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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시즌2
작가 : 서연
작품등록일 : 2016.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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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화
작성일 : 16-12-08     조회 : 414     추천 : 0     분량 : 5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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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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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냥 공장에서 원단이나 나르다가 윤광호 차장을 만나게 놔둘 일이지…….

 한나는 그다지 넓지 않은 사무실이 여간 불편했다. 하긴 지은 죄가 있으니 편하기를 바라는 게 무리였다.

 최신형이라는 이름도 꽤나 웃기는 남자가 직접 커피를 타 주는 서비스까지 제공했지만, 한나는 시선 둘 곳이 마땅치 않았다.

 “돌아오는 월요일부터 출근하게 될 겁니다.”

 “네, 아침미팅 시간에 들었습니다. 부서통합에 대해서도.”

 양쪽 무릎을 가지런히 모으고 앉은 혜란이 상냥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남자치고는 희다 싶은 피부에 서늘한 목소리를 가진 남자……. 커피 잔의 손잡이를 쥔 손에서도 차가움이 묻어나는 남자…….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차가운 감촉은 말할 수 없는 호기심으로 혜연의 가슴을 콩닥거리게 만들었다.

 ‘아, 이런 남자와 딱 육 개월만 연애해 봤으면!’

 “부서통합은 순차적인 차원에서 이뤄질 겁니다. 오늘 통보를 받은 겁니까?”

 “네, 오늘 처음 들었습니다.”

 뭔가를 생각하듯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한나는 얼른 커피를 마셨다. 젖은 옷이 기분 나쁜 건 그 축축함이 시간이 갈수록 살갗을 파고들기 때문이었다.

 아침나절엔 강풍에 시달리고, 공장으로 내려오는 동안엔 혜연의 망발에 시달리고, 비는 비대로 맞고 새로 부임할 실장에겐 옴팡지게 찍히고. 그걸로 모자라 따뜻한 커피마저 눈치를 봐 가며 마시고 있으니, 제대로 일진이 사나운 날이다.

 하지만 그 커피를 마시는 것조차 한나의 뜻대로 되어주지 않았다. 따뜻하다 못해 약간 뜨거운 커피를 막 입 안에 넣은 찰나, 신형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장한나 씨.”

 “꿀꺽!”

 입천장이 벗겨지게 뜨거운 커피를 그대로 목젖 너머로 삼킨 한나는, 태양처럼 붉어진 양 뺨을 손바닥으로 거머쥐었다.

 한심하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던 신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냉장고에서 꺼낸 작은 생수병을 한나에게 내밀었다.

 “괜찮아요?”

 제대로 입천장을 덴 한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가 내민 생수병을 받았다. 고개를 뒤로 젖힌 그녀는 차가운 물을 입안으로 들이부었다. 아릿하고 쓰린 걸로 보아 분명 입안 어딘가에 물집이 잡힌 모양이었다.

 ‘씨,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원래 컨셉이 그렇습니까?”

 참다못한 신형은 그녀에게 못마땅한 감정을 드러냈다.

 사회생활은 질서와 예의에서 출발한다. 스스로에 대한 질서와 예의, 그리고 타자에 대한 그것들은, 사회인으로서의 한 사람을 규정짓는 견고한 틀이다.

 그런데 장한나라는 여자는 지극히 기초적인 시작점에서부터 벗어나 있었다. 제아무리 매출에 혁혁한 공을 세운 디자이너라고 해도, 원칙을 중요시하는 신형에게 있어 그녀는 치명적인 실격요건을 갖춘 직원이었다.

 “뭐가요?”

 입가에 묻은 물기를 손등으로 훔쳐내는 모습까지, 무엇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는 여자다.

 동행한 다른 디자이너와 자신이 얼마나 비교되는지, 전혀 파악하지 못하는 여자임이 분명했다.

 “초면에 이런 말을 한다는 게 실례인 건 알지만, 장한나 씨는 기본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 같군요.”

 “기본이요?”

 여자는 기본에만 불충실한 게 아니었다. 무안함이 무엇인지 또한 모르는 것 같았다. 두 눈을 크게 뜨고 되묻는 모습이라니.

 원칙주의자 최신형은 여자에 대해 두 가지 원칙을 갖고 있다.

 하나는 결코 여자를 솔직하게 대하지 않는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여자와 말씨름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만 합시다.”

 괜한 기운을 장한나라는 여자와 말씨름을 하는데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책상 앞으로 걸어간 그는 디자이너 팀에 대한 자료가 담긴 파일을 들고 소파가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소파에 앉은 신형은 파일을 펼쳤다.

 여전히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혜연과 달리 순간 한나의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파일 가장 첫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일러스트의 오묘한 색채감과 시크한 라인은 그녀로 하여금 침을 꼴깍 삼키게 했다.

 칼 라거펠트(Karl Lagerfeld)와 지미추(Jimmy Choo)가 울고 갈 정도로 단순한 색채의 조화는 단번에 한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누구 작품일까?’

 조금 전에 제대로 한 방 먹은 일만 아니라면 묻고 싶었다. 대체 그 일러스트를 어디서 구한 것인지.

 스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그가 파일을 한 장 더 넘기는 바람에, 한나의 눈요기는 거기에서 그칠 수밖에 없었다.

 “장한나 씨, 잇걸과 에스투의…….”

 “에스투가 아니라 시즌투인데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끼어드는 한나를 바라보며 그는 잠시 미간을 구겼다.

 “좋습니다, 시즌투와 잇걸의 기획과 네이밍을 장한나 씨가 직접 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네.”

 “타깃을 겨냥한 겁니까, 아니면 트렌드를 반영한 겁니까?”

 “당연 타깃이 먼저죠. 아무리 획기적인 트렌드를 반영한다고 해도 타깃 선택이 잘못되면 매출부진을 면치 못하니까요.”

 “어떤 의도로 이 두 브랜드를 기획하게 됐는지 듣고 싶군요.”

 “그전에 여쭤볼 게 있어요.”

 “말씀하세요.”

 그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혜연이 옆에 앉은 한나의 손목을 슬쩍 잡았다. 하지만 그런 사수의 제동에 굴할 한나가 아니다.

 “기본에 충실한 디자이너의 대답을 듣기 원하세요, 아니면 솔직한 대답을 듣기 원하세요?”

 “후자 쪽의 대답을 듣고 싶군요.”

 “지갑을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자주 오픈하는 대상을 타깃으로 했어요.”

 잇걸과 SⅡ의 기획과 네이밍 덕분에 포상을 받고 연달아 두 번 해외여행을 다녀온 한나였다. 소신 있게 대답을 한 그녀는 알맞게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게 전부입니까?”

 “그 이상의 타깃 선정요건이 또 있나요?”

 솔직하게 대답을 했건만 최신형이라는 사람은 한나 자신의 대답이 영 마음에 안 드는 표정이었다.

 ‘쯧쯧, 당신도 날 그리 좋게 안 봤겠지만, 나 역시 마찬가지라네.’

 떨떠름해하는 그의 시선을 못 본 체하며 한나는 잔에 남은 커피를 홀짝거렸다.

 

 “장 대리, 실장님한테 그게 뭐야?”

 오늘은 이래저래 터지는 날인가 보다. 공장에서의 일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는 내내, 혜연은 오만 잔소리를 다 늘어놓았다.

 “전 틀린 말 한 거 없는데요.”

 “아까 실장님께서 뭐라고 하셨어? 기본이 안 됐다잖아, 기본이! 어떻게 그런 말을 듣니.”

 한나는 씩 웃어주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았다. 시즌별 디자인작업을 할 때마다 팀장인 김규원 부장에게 가장 심한 말을 듣는 사람이 혜연이었다.

 “장 대리는 내가 봐도 기본이 안 됐어. 윗사람이 무슨 말을 하면 고분고분하게 듣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니?”

 “과장님, 저만큼 상사 말 잘 듣는 후배 본 적 있으세요? 어떤 후배가 사수 연애담까지 다 들어준대요?”

 귀가 경기를 일으킬 만큼 인내에 인내를 거듭한 오늘이다.

 안 그래도 실장이란 인간에게 제대로 찍힌 탓에 마음이 심란한데, 눈치코치 없는 혜연 때문에 생각을 정리할 겨를이 없다.

 “그건 그렇고 최신형 실장님 어때?”

 “뭐가요?”

 “어쩜 남자가 그렇게 시크(Chic)할 수가 있지? 완전 내 스타일인 거 있지. 장 대리가 보기엔 어때?”

 “사람이 많이 드라이해 보이던 걸요.”

 “쯧쯧, 장 대리, 정말 남자 보는 눈 없구나. 원래 그렇게 차갑게 느껴지는 사람이 속은 진실하고 자상한 거야. 장 대리, 연애 한 번도 못 해 봤지?”

 “잘 아시네요.”

 “그럴 줄 알았어.”

 온 종일 참고 있던 구역질이 한꺼번에 넘어오려고 했다.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해진 옛일을 자극하는 혜연에 대한 강한 반감 때문이 아니었다. 짧은 하루 동안 너무 많은 일들을 겪었기 때문이었다.

 한나는 장담할 수 있었다. 시야에 본사 건물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조수석의 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내렸을 거라고.

 많은 사람들이 묻는다. 아니, 궁금해 한다. 패션디자이너가 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자질이 필요한지.

 미적 감각? 트렌드를 내다볼 줄 아는 예언자적 거시안(擧示眼)? 머릿속에 그려진 미적 감성을 쓱쓱 스케치할 수 있는 예술가적 자질?

 그런 것들이 불필요하다는 건 아니지만, 하여간 그런 것들은 부차적인 수준의 필요조건이었다.

 경력 7년차 디자이너인 한나가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주장하는 패션디자이너의 기본적 자질은 두 가지였다.

 체력과 정신력.

 제아무리 강철 체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도 이 바닥에 들어와 시다바리 생활 1년을 거치고 나면, 물먹은 솜뭉치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체력이 아무리 고갈된다고 해도 쏟아지는 일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 그럴 땐 잠시 체력을 내려놓고 정신력으로 승부를 해야 했다.

 출근시간은 있으나 퇴근시간은 없는 직업. 한나에게는 연수 기간을 제외하고 6시 정각에 칼퇴근을 해 본 기억이 없었다.

 공장에 다녀오느라 사무실에서 하지 못한 일은 오늘 밤 야근이라는 미명하에 감행해야 했다.

 “잘들 다녀왔어?”

 사무실로 들어서자 팀장인 김규원 부장이 두 사람을 따뜻한 얼굴로 맞아주었다. 부장은 일명 두 얼굴의 사나이였다. 평소엔 이웃집 아저씨처럼 털털한 성격을 자랑하지만, 작업 앞에서는 실낱같은 실수 하나 용납하지 않는, 헹거 뒤집기를 시침핀 꽂는 것처럼 자유자재로 감행하는 정말 무서운 팀장이었다.

 신입 시절, 한나는 최고사수이던 그가 뒤집어놓은 헹거를 챙기는 일을 도맡아 했다.

 들뜬 표정으로 공장에서 최신형 실장을 만난 일을 미주알고주알 털어놓는 혜연을 뒤로 한 채 그녀는 책상 앞으로 다가섰다.

 “멀미했어?”

 지민이 그렇게 물어오는 걸 보니 얼굴이 누렇게 뜬 모양이었다.

 “심하게.”

 짧게 대답한 한나는 의자에 앉았다.

 모서리에 손때가 묻은 스케치 더미와 오늘 밤 눈알이 빠지게 작업을 해야 할 스와치가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제 온 거니, 하면서.

 “어이, 장 대리, 송 차장한테 가 봐.”

 숨을 채 돌리기도 전에 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무실에서의 일과를 마치고 퇴근을 준비하던 신형은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근처에 왔던 길에 들렀는데 잠깐 얼굴 볼 시간 되니?]

 형이었다.

 제이어패럴의 기획이사라는 직함에 걸맞게 아버지의 오른팔 노릇을 든든히 하고 있는 형이었다. 그 형이 이 시간에 공장 근처에 다녀갈 일이 있을까…….

 작위적인 행동은 서로를 불편하게 했다. 지극히 자연스러워야 마땅한 동기간이 불편해진 그 이유를 신형은 모르지 않았다. 모든 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자신이기에.

 원형은 그의 대답을 듣고 난 뒤에야 공장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많이 바쁘니?”

 “아니야, 이제 막 퇴근하려던 참이었어.”

 석 달 전 본가에서 보고 난 뒤 처음 보는 동생이었다. 월요일부터 본사로 출근하게 됐다는 말을 전해 듣고, 감격을 견디지 못해 그만 천안까지 내려오고 말았다. 신형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 짙은 회한이 서렸다.

 “나가서 저녁이나 같이 먹자.”

 “그러지.”

 오래전 그날 이후, 동생에게 말 한마디 건네는 일조차 조심스러워졌다. 식사 한 끼를 하는 일마저 동생의 입에서 거절의 말이 나올까 봐, 조심조심 그의 표정을 살펴야 하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근처에 음식 잘하는 곳 아는 데 있니?”

 “차 타고 나가다 보면 있겠지.”

 정리를 마친 신형은 책상 의자에 걸쳐둔 감색 점퍼를 집어들었다.

 “다 된 거야?”

 “응, 나가면 돼.”

 실없는 우스갯소리를 곧잘 하던 동생의 모습을 그리워한다는 것이 부질없는 짓이라는 걸 알지만, 원형은 목석처럼 차갑게 변한 동생을 보며 아픈 가슴을 쓸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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