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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시즌2
작가 : 서연
작품등록일 : 2016.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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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화
작성일 : 16-12-08     조회 : 404     추천 : 0     분량 : 5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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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장님, 찾으셨다면서요?”

 치프 디자이너답게 독립된 작업실을 갖고 있는 강현자 차장은 한나가 흠모해 마지 않는 선배였다. 그녀를 흠모하는 게 아니라 독립된 공간을 갖고 있는 치프 디자이너의 자리를 흠모하는 것이었다.

 “왔어? 잠깐만.”

 작업대 앞에 선 현자는 송지은 디자이너에게 가르쳐주던 것을 마저 설명하기 시작했다.

 “지은 씨, 여기 잘 봐봐. 다트 선이 이 지점에 들어가 있으면 어깨 동선 폭이 이만큼 짧아지는 거야. 차라리 이렇게 할 바엔 3/4 지점쯤 내려온 곳에 형식적인 다트를 넣어주는 게 낫지. 이해돼?”

 “네, 차장님.”

 “이해 안 되면 안 된다고 얘기해. 난 지은 씨처럼 내성적인 사람이 제일 무서워.”

 “아니에요, 이해됐어요. 알려주신 것처럼 위치 바꿔서 다트선 정하고 다시 보여드릴게요.”

 “그래, 그만 나가 봐.”

 지은이 작업실을 나가자, 그녀는 한나에게 차를 마시겠느냐고 물었다.

 “아니요, 차는 됐어요.”

 “왜 그렇게 실실 웃어? 내가 좋은 일로 불렀을 것 같아서?”

 “아니요, 지은 선배 말이에요, 볼 때마다 어쩌면 저렇게 여성스러울까 싶은 마음이 들어요.”

 “타고나길 여자잖아.”

 서른두 살의 송지은 대리는 제이어패럴 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요조숙녀였다. 요란한 공주 과에 속하는 혜연과는 차원이 다른, 진정한 여성스러움이 뚝뚝 묻어나는 그런 여자였다. 치프인 강 차장이 그녀를 유독 예뻐하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차장님, 제가 지은 선배 벤치마킹 하면 어떻게 될까요?”

 “아서라. 그 꼴을 어떻게 보니. 그보다 이리 좀 앉아 봐.”

 한나는 그녀의 맞은편에 자리하고 앉았다.

 “왜 그러시는데요?”

 “지난주에 네가 가져다준 일러스트 말이야. 그게 현실적으로 소화가 가능하니?”

 “당연하죠.”

 “너 말고, 대중이 소화할 수 있느냐 말이지.”

 “분기 매출 자신해요.”

 “내가 네 그 말을 믿어야 하는 거니?”

 “여태 그러셨잖아요.”

 “잇걸에서 지금껏 그렇게 파격적인 디자인을 선보인 적이 없어서, 나부터도 망설여져. 실험적으로 덤벼보자, 그렇게 생각하기엔 위험부담이 상당히 크거든.”

 “차장님답지 않게 소심하시기는. 그거 제가 장담한다니까요.”

 “넌 뭐든 장담하는 애잖아. 보스가 새로 들어오는 상황이라 이번엔 전 같지가 않아.”

 작업실에 들어선 순간 스르르 이완되던 긴장이 관자놀이 근처를 가격했다. 드물게 치프 디자이너인 현자로부터 캔슬이라는 걸 당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돌먼소매의 롱 셔츠를 어떻게 디자인했는데…….

 “차장님, 진심으로 하는 말씀이세요?”

 “내가 언제 장 대리 디자인 갖고 이러는 거 봤어? 한데 이건 위험부담이 너무 커. 자칫 잘못하면 지금까지 쌓아온 잇걸의 이미지에 어마어마한 데미지가 발생할 수도 있어.”

 “진심이죠?”

 “얘가……, 너 무섭게 왜 그래?”

 “차장님도 한 고집 하고 저도 한 고집 하는데, 피차 진심 정도는 확인하고 넘어가야죠.”

 “무슨 폭탄을 선언하려고?”

 “후우…….”

 양 볼에 바람을 가득 넣은 한나는 앞머리가 날릴 정도로 세게 한숨을 쉬었다.

 평범한 소재에 결코 평범하지 않은 디자인을 담느라, 발바닥에 못이 박힐 정도로 원단시장을 쫓아다니며 완성한 작품이었다. 그런 작품이 고작 브랜드 이미지에 대한 위험부담이라는 시시한 이유로 캔슬이 나다니.

 고단했던 하루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스트레스가 밀려들었다.

 “장 대리, 그럼 이 작품은 잠시 보류했다가 실장님이 자리를 잡은 뒤에 그때 다시 논의하는 게 어때?”

 한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트렌드의 이슈를 먹잇감처럼 잽싸게 낚아채는 독수리. 조금만 늦어도 다른 독수리에게 먹잇감을 빼앗기는 분명한 승부의 세계. 그곳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강현자 차장이었다.

 전의의 상실은 불쑥 치밀어 오르는 저항에 불을 붙였다.

 “폭파시킬래요.”

 “장 대리, 내 말은 그런 게 아니잖아.”

 “제품 디자인의 생명은 시간에 있다는 거 차장님이 더 잘 아시잖아요. 실장님이 자리를 잡고 난 뒤에 다시 생각한다는 게 말이 돼요?”

 “지금껏 쌓아온 잇걸의 이미지는?”

 “어떻게 위험부담 없이 발전을 꿈꿔요?”

 “그래도 이건 너무 파격적이라…….”

 “전 이 순간 제 머릿속에서 그 디자인 지울 거니까 차장님도 그렇게 하세요.”

 벌떡 자리에서 일어선 한나는 작업대 벽면에 꽂혀 있는 자신의 일러스트를 떼어냈다.

 “장 대리, 마음 상했니?”

 “안 상했다고 하면 거짓말이죠.”

 서운한 눈빛으로 현자를 바라본 그녀는 작업실을 빠져나왔다.

 

 포터블 가스레인지 위에 놓인 냄비 안에선 뻘건 국물의 감자탕이 바글바글 소리를 내며 끓고 있었다. 원형은 잔에 소주를 따라주는 동생을 먹먹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추적추적 비 내리는 날의 저녁, 얼큰한 감자탕에 소주잔을 기울이는 일은 그리 어색한 게 아니지만, 동생에게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퇴근을 하면서도 벗지 않은 감색 점퍼 때문일까. 기억하고 있는 동생과 지금 눈앞에 앉아있는 동생이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실의와 절망에 스스로를 내던진 그때가 동생의 나이 스물세 살이었으니, 무심히 흘러간 세월을 탓해야 하는 걸까.

 “내일 밤에 올라오는 거니?”

 “그렇게 하려고.”

 “아버지한테 얘기 들었다. 당분간 밖에서 지낼 거라며?”

 “혼자 지내는데 익숙하니까.”

 “지인이 녀석, 많이 서운해 하더라. 너 들어온다고 방을 얼마나 정성껏 꾸몄는지…….”

 “형, 잔 비었어, 술 받아.”

 형의 말을 자른 신형은 그의 잔에 소주를 따라주었다.

 잔인하게 잘라낸 기억…….

 하지만 그 끄트머리에 매달린 기억들은 드문드문 참기 힘든 고통이 되어 엄습해왔다.

 “회사 근처 빌라에서 지낼 거라며?”

 “응, 그렇게 하려고.”

 “내일 저녁에 빌라로 갈게.”

 “안 그래도 돼. 나를 짐도 없는 걸.”

 “술이 제법 늘었구나?”

 “형은 주량이 어떻게 돼?”

 “소주?”

 신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주는 한 병 정도.”

 “그럼 나하고 대작 못 하겠네. 난 네 병.”

 “미쳤구나, 네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원형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네 병쯤 마시고 나면 배가 불러서 더 못 마셔.”

 “취하는 게 아니고?”

 “취해 본 기억이 없어.”

 “좋아, 네 그 말을 언젠가 눈으로 확인해 보겠어.”

 동생에게 술을 따라준 그는 잘 익은 감자탕을 접시에 덜었다.

 사람의 생각은 늘 아쉬운 것들을 먼저 떠올린다. 비 오는 저녁 동생과 소주잔을 기울일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하는 생각은 뒷전으로 미뤄둔 채…….

 감자탕이 수북하게 담긴 접시를 동생의 앞에 놓아주며, 그는 차마 소리 내지 못하는 말을 마음으로 속삭였다.

 ‘고맙다, 신형아.’

 

 밀려 있는 일을 생각하면 자정이 넘어 퇴근해야 옳았지만,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한나는 9시가 조금 넘자 가방을 둘러매고 회사를 나섰다.

 일진이 사나운 날이 아니라 불운한 날이었다.

 회사 근처 편의점에서 투명한 비닐우산을 산 그녀는 일원동 행 버스에 올라탔다.

 ‘두고 보라지!’

 사회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든 순간이 있다면, 그건 조직이라는 곳이 자신의 최선을 나 몰라라 할 때였다.

 단세포생물이 아닌 이상 한나에게도 생각은 있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이러면 안 된다는 것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무지 분이 풀리지 않을 거라는 것 또한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린 그녀는 우산을 받쳐 쓰고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섰다.

 “어머! 너 옷이 그게 뭐야?”

 문을 열어준 보영이 보자마자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종일 얼어 죽는 줄 알았어. 나 이러고 천안 다녀온 거 알아?”

 “미친다, 정말. 빨리 들어와.”

 “신랑님은?”

 한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거실 쪽에서 귀에 익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한나 씨.”

 “희태 씨!”

 그녀가 어울리지 않는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거실로 달려가자, 보영이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대학친구인 지민과 달리 보영은 복장학원에서 알게 된 친구였다. 패션디자이너로 일하던 그녀는 결혼과 동시에 전업주부로 들어앉았다. 한나가 오늘 그녀의 집을 찾은 건 모 그룹의 내셔널브랜드 MD인 희태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저녁은 먹었어요?”

 “저희 회사가 다른 건 몰라도 밥은 꼬박꼬박 잘 주잖아요.”

 “그럼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얘기하면 되겠네요.”

 “커피 타 올 테니까 얘기하고 있어요.”

 어느새 가정주부 티가 폴폴 나는 보영이 주방으로 향하자, 한나는 들고 온 쇼핑백에 넣어온 일러스트를 꺼냈다.

 “이게 아까 말씀드린 작품이에요.”

 희태는 그녀가 건넨 일러스트를 차분하고도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그는 친구 남편으로서는 한없이 속이 넓고 자상한 사람이지만, 동종업계 종사자의 눈으로 봤을 때에는 사정없이 날카로운 사람이었다.

 “치프가 캔슬을 놨다고 했나요?”

 “캔슬이라기보다……. 이번에 저희 디자인실의 실장님이 새로 오시거든요.”

 “얘기 들었어요, 최 회장님 아드님이라지요?”

 “차장님 입장에선 실장님의 마인드를 모르니까 다소 파격적인 이 작품을 출시하는 게 조심스러우신가 봐요.”

 “음……. 강 차장님한테는 얘기하고 온 거예요?”

 “그럴 리가요.”

 정곡을 찌르는 희태의 말에 도둑질을 한 것처럼 가슴이 뜨끔거려왔다.

 “난 이 일러스트, 아주 마음에 들어요. 하지만 제이어패럴하고 껄끄러워지고 싶지는 않은데, 어떻게 하죠?”

 “정말 마음에 드세요?”

 “실루엣 자체가 시선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어요. 소재 선택도 상당히 다양할 것 같고.”

 “그렇죠? 디테일 없이 그만한 실루엣을 연출하는 옷은 정말 드물거든요.”

 “일단 캔슬에 대해서 확실하게 정리를 하고 난 뒤에, 나한테 다시 얘기해 주겠어요?”

 역시나 칼 같은 인간이었다. 매출 100%를 보장하는 일러스트를 보여주는데도 선뜻 동요하는 내색을 하지 않다니.

 “차장님한테 없던 일로 하자고 얘기하고 왔어요. 아주 깨끗하게 끝낸 작품이라고요.”

 “확실한 거예요?”

 “설마, 제가 끝도 안 맺어놓고 희태 씨를 찾아왔겠어요. 그건 염려 안 하셔도 돼요.”

 진짜냐고 되묻는 듯 희태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하지만 한나는 한 번 더 자신의 말을 강조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영 못 믿기면 안 해도 된다는 듯,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희태가 ‘확실해요?’라고 물어올 수 없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일러스트를 꼭 쥐고 있는 그의 손이 이미 대답을 들려주고 있었다.

 “무슨 얘길 하는데 그렇게 심각해요?”

 어느새 커피를 타 가지고 나온 보영이 소파에 앉는 순간에도, 그는 일러스트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러면 그렇지, 한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사랑 따위는 믿지 않아

 

 

 다음날.

 여섯 시 칼퇴근의 기쁨은 다음날인 토요일에 출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충분히 상쇄시켜주었다.

 토요일 출근이 한 두 번인가. 일요일은 물론 국정 공휴일에도 출근을 마다하지 않는 고된 직업군에 뛰어들면서, 쉬는 날에 대한 개념은 잊은 지 오래였다.

 하긴 내일 출근해야 하는 건 업무와는 사뭇 관계가 있었다.

 돌아오는 월요일 정식 첫 출근을 앞둔 실장이 내일 디자인실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러 온다는 것이 출근의 명목이니.

 어쨌거나 드물게 정시 퇴근을 한 한나의 기분은 하늘을 날아오를 것만 같았다. 어제에 이어 여전히 스산한 날씨도, 추적추적 그칠 줄 모르고 내리는 빗줄기도, 가벼운 그녀의 기분을 적시지는 못했다.

 평소 시간이 나면 가보고 싶은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지만, 오늘은 집에서 푹 쉬기로 했다.

 “기분 되게 좋아 보이네?”

 동행한 지민이 물어오자 그녀는 말도 말라는 듯 두 어깨를 으쓱 들어 보였다.

 두 사람은 근처 마트에서 장을 봐 가지고 한나의 집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요리에 남다른 일가견을 갖고 있는 지민이 근사한 저녁을 차려주겠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평소 냉장고 안에 말라비틀어진 베이글과 유통기한이 아슬아슬한 베이컨 몇 봉만을 넣어두고 사는 한나에게 이런 저녁은 선물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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