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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용알과 언년이
작가 : 서연
작품등록일 : 2016.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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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화
작성일 : 16-12-08     조회 : 832     추천 : 1     분량 : 5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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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롤로그]

 

 

 “굿모닝, 아들!”

 누가 듣기에도 사랑이 가득 묻어난 목소리가 재하의 선잠을 털어내었다. 쪽, 소리가 나게 뺨에 입을 맞추는 어머니의 체취를 맡으니 그의 입가에 천진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만 일어나야지, 엄마가 커피 타 왔어.”

 경쾌한 왈츠를 떠올리게 하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화답하듯, 그는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기자기한 문양이 그려진 잔에 담긴 커피를 보자 비로소 집에 돌아왔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는 듯했다.

 “푹 잤지? 에구, 볼살이 홀쭉해졌네.”

 “엄마는?”

 “엄마야 벌써 마셨지, 시간이 몇 신데. 아무리 일이 많아도 그렇지, 몸을 살펴가면서 해야지. 아주 반쪽이 됐네그래.”

 듬뿍 과장된 어머니의 염려에 재하는 언뜻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말이 좋아 출장이지 이 개월 동안 이런저런 유희거리들을 좇느라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분주했었다.

 서울에서 태어나 꼬박 삼십 년을 서울에서만 살아온 그에게, 제주도라는 공간은 난생 처음 바다를 마주 봤을 때처럼 그의 가슴을 탁 트이게 했다. 굴레를 벗어버린다는 홀가분함과 함께.

 “누가 보면 외국이라도 다녀온 줄 알겠네.”

 여전히 자신에게 고정된 어머니의 시선을 피하며 재하는 커피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환한 모카 빛깔의 커튼이 드리운 창가를 향해 걸어가던 그가 혼잣말을 하듯 물었다.

 “밖에 비 와?”

 “새벽 내내 왔어.”

 겨울비라……. 가히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엄마가 내려가서 아침 차려놓을 테니까 커피 마시고 천천히 내려온.”

 한순간도 아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선자에게 고개를 끄덕인 재하는, 빗소리에 이끌린 사람처럼 창에 드리운 커튼을 거둬냈다.

 침울한 날씨를 기대했던 그에게, 조금 뒤면 개일 것 같은 하늘과 가느다랗게 내리는 빗줄기는 생각지 못한 활력을 가져다주었다.

 “음, 좋네…….”

 재하는 향기만큼이나 고소한 커피로 입술을 축였다. 굴레 밖의 자유와 굴레 안의 편안함이 작은 충돌을 일으키는 순간이었다.

 ‘뭐든 아쉽다 싶을 때 그만둬야 하는 거겠지.’

 짧은 지난 두 달의 외유에 대한 미련을 거둬내며, 그는 창을 열고 테라스로 나섰다. 또 다른 한 겹의 유리에 쌓인 하늘을 보기 위해.

 겨울로 들어서면서 한 번도 열어본 적 없는 테라스의 창을 열며, 그는 모처럼의 여유를 부추겨 줄 빗소리를 기대했다. 하지만…….

 간지럽다는 표현이 맞아떨어지는 이상한 음악 소리가 그의 미간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보나 마나 사람들의 시선을 끌려는 장사꾼의 차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소리려니, 생각한 그의 귀에 이상한 흥얼거림이 들려왔다.

 날 찾아오신 내 님, 어서 오세요

 당신을 기다렸어요

 라이라이야 어서 오세요

 당신의 꽃이 될래요

 어디서 무얼 하다 이제 왔나요

 당신을 기다렸어요

 라이라이야 어서 오세요

 당신의 꽃이 될래요……

 소리의 진원지를 좇던 재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검은 비닐 봉투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양쪽 바지를 한껏 추켜올린 채, 커다란 함지박에 들어가 있는 힘껏 무언가를 질근질근 밟고 있는 여자의 모습이, 언뜻 ‘비 오는 날의 그녀들’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사랑의 꽃씨를 뿌려 기쁨을 주고

 서로 행복 나누면 니이 라이라이라이라야~

 당신은 나의 나무가 되고 니이 라이라이라이라야~

 하지만 재하의 흥미를 잡아끈 여자의 가무(歌舞)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어디선가 등장한 중년 여자가 비닐 봉투를 머리에 쓴 여자의 등짝을 힘껏 내리치면서, 노래는 늘어날 대로 늘어난 카세트테이프에서 새나오는 소리처럼 작은 웅얼거림으로 변해갔다.

 “나는 당신의 꽃이 될래요… 아, 왜 때려!”

 “이것이 아주 비만 오면 굿을 하네, 굿을 해, 당장 못 나와!”

 “엄마, 아파, 아야, 아야!…”

 어깻죽지를 잡힌 채 끌려나가는 여자를 보며 쿡쿡대던 재하는, 조금 전까지 여자가 발을 담그고 있던 함지박을 본 순간, 거짓말처럼 웃음을 거둬냈다. 어처구니가 없어 할 말을 잃는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난생처음 느꼈던 자유가 일탈의 유혹을 허락했던 것처럼, 난생처음 본 쇼크는 뜨거운 커피를 그의 입안으로 털어 넣게 만들었다.

 

 

 1. 용알, 착하고 어진 그녀에게 꽂히다

 

 

 말봉(唜峯)은 값비싼 배추를 원 없이 발로 짓밟은 딸의 등짝을 한 번 더 내리쳤다.

 “아, 그만 때려! 아프단 말이야!”

 “그럼 아프라고 때리지, 간지러우라고 때려! 하기 싫으면 싫다고 말을 하던가, 아까운 배추를 왜 발로 질근질근 밟아, 밟긴!”

 “배추 하루 이틀 절이나.”

 “한 번만 더 삼투압이니 사투압이니 해 봐, 아버지한테 일러줄 테니까.”

 아버지라는 말에 불퉁스럽던 딸의 입술이 순간 한일자로 다물어지는 걸 놓칠 리 없는 말봉이다.

 청승맞게 빗물이 고인 비닐 봉투를 머리에 뒤집어쓴 막내딸을 보자, 말봉 역시 입이 다물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한창 좋은 나이에 남들이 하기 마다하는 일을 하려니, 어디 짓밟고 싶은 것이 배추뿐이랴 싶었다.

 “감기 들어, 어여 들어가서 옷 갈아입어.”

 “배추는?”

 배추에 대한 미련을 드러내는 딸을 향해 말봉이 손을 번쩍 들었다. 아무리 좋게 봐 주려고 해도 좋게 봐 줄 수가 없는 저놈의 고집이란.

 “알았어, 들어가면 되잖아!”

 신경질적으로 비닐 봉투를 머리에서 벗겨 낸 막내딸이 현관을 향해 걸어가자, 말봉은 그제야 함지박에 담긴 배추들을 들여다보았다. 짓이겨진 배춧잎들을 보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 짓을 언제까지 해야 하나 싶어서 나오는 한숨이었다.

 “에구구구…”

 내리 여섯 명이나 되는 자식을 낳고 키우느라 진즉 고장 난 무릎에서 우두둑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말봉은 일단 함지박을 기울여 그 안에 고인 물을 바닥에 따라냈다. 일그러진 스물다섯 청춘의 한을 실은 소금물이 경사진 마당을 따라 수챗구멍으로 흘러들었다.

 

 “잘들 간다.”

 윤지는 젖은 머리카락을 타월에 비비며 열한 시 삼십 분을 지나는 시곗바늘을 올려다봤다. 넷째 언니가 신혼여행지에서 사다 준 허브 샴푸의 상쾌한 향기를 암울한 겨울 오후에 반납할 생각을 하니 어디론가 도망이라도 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 입으로 두말하는 인물, 나는 자식으로 안 친다!’

 먹장구름 같은 후회가 밀려들었지만 이미 때늦은 일이었다. 힐끔 곁눈질로 한 번 더 시간을 확인한 윤지는 얼른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자신의 속을 알아줄 누군가의 위로가 절실했다.

 몇 번의 신호음 끝에 넷째 언니의 잠에 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니!”

 [음… 아침부터 어쩐 일이야?]

 적당한 애교로 연민과 위안을 받아내려던 마음도 잠시, 팔자가 좋다 못해 늘어진 언니의 목소리에 윤지는 왈칵 화가 나는 것 같았다.

 “팔자도 좋지, 지금이 몇 신데 여태 자고 있는 거야?”

 [비 오니?]

 역시 피는 물보다 진했다.

 “응.”

 [보슬비야?]

 “응.”

 역시나 선험자의 예감이었다.

 [생리는?]

 “휴우, 이 주나 남았어.”

 [심심한 애도를 표한다, 막내야.]

 “언니!”

 [동병상련을 구하나 본데, 막내야, 이 언니는 진즉 자유를 찾았단다.]

 “언니, 결혼하니까 좋아?”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지. 왜, 결혼하게?]

 “철가방이 나아, 결혼이 나아?”

 [호호호, 얘,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언니가 한 번 알아봐 줄까?]

 “뭘?”

 [괜찮은 남자 말이야.]

 “휴우… 됐어.”

 [말로만 엄살이구나. 아직 할 만한가 보네?]

 “할 만하긴 뭐가 할 만해! 언니마저 훌쩍 가 버리고 나니까, 내 일이 얼마나 많아졌는지 알아? 배신자!”

 [호호, 계집애, 목소리는 진짜 커졌네.]

 “넷째 언니 말을 들은 내가 바보야.”

 [어머, 이젠 원망까지? 언제는 고맙다고 한턱까지 내더니.]

 “몰라, 몰라. 짜증이 머리끝까지 꽉 찼어. 언니, 나 다시 공부할까? 그래서 윤남 언니처럼 유학 갈까?”

 [갑자기 아버지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다, 얘.]

 ‘될성부른 놈은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했어. 호박에 줄 긋는다고 오이 되는 거 봤어? 황새가 뱁새 흉내 내는 건 해롭지 않아도, 뱁새가 황새 흉내 내는 건 명줄을 내놓는 거야!’

 “휴우!”

 [때늦은 후회에 발등 무너질라.]

 “자던 잠이나 마저 자.”

 [계집애, 잠은 다 깨워놓고.]

 “그럼 와서 배달이라도 해 주던가.”

 [됐. 거. 든!]

 정말 잠이 확 달아나기라도 했는지 넷째 언니 윤형의 발음이 정확해졌다.

 “나, 나가볼래. 끊어.”

 풀 죽은 목소리로 전화를 끊은 윤지는 한 번 더 시간을 확인했다. 머리를 드라이어로 말릴 시간을 포기한다면 대략 오 분 정도는 수다를 떨 수 있을 것 같았다.

 080으로 시작되는 전화번호를 누르며, 윤지는 시간이 지날수록 알 수 없는 거리감을 느끼게 되는 다섯째 언니의 얼굴을 떠올렸다.

 [네, 인윤남입니다.]

 “언니, 나 윤지.”

 [잘 지내니?]

 역시나 실망시키는 법이 없는 다섯째 언니였다. 잘 지낼 상황이 아니란 걸 뻔히 알면서도, 마치 거래처 사람을 대하듯 똑 떨어지는 말투라니.

 “그냥 그렇지, 뭐.”

 [별다른 일이 있는 건 아니고?]

 “어?, 어.”

 [윤지야 언니가 지금 학교에 가야 하거든.]

 “알았어, 나중에 통화해. …비 오는데 조심해서 잘 다녀와.”

 [거기 비 오니?]

 불과 한 시간 남짓한 거리라지만 엄연히 바다 건너 남의 나라인데, 그 사실을 까맣게 잊다니…….

 “으응.”

 [후후, 고생이 많겠구나.]

 “끊을게, 언니. 공부 열심히 해.”

 전혀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듯 고상하게 구는 다섯째 언니의 말투가 윤지의 비위를 거슬렀다. 자욱한 한숨 소리에 수화기를 내려놓는 소리가 묻혔다.

 “에구, 이놈의 팔자!”

 윤지는 절로 새 나오는 팔자타령을 감추지 못한 채 머리에 두르고 있던 타월을 바닥에 내려놓고, 터틀넥 스웨터와 아마 두어 시간쯤 뒤엔 단이 흠뻑 젖게 될 청바지를 꺼내 입었다.

 

 “2동 497번지, 짬뽕 셋, 탕수육 하나요!”

 ‘홍화 반점’이란 간판이 붙은 가게 안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귀퉁이가 찌그러진 철가방이 기다렸다는 듯이 윤지에게 날아들었다.

 “아, 좀 살살 줘요!”

 던지다시피 가방을 내민 외삼촌 형만에게 윤지가 볼멘소리를 했다.

 “이것아, 배달이 얼마나 밀렸는데 이제 나오는겨!”

 홀에 앉아있는 손님들을 의식한 석구가 뇌까리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성질 급한 집이니까 후딱 다녀와. 오면서 칠성 슈퍼에 들러서 그릇 찾아오고.”

 “네.”

 윤지는 축축한 머리를 덮은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쓴 채 터벅터벅 가게를 빠져나왔다. 그나마 고단한 삶의 위안이 되어주는 수철이 안 보이는 걸 보면, 그 역시 한참 배달을 하고 있는 중인 것 같았다.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애마(愛馬)에는 ‘홍화반점’이란 흰색 글자를 각인해 넣은 빨간 바탕의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윤지는 오직 배달을 위한 목적으로 아버지가 사 준 중고 다마스에 철가방을 집어넣고 조금 전 외삼촌으로부터 전해 들은 지번(地番)을 한 번 더 떠올렸다.

 머리를 감을 때까지만 해도 잦아드는 것 같던 빗줄기가 조금씩 더 굵어지는 것 같았다.

 “에잇, 차라리 눈이 오지, 칙칙하게 한겨울에 비가 뭐야.”

 와이퍼가 긁어내는 물줄기를 노려보며 윤지는 짜증 난 목소리를 웅얼거렸다. 하지만 이미 시작된 배달의 시간, 일순간의 지체도 있어선 안 되는 일이었다. 오디오의 파워 버튼을 누르자 수철이 구워준 씨디에서 흥겨운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와 동시에 윤지의 입가에도 기분 좋은 미소가 그려졌다.

 “그래, 까짓것 사람이 못 할 일이 어디 있겠어. 기왕 하는 거 좋은 기분으로 해야지. 어디서 무얼 하다 이제 왔나요. 당신을 기다렸어요. 라이라이야 어서 오세요…….”

 기우뚱거리는가 싶게 출발한 다마스가 가뿐하게 차선 안으로 접어들었다. 삼십 년 전통을 자랑하는 홍화반점의 로고가 찍힌 뒷모습을 자랑하며.

조한나 19-05-13 19:24
 
* 비밀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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