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누구야? 서 과장 아니야?”
두 여자는 동시에 등 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검은색 우산을 받쳐 든 공장장이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머, 공장장님!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우산도 없이……, 이거라도 얼른 쓰게.”
공장장은 선뜻 두 여자에게 우산을 내주었다.
“어머, 저희 때문에 공장장님은 우산도 못 쓰시고 어떻게 해요.”
“난 괜찮네. 그보다 이쪽은 낯이 익은데…….”
공장건물을 향해 걸음을 옮기던 공장장이 한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공장장님. 전 디자인팀의 장한나입니다.”
“아, 그래! 우리 구면이지?”
“여러 번 뵀죠.”
“허허, 그런가. 내 다음번엔 꼭 얼굴을 기억해 두겠네. 장한나라……, 자네가 혹시 연속 최우수 디자이너 상을 받은 그 장한나 맞지?”
“예.”
괜스레 머쓱한 기분에 한나는 미소를 지었다. 어깨 위를 스치고 지나는 서늘한 한기가 느껴진다. 혜연이 내뿜고는 분노의 콧김이리라.
몇 걸음쯤 걸었을까. 우산을 받쳐 든 한 남자가 그들을 향해 다가섰다.
“공장장님!”
다가선 남자는 공장장에게 우산을 씌워주었다.
“이 시간에 어쩐 일로?”
“식사하고 들어가던 길입니다.”
“그러시군요. 본사 디자인팀 직원들입니다.”
디자인팀이라. 다음 주부터 자신이 몸담게 될 부서였다. 당연 그곳의 직원이라는 두 여자를 바라보는 신형의 눈길에 조심스러움이 깃들었다.
참 잘생겼다. 그냥 잘생긴 게 아니라 아주 많이 잘 생겼다. 수줍은 듯 신형을 바라보며 혜연은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다.
세련된 인물 많기로 소문난 제이어패럴 본사에서도 이만한 인물을 가진 사람은 본 적이 없다. 누굴까. 진한 감색 점퍼 앞섶 사이로 드러난 흰색 와이셔츠를 보니 관리직 직원 같은데.
혜연은 그저 고개만 까딱할 뿐 먼저 인사를 건네지 않는 남자의 눈을 홀린 듯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녀가 신형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사이, 한나는 묵직한 빗물과 흙으로 범벅이 된 엄지발가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런 날씨에 발가락 끝이 몽땅 나오는 토우오픈 슈즈를 신고 나온 자신도 잘못이지만, 우산으로 제 머리와 몸뚱이만 제대로 가린 혜연이 더 밉살스러웠다.
펄럭거리는 와이드팬츠 자락 또한 빗물에 촉촉이 젖어든 지 오래였다.
나란히 걷고 있는 네 사람 중에 나이로 보나 직급으로 보나 자신이 가장 막내인 듯싶으니 어쩔 수 없었다.
“먼저 가 있겠습니다!”
가장 연장자인 공장장을 향해 양해의 말을 건넨 한나는 뒤도 보지 않고, 저만치 보이는 공장 건물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두 남자는 아스팔트도 아니고 빗물에 고스란히 젖은 흙바닥을 뛰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허허…….”
사람 좋아 보이는 공장장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손바닥으로 머리를 가린 채 팔짝팔짝 뛰어가는 한나의 뒷모습에서, 오래전에 잃어버린 젊음의 기운이 느껴졌다.
천방지축…….
순간 당황했던 신형은 고삐 풀린 말처럼 뛰어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단 네 글자로 정의 내렸다.
“저분도 디자이너입니까?”
그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는 듯 혜연의 눈가에 웃음기가 감돌았다.
“좀 개념이 없어요.”
“인턴입니까?”
“그건 아닌데…….”
“실장님, 저 친구가 디자인팀의 장한나랍니다.”
“네?”
공장장의 말에 신형의 얼굴이 긴장으로 딱딱해졌다. 그와 동시에 혜연의 눈가에 가득 고여 있던 웃음기도 사라졌다.
실장이라는 말과 공장장이 경어를 쓰는 것으로 볼 때, 이 남자는 다음 주에 본사로 입성한다는 회장의 아들이 틀림없었다.
‘와우!’
귓전을 스치고 지나가는 빗소리가 베토벤 교향곡 5번 C 단조의 웅장한 교향곡으로 탈바꿈하는 순간이었다.
“저…….”
운명적 우연을 확신한 혜연이 말문을 열려는 찰나, 공장장의 손에 우산을 쥐어 준 신형은 공장건물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장한나.
안 그래도 본사에 출근하기 전에 한 번쯤 얼굴을 보고 싶었던 디자이너였다.
제이어패럴의 주력 브랜드인 잇걸(It girl)과 에스투(S-Ⅱ)의 전체 매출의 20%를 감당해내는 무서운 디자이너, 입사와 동시에 칠 년이라는 시간 동안 꾸준한 매출 증가를 기록해내는 전설적 디자이너이기도 했다.
100미터 달리기를 하듯 전속력으로 공장건물에 도착한 한나는 머리며 옷에 묻은 빗물을 툭툭 털어냈다. 달리면서 비를 맞는 게 낫지, 혜연과 함께 우산을 쓰고 걸어오며 흠뻑 젖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장한나 씨?”
“저요?”
머리카락 끝에 묻은 물기를 툭툭 쳐내던 한나는 자신을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공장장님이 혜연처럼 우산을 이기적으로 썼는지, 남자 역시 머리카락에 빗물을 매단 채 걸어오고 있었다.
얼굴을 보아하니 기껏해야 대리 아니면 과장쯤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한줄기 빗물이 동병상련의 정(?)을 느끼게 했다.
‘낄낄, 그게 아랫것들의 비애란다.’
가까운 곳에서 한나의 얼굴을 본 그는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우유를 쏟아놓은 듯 티 한 점 찾아볼 수 없는 하얀 피부는 헝클어질 대로 헝클어진 머릿결과 어우러져, 반항기 가득한 십 대 소녀를 연상케 했다. 아니, 차가운 바람에 빨개진 코끝이 아니라면 쇼윈도에서 꺼내온 마네킹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이 여자가 정말 장한나가 맞단 말인가?
“이보세요, 사람을 불렀으면 말씀을 하셔야죠. 날씨 더럽게 춥네, 그렇죠?”
한기가 일자 한나는 두 어깨를 으쓱으쓱 들어 올렸다 내리기를 반복했다.
“이거 입어요.”
신형은 벗은 점퍼를 그녀에게 건넸다.
“오호! 거절할 줄 알았죠? 고마워요.”
그는 내민 점퍼를 씩씩하게 낚아채가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디자인팀의 장한나 씨 맞습니까?”
“그렇다니까요. 디자인팀에 장한나는 저 하나밖에 없어요. 근데 왜 그러세요? 아, 이 점퍼 되게 따뜻하네. 새로 입사했어요? 공장에 와서 처음 보는 얼굴 같은데.”
“…….”
할 말을 잊게 만드는 발랄함이다.
“비 온다고 여자한테 점퍼도 벗어줄 줄 알고, 썩 괜찮은 직원이네요. 고마워요! ……어쩜 사수들은 하나같이 똑같아요? 저 이기심, 지들만 젖나, 우산을 써도 제 머리 먼저 가리는 게 사수라니까요. 언제 입사했어요? 나이를 보아하니 신입 같지는 않고……, 하긴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람. 참, 공장에 대왕마마 아들이 나와 있다고 하던데 본 적 있어요? 그래도 공장은 좋겠어요, 대왕마마 아들을 석 달만 보면 되니까. 우린 이제부터 시작이거든요. 아, 발이 되게 축축하네. 전 화장실에 가서 발 좀 닦아야겠어요. 갈 때 점퍼 돌려 드릴게요.”
신형은 대화의 기본을 무시한 채, 물음표도 마침표도 제멋대로 찍고 공장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여자의 뒷모습을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더럽게 일진 사납던 날
“어머나! 그게 정말이에요?”
깜짝 놀란 얼굴을 한 지인이 비서실장이자 올케인 수빈에게 물었다.
“그렇다니까요, 다음 주 월요일부터 출근하신대요.”
“세상에, 이게 꿈이야 생시야.”
벅찬 감격을 그러모으듯 지인은 두 손을 곱게 모았다.
“아버님도 아직 실감이 안 나신대요.”
시아버지의 말을 전하는 수빈의 얼굴에도 미소가 묻어났다.
“그럼 작은오빠 주말엔 올라오겠네요? 파티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러게 말이에요.”
수빈은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시누이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었다.
“이럴 때가 아니야. 언니, 저 잠깐 회장님 방에 갔다 올게요.”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는 지인은 빠른 걸음으로 회장실로 향했다.
똑똑,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서니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창밖을 내다보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아빠!”
“인석, 회사에선 그러지 말라니까.”
“헤헤, 언니한테 얘기 들었어요. 월요일부터라면서요?”
“아침 일찍 전화가 왔더구나.”
제이어패럴 내에선 대왕으로 통하는 최성도 회장의 입가에도 잔잔한 미소가 깃들었다.
“아직도 전 실감이 안 나요. 작은오빠가 돌아오다니!”
“회사에 들어오면 그간 못 본 얼굴 실컷 보렴.”
“제가 석 달을 어떻게 참았는지 아빠는 모르실 거예요.”
구 년 만에 귀국을 한 작은오빠는 본가에 딱 한 번 얼굴을 들이밀고는, 그 길로 공장에 내려가 지금껏 한 번도 올라오지 않았다. 그 흔한 전화 한 통 없었다.
“전화라도 한번 해 보지 그러니.”
“오빠 얼굴을 봐야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때마침 작은오빠가 귀국을 하던 날 지인은 워크숍에 가 있느라,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원 녀석도, 얼굴을 보기 전에 전화 한 통 하는 게 무슨 대수라고.”
“아빠, 우리 파티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직 일러.”
미소를 거둔 최 회장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던 둘째가 제 발로 귀국한 건, 죽었던 이가 살아났던 것만큼이나 기쁜 일이었다. 하지만 구 년이라는 세월을 홀로 살아낸 아들이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변했을까 생각하면, 명치 한가운데 돌이 박힌 듯 가슴이 답답했다.
“그렇기도 할 것 같네요. 아빠, 그래도 전 너무 기뻐요. 이젠 매일 오빠 얼굴을 볼 수 있잖아요. 출근도 같이해야지.”
손위의 세 남매와 달리 유독 터울이 지는 막내를, 둘째 아들은 제 분신인양 아끼고 예뻐했었다.
오죽 예뻐했으면 대학에 들어간 둘째아들에게 여자 친구가 생기자, 막내인 지인이 집을 나가겠다며 가방을 다 쌌을까.
그런 제 오빠가 구 년 만에 돌아왔는데 선뜻 전화 한 통 하지 못하는 막내딸이었다.
“지인아!”
최 회장은 자상한 목소리로 막내딸의 이름을 불렀다.
“네, 아빠?”
“신형이 말이다.”
“네.”
“당분간은 혼자서 살고 싶다고 하는구나.”
“혼자서요?”
“혼자 지낸 시간이 길다 보니 집에 들어와 사는 게 불편할 수도 있지.”
“하지만…….”
안다. 막내딸과 아내가 둘째아들의 방을 꾸미는데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기다린 김에 조금 더 기다려주자꾸나. 보렴, 안 돌아올 줄 알았던 네 오빠가 돌아왔잖니. 차차 적응해 나가다 보면 집으로 들어오는 날도 있을 게야. 그러니 조금 더 기다려주자.”
“네.”
이내 시무룩해진 지인이 풀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그러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디자인팀의 장한나입니다.”
정말 대단한 여자다.
공장장으로부터 자신이 새로 부임하게 될 디자인팀의 실장이라는 말을 전해 듣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용기라니. 여자는 불과 몇 분 전에 대왕마마 운운했던 일조차 까맣게 잊은 듯한 눈빛이었다.
날씨 덕분에 추레하게 느껴지는 헐렁한 박스 티에 진한 밤색 가우초팬츠를 받쳐 입은 모양새가, 디자이너라기보다는 공장에 아르바이트하러 온 동네 학생 같았다.
오히려 서혜연 과장이라는 여자가 한결 더 디자이너다웠다. 신형으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지만.
덜컥 내려앉은 가슴을 들킬세라 한나는 빠른 걸음으로, 원단을 옮기는 직원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내가 못 살아, 정말!’
평범하기 그지없는 저 인물이 대왕의 아들이리라고 누군들 상상할 수 있었을까. 실장이라는 인물에게 부임 전부터 오지게 찍혔으니, 앞으로의 일은 불 보듯 뻔하다.
“수고하십니다!”
매고 있던 가방을 근처 박스 위에 올려놓은 한나는 수북이 쌓인 원단 한 롤을 번쩍 안아 들었다. 등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기는 밖에서 맞은 빗물이 아니었다. 드물게 식은땀을 흘릴 만큼 긴장한 한나는 씩씩하게 원단을 나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라도 밉보인 첫인상을 만회하겠다는 듯.
“공장엔 무슨 일로 내려온 겁니까?”
신형은 부지런히 원단을 나르는 그녀에게 시선을 둔 채 혜연에게 물었다.
“윤광호 차장님과 미팅이 있어서 내려왔습니다.”
“윤 차장에겐 내가 얘기할 테니 일단 사무실로 갑시다.”
“네.”
최신형 실장과의 운명적인 만남에 넋을 잃을 지경인지라 혜연은 대답과 동시에 그의 뒤를 좇았다. 공장 문을 나서던 그가 뒤따라오던 혜연에게 물었다.
“장한나 씨는 안 데려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