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왜 공장에 함께 가자고 했어요?”
“그냥.”
“정말 그냥 그런 거예요?”
한 손으로 핸들을 쥔 신형이 다른 한 손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대답했다.
“말을 해야 아는 건가?”
“……지금 저더러 대충 알아들으란 얘기예요?”
“확실하게 알아들으면 더 좋고.”
“진짜……. 표현 장애 있어요? 왜 그렇게 표현을 못 해요? 못하는 게 아니야, 안 하는 거지.”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건, 말로 하는 게 아니야.”
“좋아요, 저 지금부터 말 한 마디도 안 할 거거든요. 실장님이 알아서 이해하세요.”
한나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는 그를 서운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일이란다. 그래, 충분히……. 놀랍도록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혼자만의 착각일까 봐 겁이 났다. 어느 순간 깨어나야 하는 꿈일 것만 같아서…….
말에 대한 책임을 지키듯 한나는 줄곧 침묵을 지켰다. 차는 어느새 신림동 고개를 지나고 있었다. 교회 건물 첨탑 끝에 달린 붉은 십자가를 바라보며 신형이 말했다.
“편하게 갔으면 해, 자연스럽게.”
단 한 마디의 말도 안 할 거라 장담한 한나는 그의 말을 못 들은 척 했다. 눈시울이 시큰거렸다.
문득 자신이 싫다는 말을 하면 신형이 어떤 대답을 할 지 궁금해졌다. 그럴 수 있다는 듯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우린 언제든 서로를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일까? 얼마든 놓아줄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일까?’
가슴 한 귀퉁이로 서늘한 바람이 스며드는 걸 보니, 최신형이라는 남자와의 일상적인 관계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이 사람이 말하는 편하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가자는 그 길은 어디로 향해 난 것일까?’
서로에게 커다란 부담을 짐 지우지 않아도 되는, 속박이니 구속이니 하는 것들의 또 다른 이름인 어떤 약속도 존재하지 않는, 지금이 편하다는 사실을 모르진 않았다. 정확히 지금의 관계가 가장 편하다는 것 또한 모르진 않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생각일 뿐이었다.
신형으로부터 보다 명확한 말을 듣기 원하는 가슴은, 결코 지금의 관계가 만족스럽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 이 사람을 좋아하는 걸까?’
차마 사랑이라는 말을 생각해낼 수 없는 가슴 위로 싸한 통증이 느껴졌다. 정말 그를 사랑하게 되기라도 한 것처럼.
신형은 이렇다 할 말 한 마디 없이 묵묵히 창밖을 내다보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고마운 사람이다. 언제라도 지금처럼 곁에 있어주었으면 하는 그런 여자였다. 사소한 감정 하나까지도 선뜻 표현하지 못하는 자신과 달리, 매사에 솔직한 그녀에게 신형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삭막하게 살아온 최신형이라는 남자의 삶이 장한나라는 여자로 인해 새롭게 된 것 같다는 말부터, 늘 지금처럼 당신이란 여자가 내 곁에 있어주었으면 좋을 것 같다는 말까지……. 내가 이런 말을 꺼내고 나면 몇 걸음쯤 뒤로 물러날 것 같은 당신 때문에 용기를 내는 일이 쉽지 않다는 그 말도…….
그녀의 집으로 향하는 골목으로 접어들기 위해 차선을 바꾼 그는, 조심스럽게 한나의 손을 잡았다. 정지된 것처럼 여전히 창밖에 시선을 두고 있지만, 잡은 손끝에서 느껴지는 떨림은 그녀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차가 대문 앞에 멈춰선 뒤에도 신형은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한나처럼.
“서운해 하지 않았으면 해. 나란 남자,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거기까지 밖에 안 돼.”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손등을 적시고 마음을 적시는데……. 어느 누군가의 손을 잡기까지 누구보다 힘겨웠을 그의 마음을, 그리고 한나 자신의 마음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손바닥으로 흥건한 눈물을 닦아낸 한나는 천천히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화가 덜 풀린 탓에 창밖을 쳐다보는 줄 알았던 그녀의 눈가에 고인 눈물은, 신형의 가슴을 살아있는 자의 그것처럼 아릿하게 만들었다.
한나가 촉촉하게 젖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 손 안 놓을 자신 있어요?”
어느 이상한 날
기상청의 예보를 믿는 바보 같은 짓을 하다니.
“에이취!”
지하도를 빠져나오자마자 얇은 가우초 팬츠 밑단으로 차가운 바람이 파고드는 바람에 저절로 재채기가 쏟아져 나왔다.
5월 하고도 중순이 지났건만, 온통 잿빛 바람으로 들어찬 거리는 만추의 서정이 울고 갈 정도였다.
“미쳤어.”
전 직원이 야유회를 가는 그날 비가 오기로 유명하다는 기상청이었다. 곧 신용불량 통보를 받기 직전이라는 그곳의 예보를 철썩 같이 믿은 자신도, 때가 5월인지 10월인지 분간 못 하는 날씨도 유통기한이 지난 빵처럼 맛이 간 게 분명했다.
비스듬히 매고 있는 크로스백을 등 뒤로 젖힌 한나는, 시린 바람에 나풀거리는 슬랙스 밑단을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둘 중 하나를 원망해야 하는데, 둘 다 원망스러웠다.
우중충한 하늘은 한 자락 눈발이라도 쏟아낼 것처럼 찡그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뛸까, 말까?’
발목이 드러나는 가우초 팬츠를 입고 잘못 뛰었다가는 날씨만큼이나 미친년이 되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이 바람 속을 터벅터벅 걸어서 두 블록을 지나야 한다는 건 미친년이 되는 것만큼이나 미친 짓이었다.
모든 판단은 TPO를 기본으로 한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지만 적어도 스스로를 패션 피플이라 자처하는 이들에게는 불가변의 원칙이었다.
경력 7년 차의 패션디자이너인 한나는 기본원칙에 의거, 자신이 어떠한 판단을 내려야 할지 생각했다.
첫째, 시간(Time).
손목에 차고 있는 둥그런 모양의 시계가 가리키는 현재 시각 8시 43분, 강남 복판이 출근 직전의 샐러리맨들로 복작거리는 시간이라는 사실을 숙지시켜주었다.
두 집 건너 한 집 꼴로 거래처가 모여 있는 동네에서, 이 시간에 너풀거리는 가우초 팬츠를 입고 뛴다는 건, 준 자살행위에 해당하는 일이다.
둘째, 장소(Place).
이건 첫째 원칙이 함께 해석을 해 주었으니 패스!
셋째, 상황(Occasion).
살갗을 뚫을 것 같은 매서운 바람이 불고 있다. 언제나처럼 지하철 안에서 잠을 털어내는 장한나는, 오늘도 잠이 덜 깬 상태로 하늘하늘한 가우초 팬츠를 입고 출근을 했다.
상황을 정리하자면 그랬다.
바람난 며느리 속곳처럼 휘날리는 가우초 팬츠 바람으로 더럽게 아픈 바람을 견디며 두 블록을 걷든지, 팬츠 밑단을 파고드는 바람의 속도로 걸음아 날 살려라 뛰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바람을 견디며 두 블록을 걷는 수고와 쪽팔림 중에서 한나는 쪽팔림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래, 네가 이겨라!’
판단을 내리기까지의 과정도 신속해야 하지만, 일단 판단이 내려지고 난 뒤엔 빛의 속도로 행동에 옮기는 것이 패션 피플의 사명이었다.
반경 오 미터 안에 낯익은 얼굴이 보이는지 아닌지를 확인한 한나는 턱을 최대한 목 쪽으로 향하게 했다.
멍하니 지하도 입구에 서 있던 여자가 갑자기 뛰기 시작한다면 십중팔구 출근길 소매치기로 보일 수 있었다.
지하도 입구 계단을 내려서기 무섭게 매서운 바람이 뺨을 때리고 지나갔다. 말이 좋아 바람이지, 태풍이라도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나 둘, 하나 둘…….’
구령까지 넣어가며 종종걸음으로 걷던 한나는 점차 속력을 냈다. 가우초 팬츠가 허리춤까지 뒤집히는 한이 있어도, 이 바람 속을 걸어서 가는 미친 짓 같은 건 할 수 없었다.
찰싹찰싹 뺨을 때리고 지나는 바람이 얼마나 매운지 절로 눈물이 찔끔거려졌다.
제이 어패럴 천안 공장.
한차례 눈이 쏟아질 것처럼 희뿌연 5월의 하늘은 괴기스럽기까지 했다. 패션 선두 그룹이라는 자사의 슬로건에 걸맞게, 관리직 직원들은 하나같이 지난봄에 입었던 진한 감색 점퍼를 걸치고 있다.
석 달째 이곳 공장에서 실무 감각을 익히고 있는 신형은, 공장장이 내어준 회사 점퍼를 와이셔츠 위에 걸쳤다.
“날씨가 심란하지요?”
삼십 년이 넘게 제이그룹의 공장에서 장기근속을 해 온 공장장 정씨의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허긴 세상이 두루 미쳐 가는데 날씨라고 멀쩡하겠어요. 미친 세상을 지켜보자니 저도 속이 타는 거죠.”
“회의는 몇 시부터죠?”
“본사에서 9시 30분까지 온다니까, 10시나 되어야지 시작할 것 같네요. 참, 어제 말씀하신 자료 가지고 왔습니다.”
앞머리부터 정수리가 훤히 빈 바람에 이마 언저리가 묘한 삼(三)자 모양으로 보이는 공장장이 옆구리에 끼고 있던 파일을 내밀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책상 의자에 앉은 신형은 그가 건넨 파일을 펼쳐보았다.
지난 2월 귀국을 한 뒤 줄곧 공장에서 업무파악을 해 왔지만, 제이어패럴의 흐름에 대해서는 알아야 할 것들이 여전히 많았다.
하나의 사실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둘 셋의 궁금증이 일다 보니, 하루 스물네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유독 이직률이 높은 업계에서 전 사원의 평균 근속연수가 10년을 상회한다는 사실만으로, 제이어패럴의 입지를 판단할 수는 없었다.
“그럼 저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필요하신 거 있으면 아무 때고 전화하세요.”
“공장장님께 계속 폐만 끼치는군요.”
“아닙니다. 실장님이 굳건하게 서야 저희 제이어패럴이 건강한 거 아니겠습니까. 절대 부담 갖기 말고 그때그때 말씀만 하세요. 남은 머리가 몽땅 다 빠지는 한이 있어도 최선을 다해서 도와드릴 테니.”
“고맙습니다, 공장장님.”
잠시 파일을 덮은 그는 오십 대 중반의 공장장을 향해 공손한 목소리로 고마운 마음을 표현했다.
신형은 공장장이 나가고 나자 덮었던 파일을 다시 열었다.
오 년간의 물류 입출고에 대한 기록이 담긴 파일을 챙기느라 공장장은 아마도 지난밤을 꼬박 새웠을 것이었다. 퇴근이라는 걸 반납한 채.
생산 라인의 직원들과 석 달을 함께 지내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면, 제이어패럴의 명성이 거저 생긴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어엿하게 제이어패럴의 직원이 된 이상, 신형 자신 역시 생산라인의 직원들이 보여준 본(本)처럼, 주어진 일을 위해 값진 땀방울을 쏟아내야 했다.
“음……. 역시나 같군.”
눈으로 차트를 훑어 내리던 그는 혼잣말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삼 년간의 물류 입출고 및 판매 동향을 외우다시피 한 그가 공장장에게 오 년간의 자료를 부탁한 건, 연간 수익의 절반 이상이 여성복 브랜드에 편중돼 있기 때문이었다. 매출동향으로 볼 때 자사 내 15개의 브랜드 중 절반 이상은, 적자를 면치 못하거나 겨우 손익분기점을 넘기는 불량 브랜드였다.
스스로를 장사꾼이라 말씀하시는 아버지가 이런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일평생 손해 보는 짓 같은 건 해 본 적이 없노라고 공언하시는 분이 적자투성이의 불량 브랜드를 장기간 끌어안고 있을 리 없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된 것일까.
과거의 매출 동향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살펴봐야 하겠지만, 적어도 5년간의 판매동향은 남는 장사와 손해나는 장사의 저울이 되어주었다.
그는 파일을 분석하는 대신 손을 내밀어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보다 세세한 사항에 대한 자료는 이곳이 아닌, 본사의 마케팅팀과 영업팀을 통해 파악함이 옳았다.
수화기를 귀에 댄 그는 습관처럼 왼손 검지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진한 감색 점퍼 소매 아래로 드러난 긴 손가락은 남자의 그것이라고 하기엔 눈이 부시도록 고왔다.
신형은 생각했다. 아무래도 본사로 들어가는 날을 앞당겨야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