요? 세상에. 숨을 쉴 수가 없는데요, 시종님.........후아, 후아......”
“파티에 가면 맛있는 게 얼마나 많은 데요! 마음껏 먹어도 뭐라 하는 사람 없고!”
..........젠장. 출근길 지하철 한가운데에 끼여 있는 채로 앉아있는 것 같아. 이런 옷을 입고서는 맛있는 것은커녕 물 한 방울이라도 섭취했다간 팅팅 소리를 내며 드레스 단추가 부숴 질 것만 같았다. 고개라도 숙이는 날엔? 워. 상상하기도 싫다.
삐걱삐걱, 간신히 눈길만 내리니 얼마나 끌어 모은 건지, 한 눈에 봐도 풍만한 가슴이 드레스의 윗부분에 꽉 차있다. 세상에, 이정도면 거의 D컵 아니야? 갑자기 숨이 참을 만해지기 시작했다. 종종 걸음으로 거울로 다가가니, 새하얀 드레스가 가슴과 허리선을 따라 굴곡져 있었고, 엉덩이를 시작으론 풍성한 레이스와 프릴이 그 끝을 가늠할 수 없이 늘어져 있었다.
“이럴 수가.”
“왜, 왜 그러세요, 공주님? 혹시 드레스가 마음에 들지 않으세요? 그렇다면 다른,”
“이건 혁명이야!!!!!!!!!”
“네, 네? 꺄악! 공주님, 저를 안으시면 어떡.....!”
“외모에 산업혁명이 일어났다면 이런 기분일까요?! 세상에. 나 완전 예뻐!!!! 왜 이 시대엔 핸드폰이 없는 거지? 당장 찍어서 페북에 올리면 좋아요가 삼만은 거뜬할 텐데!!!!!아오!!!!!!!”
“공주님! 도무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요, 제가 아는 게 부족하여...... 드레스를 바꿔올까요? 네?”
“바꾸기는 무슨! 최고란 뜻 이예요!”
퍼엉-
내 목소리만큼이나 커다란 소음과 함께 검은 밤하늘 위로 반짝거리며 화려한 폭죽이 터졌다.
“줄을 서시오! 줄을 서서 각 나라의 왕족과 귀족들을 증명할 패를 보이시오!”
활짝 열린 성문으론 끊임없는 인파의 행렬이 이어졌다. 제국 각지에서 모인 왕족과 귀족 들은자신 들의 풍만한 옷가지를 뽐내며 궁전으로 들어섰다. 검은색 깃털이 장식된 드레스가 인상적인 여자, 황금색 망토를 벗어던지면, 그 뒤로 따라붙는 시종이 쪼르르 달려가 줍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남자, 그 외에도 겉면이 반지르르 한 게, 꼭 피망 같은 색의 드레스나 다홍색 게맛살 같은 드레스, 종종걸음으로 동화책에서만 보던 어린왕자 옷가지를 두르고 걷는 사내아이 등등.
아, 오해는 마시라. 이런 드레스를 처음 봐서 딱히 그 색깔을 표현할 길이 없어서다. 은색의 궁전 안으론 수 만 가지의 색깔이 모이고 있었다. 한마디로 엄청났다는 거다. 이게 내 건강회복 기념 파티라고? 뒤로 넘어질 일이다. 식 행사에 아가스 돌잡이 순서가 없었던 걸 천만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걸까.
“드미아 공작가의 자제 얀 드미아 이십니다!”
저 긴 코트 같은 건 진짜 황금이 들어간 걸까? 훤칠하니 인물이 사는구만. 크으. 뭐야. 피부색이 되게 짙네? 섹시해. 태닝 같은 거 한 건가? 가만, 여기에도 태닝 기계 같은 게 있나?
“....공주님.”
“스칼 공작가의 샤를로 스칼 이십니다!”
.....오? 키 큰 것 좀 봐. 심지어 잘생겼잖아. 세상에. 봤어? 저 팔뚝 지금 입고 있는 셔츠 소매에 끼인 거 맞지? 잠깐 불편해서 인상 썼잖아. 근육이 낀 거야? 할렐루야다, 세상에.
“.......공주님?.......공주님!”
“.....네, 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셔요. 저기요, 저기!”
“다음은, 로엔 왕국의 왕자, 마르가스 이드리안 왕자님이십니다!”
시종의 말에 주변을 둘러보니, 웅성웅성 거리는 소음이 그제 서야 들리는 거다. 막 궁으로 들어서는 계단 위로, 한눈에 봐도 떡 벌어진 어깨를 자랑하는 늠름함 사내와 눈이 마주친다. 붉은 머리칼은 파티장 안에 있는 모두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고, 붉은 겉옷을 벗어 던지자 더 붉은 조끼에 가려져 있지만 빵빵한 가슴근육이 절로 눈에 들어온다.
“트리가 공작가의 자제 반 트리가 이십니다!”
뒤이어 들어온 사내 또한 남달랐다. 날렵한 눈매와 꾹 다문 입매가 매력적이다. 이내 겉옷을 벗느라 나른하게 내려깐 눈매와, 강조되는 얇은 턱 선은 백년 묵은 여우도 홀려낼 아름다움이다. 꽃 같은 남자가 있다면 저이를 두고 하는 말일까.
미친. 방금 두 분에게 제 점수는요. 백점이요. 원 헌드레드. 아낌없이 백점이요.
“기억 못하시겠지만, 두 분 다 지난 연회에서 몇 번 공주님과 함께 춤을 추신 분 들이예요.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셔서 서로에 대한 경쟁심이 남다르셔요. 공주님이 16살 때 마지막으로 참가하셨던 연회에선 반 트리가 공작님과 함께 춤을 추셨어요.”
둘이 어렸을 때부터 친구라고? 게다가 나를 두고 파트너 경쟁을 한다?
이거 완전.......
“.......최고.”
엄지를 척 들어 올리고 싶은 걸 참았다. 멀리서부터 두 사내가 나를 보고 다가오기 때문이었다. 그런 두 사람을 따라 바다 갈라지듯 벌어지는 인파 틈으로, 서로 경쟁하듯 뻗어있는 기럭지와 걸음 속도.
“공주님. 이렇게 뵐 수 있어 영광입니다.”
먼저 무릎을 굽혀 내게 손등 키스를 하는 남자는 반이라는 남자였다.
“고마워요, 반.”
워씨. 얼굴이 저렇게 곱상한데 또 목소리는 남자야. 모델인가? 아니면 남자 큐피트 같은 건가? 살풋 웃는 얼굴은 꿀이라도 바른 것처럼 달콤하게만 보인다.
“아가스. 이러기야? 한낮 공작 놈의 키스먼저 받다니. 가뜩이나 몸도 약한데 부정 탄다고.”
그러면 그 옆에서 불안함에 달달 다리를 떨던 붉은 머리의 남자가, 내 손을 잡고 있는 반을 밀어내며 내 앞으로 서서 손등에 키스를 퍼붓는다. 그러고선 고개를 들어 씨익 크게 웃는 입매는 한눈에 봐도 시원스럽다.
“부정이라니? 하루 종일 사냥만 해대다 온 주제에. 기분 나쁜 땀 냄새가 여기까지 나는 군.”
“허, 어여쁜 공작 놈 주제에 말이 많군? 내가 친구라고 봐줄 것 같냐?”
“아가스 공주님 앞에서 그런 몰상식한 태도는 삼가지. 공주님, 병색이 나으신지 얼마 안 되셨는데, 마르가스왕자 같은 해로운 것은 보지 마십시오. 염려됩니다.”
“해롭긴, 곱상한 외모 속으로 시커먼 속내나 숨기고 있는 네 놈이 더 해롭거든!
“공주님. 마지막에 췄던 춤 기억하세요? 지난번 왕국 기념일 연회 때 알려드렸던. 2년이나 지났으니 그 실력이 녹슬진 않았는지 제가 감히 시험을 해봐도 되겠습니까?”
반이 그런 마르가스의 말엔 아랑곳없이 정중히 무릎을 꿇어 허리를 숙이며 손을 건넨다.
“일개 공작주제에 건방짐이 하늘을 찌르는 군. 아가스! 저딴 자식 내버려두지 말라고! 저 양꼬치 굽는 숯불 속으로 넣어서 반 꼬치를 만들어버리란 말이야. 그리고 난 널 위해 지난 2년간 토요일마다 춤 수업을 들었어! 이런 나는 어때?”
이번엔 마르가스가 그런 반 옆에서 정중히 꿇어앉아 손을 내밀었다.
“지난번처럼 아가스의 발을 밟기라도 한다면 황제께서 널 즈려밟으실 걸, 마르가스.”
“너야말로 지난번처럼 은근슬쩍 아가스의 허리에 손을 올려서 병사들에게 둘러 쌓이지나 말라고. 쪽팔리게.”
내 눈앞으론 두 개의 손이 동시에 올라왔다.
“........하아.”
잠시 어지러움에 머리를 짚었다.
“아가스!”
“공주님!”
“고, 공주님, 왜 그러세요, 괜찮으세요? 네? 모두 물리라고 할까요?”
“........시종님.....”
............물리긴 뭘 물러..........
........젠장 맞을, 이렇게 좋은데!!!!!! 여기 완전 천국 아니야?! 됐다, 됐어! 이번 생은 다 완성됐어! 하느님, 벼락을 맞고 제가 정신병원에 갇혀 꾸는 망상이든, 관에 누워서 꾸는 꿈이든 뭐든 좋습니다. 절대로, 절대로 저를 깨어나지 마게 하옵소서! 제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