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일을 할 놈이 스케일이 그게 뭐야!”
밤말은 쥐가 듣고 낮말은 새가 듣는다고 했던가. 출근을 하자마자 떨어진 아버지의 불호령에, 재하는 화가 난다기보다 오히려 씁쓸한 웃음이 날 것 같았다. 현장 감리와 감독을 구실 삼아 떠난 출장이었다. 뻔히 짚어지는 멤버들 속에서 아버지에게 귀엣말을 흘린 사람이 누구인지는 굳이 오래 생각할 필요조차 없었다.
“큰일 하는 데 방해될 만큼 나태하게 굴진 않았어요.”
“뭐야!”
“세희 누나 입단속이나 시키세요.”
단박에 범인을 지목해내는 재하의 말에 기순이 말문을 닫았다.
“거, 사람들 일도 없지, 몇 달 만에 재회한 부부가 그렇게들 할 말이 없대요?”
“이놈이!”
“아버지 말대로 저 큰일 할 놈이에요. 그 정도 이미지 관리도 안 하고 돌아다니진 않는다고요. 누구 심정 누가 안다고 부추긴 매형이야말로 조심하라고 하세요. 남자가 돼서 그것도 손아랫사람에게 속이나 뽑히고,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큰 일 하긴 애당초 그른 인물이네요.”
“나는 그런 말 한 적 없다. 누가 그래, 네 매형이 그런 소릴 했다고?”
“아버지 눈이요.”
“흠흠…….”
낭패감을 감추지 못하는 아버지를 보며 피식 웃기는 했지만, 재하는 속으로 한껏 이를 갈았다.
“뭘 하느라 이제 나온 게야?”
“뻔히 아시면서 말 돌리시는 거예요?”
“이놈이 아비 말에 꼬박꼬박 말대답이야!”
“재원의 정 부장님 만나서 설계도 받아왔어요.”
“네놈을 믿어서 한 소리니까, 괜한 부스럼 만들지 마. 사내가 한창나이 때 실수도 하고 치기도 부리는 게 당연하지만, 질질 흘리고 다니는 건 곤란해.”
“흘린 사람은 제가 아니라니까요.”
“아직도 아비 말을 못 알아들어!”
악의없는 노염이 서린 아버지의 말에 재하가 양어깨를 으쓱 들어 보였다.
“아버지 마음이야 충분히 알죠. 얍삽한 양반 만나서 세 시간이 넘게 진을 뺐더니 배가 고프네요. 그만 나가볼게요.”
“나가 봐.”
그만 골치 아픈 대화를 끝내게 돼서 다행이다 싶은 기순과 달리, 느긋한 표정으로 문 쪽을 향해 걸어가던 재하가 순간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기왕 믿으실 거면 자잘한 것까지 믿으세요. 아버지 아들이잖아요.”
끓어오르는 화를 내리누르며 삼 층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올라온 재하는 일단 중국집에 전화를 걸어 짬뽕 곱빼기를 주문했다. 그리곤 이내 세희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여간해서는 오늘처럼 직원 전부가 외근을 나가는 적이 없는데, 지금이 기회다 싶었다.
[여보세요?]
“일이 그렇게 없어?”
[재… 하니?]
“매형한테 직접 전화하려다가 내 성격에 한 번 그러고 나면 두 번 다신 매형 얼굴 안 보지 싶어서 누나한테 전화한 거야.”
[무슨 일인데?]
“앙큼 떨지 마.”
[얘, 너 누나한테 무슨 말버릇이니?]
“연신 구정물을 내려보내면서도 윗물 대접은 받으시겠다? 하하, 그게 어느 나라 식인지는 모르지만 나한테는 안 통하지.”
[장재하!]
“매형한테 무슨 소릴 듣고 아버지한테 고자질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매형이 나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는 사실 정도는 눈치를 챘어야지. 누나야말로 날 그렇게 몰라? 내가 당하고 사는 거, 봤어?”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더하다니?]
“사내가 말이야, 깔끔한 맛이 있어야지, 그렇게 질질 흘리고 다니면 쓰겠어, 안 그래?”
[대체 무슨 소리야, 그게? 네 매형이 뭘 어쨌다는 거냐고?]
“입 가벼운 매형한테 직접 물어봐. 난 누구처럼 소소하게 고자질은 안 하니까.”
[너 정말 이럴래? 말을 꺼냈으면 끝까지 해야지. 누구 속 터져 죽는 꼴 보고 싶어?]
애가 탔는지 바들바들 떨리는 세희의 목소리를 듣자 비로소 속이 후련해지는 것 같았다.
유리로 된 자동문이 열리고 모자를 눌러쓴 배달원이 철가방을 들고 들어오자, 재하는 바쁘다는 말로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배달 왔습니다!”
중국음식을 주문한 일이 한두 번은 아니지만, 여자 배달원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푹 눌러쓴 야구모자 때문에 얼굴을 자세히 볼 수는 없지만, 언뜻 보기엔 스물 한두 살쯤 되어 보이는 앳된 여자였다.
테이블 위에 따끈한 김이 서린 짬뽕 그릇이며 단무지 접시 따위를 내려놓는 여자를 유심히 지켜보며, 재하는 자신도 모르게 말문을 열었다.
“아르바이트?”
“네.”
곱상한 생김과는 달리 꽤나 퉁명한 대꾸가 돌아왔다. 비록 짧은 대답이었지만, 네깟 게 뭔데 그런 것까지 물어대느냐는 메시지가 선명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오호, 이것 봐라. 한 성깔 하시나 보네.’
여느 때 같으면 한가하게 중국집 아르바이트생을 데리고 농담을 하는 일은 없었을 테지만, 직원들이 자리를 비운 한가한 오후가 그에게 괜한 장난을 부추겼다.
“할 만한가?”
“뭐가요?”
“아르바이트 말이야.”
모자의 챙을 추켜든 여자가 재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여유 있게 장난을 하던 재하의 손에서 나무젓가락이 툭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가슴 속으로 뛰어드는 데 걸리는 시간은 0.013초면 충분하다고 했던가.
한 손으로 가리고도 남을 듯한 자그마한 얼굴과 투명하리만치 하얀 피부가, 재하의 숨을 멎게 만들었다. 더욱 미칠 것 같은 건 그런 그녀를 어디선가 본 것만 같은, 아니 알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죠?”
여유를 상실한 재하가 애써 미소를 짓는 시늉을 하며 물었다. 그런 재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윤지가 밋밋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짬뽕 곱빼기, 사천 원입니다.”
일순 재하의 얼굴에서 억지로 짓고 있던 미소가 지워졌다. 지금껏 누구도 대놓고 자신을 비참하게 한 적은 없었던 까닭이었다. 하지만 심하게(?) 착한 여자이기에 인상을 구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착하게 생겨서 봐 준다.’
무참하다는 생각도 잠시, 바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던 재하는 착한 여자에게 다시 한 번 장난을 걸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런, 수표밖에 없네.”
역시나,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여자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릇 찾으러 올 때 받아 가면 안 될까요?”
“그래도 될까?”
넌지시 뒷말을 잘라먹는 남자의 행동이 괘씸했지만, 윤지는 어금니를 살짝 앙다물고 ‘네’라고 대답했다. 그리 길지 않은 배달생활이지만 이런 식으로 수작을 걸어오는 하류 인생들은 숱하게 겪어본 바였다.
“맛있게 드세요!”
‘에라, 못난 인간아, 짬뽕 국물에 사레나 들러라!’
한 차례 주문을 걸고 난 뒤 윤지는 철가방을 들고 ‘장인 종합 건축’이라는 팻말이 달린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투덜거리며 건물 밖으로 나선 윤지는 일단 애마에 배달통을 실었다. 온종일 추적대며 내리는 빗줄기가 조금 전 보았던 새파랗게 젊은 녀석보다 더 얄밉게 느껴졌다. 주책없이 내리는 비만 아니라면 진즉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 있을 시간인데…….
지금쯤 한참 짬뽕 그릇에 코를 들이박고 있을 남자를 노려보는 시늉을 하며, 윤지는 한껏 욕설을 내뱉었다.
“에잇, 빗물에 튀겨 죽일 인간 같으니라고. 에잇, 이놈의 팔자야!”
윤지가 한참을 구시렁거리며 차에 오르는 순간, 재하는 그릇 위에 덮인 랩에 물기가 송글송글 맺히는 것도 잊은 채,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미모의 중국집 배달원도 신기한데, 그녀가 몰고 온 진한 쥐색의 다마스마저 참신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깝다…….”
착하다 못해 어질기까지 한 여자가 하기엔 힘든 일이란 생각을 하던 재하의 눈에 ‘홍화 반점’이라는 글자가 들어왔다. 딱한 여자의 미모에 홀려 늘 배달을 시키곤 하던 중국집 이름마저 까먹고 있던 모양이었다.
“오케이, 오케이, 됐어, 됐다고!”
누구도 알아들을 수 없는 혼잣말을 웅얼거리며 짬뽕 그릇을 지나 책상으로 걸어간 그는, 서랍 속에서 두툼한 수첩을 꺼냈다.
2. 배달민족, 그녀의 이름은…….
울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그 단을 거두리로다…….
주일 학교 시절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대머리에 올챙이배를 자랑하던 늙수그레한 전도사의 말을 거의 매일처럼 경험하는 윤지였다.
아르바이트치고는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지만, 돌아오는 대가는 감행한 용기를 위로해주고도 남았다.
“네 시간이지?”
돈 계산을 할 때만 돋보기를 코에 걸치는 아버지의 말에 윤지가 대뜸 손사래를 저었다.
“아빠, 이러시면 곤란하지.”
“뭐가 어째?”
“정확히 네 시간 삼십오 분, 사사오입을 해야지. 거기다 아침에 배추까지 절이고 나왔다고.”
셈에 바른 딸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석구가 만 원짜리 지폐 다섯 장을 윤지에게 내밀었다. 비에 젖은 생쥐 꼴을 하고서도 똘망똘망한 눈으로 제 몫을 챙기려는 딸을 보니 가슴이 뿌듯해지는 것 같았다.
‘그렇지, 네 밥그릇은 네가 챙기고 살아야 하는 게야.’
“배추 절인 건?”
“아, 그건 네 엄마랑 계산해.”
어머니에게 얘기를 해 봐야 실컷 짓이겨놓은 배춧값이나 물어내라는 통박을 들을 게 뻔한 일이었다. 하지만 다섯 시간 남짓 배달을 하고 거액(?)의 돈을 수중에 넣었으니, 그것으로 충분했다.
“수철 오빠는?”
“그릇 찾으러 갔지.”
“그렇구나.”
“밥 먹어야지?”
“아니야, 아빠. 은행 문 닫기 전에 다녀와야 해. 일단 다녀올게.”
바람 소리가 나도록 몸을 일으킨 윤지는 네 시 삼십 분이면 칼같이 문을 닫는 은행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내달렸다.
두어 개의 건물 건너에 자리해 있는 새마을 금고의 셔터가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윤지는 순간 공처럼 몸을 웅크린 뒤, 남아있는 공간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윤지씨, 오늘은 늦었네?”
“헤헤, 종일 비가 오잖아요.”
달려오는 동안 뺨에 묻어난 물기를 닦아내며 윤지는, 창구에 앉은 경옥을 향해 한껏 밝은 표정을 지었다. 경옥은 그녀가 배달 일을 시작하고 나서 만나게 된 좋은 사람들 중 하나였다.
“뛰어왔나 보네?”
“시계를 보니까 문 닫을 시간이더라고요.”
규모를 자랑하는 은행들을 놔두고, 24시간 코너의 편리함을 마다하고, 윤지가 굳이 새마을 금고를 찾는 건 순전히 경옥 때문이었다. 그녀의 가식 없는 친절함이 좋아서. 셋째 언니 윤형의 고등학교 동창인데도 그녀는 꼬박꼬박 존대를 하는 걸 잃지 않았다.
“언니, 저 오늘은 대박이에요.”
“우와!”
두 개의 통장과 함께 윤지가 내민 지폐를 본 경옥이 덩달아 놀라는 시늉을 해 주었다.
“윤지씨 금방 부자 되겠는걸.”
“그러게요.”
“만원은 여기다 넣고, 나머지는 자유 저축?”
“네.”
배달 생활 두 달이 지나는 동안 윤지에게 두 개의 통장이 더 생겼다. 하루에 만원씩 납입하는 통장과 말 그대로 자유롭게 저축을 할 수 있는 자유 예금 통장이 그것이었다. 물론 배달 일을 하기 전부터 계속해온 장보기며 설거지로 벌어들이는 돈을 저축하는 통장은 따로 지니고 있었다.
“언니, 퇴근하기 직전에 오는 손님이 제일 싫죠?”
“어?! 아, 윤지씨 오늘 그런 손님 만났나 보네요?”
전산으로 통장에 잔고 처리를 하는 경옥을 향해 고개를 숙인 윤지가, 한껏 작은 소리로 말했다.
“진짜 재수 밥맛이었어요.”
“쿡쿡.”
“중국집 배달원을 무슨 다방 종업원쯤으로 아는 인물들 있잖아요.”
“요즘도 그런 사람이 있어요?”
“나이가 들었으면 이해나 되지. 새파랗게 젊은 것들이 그런다니까요.”
“어머!”
“꼭 그런 것들이 대학은 죄다 나왔어요. 오늘, 그 인간도 관상을 보아하니 잘하면 물도 건너갔다 왔겠더라고요. 그리고 보면 진짜, 우리 수철 오빠가 된 사람이라니까요.”
“지식하고 상식이 다르잖아요.”
“그렇죠?”
제복이 가져다주는 단아함이랄까. 언제 봐도 단정해 보이는 경옥이 빙긋 웃어주자 윤지는 그제야 마음이 탁 트이는 것 같았다.
“언니, 저 그만 가 볼게요. 다음번엔 일찍 와서 더 수다 떨고 갈게요.”
“언제 저녁 먹으러 한번 갈게요.”
“헤헤, 그러면 좋지요. 마무리 잘하시고 퇴근도 잘하세요.”
“윤지씨도 얼른 가서 씻고 쉬어요. 많이 젖었어요.”
“네, 그럼 저 갈게요.”
종일 내리는 비와는 상관없이 해사한 미소를 짓는 경옥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윤지는 뒷걸음으로 새마을 금고 뒷문을 빠져나왔다.
“야후!”
건물을 빠져나와 통장의 잔고를 확인한 윤지는 작은 목소리로 쾌재를 불렀다. 이만 원, 삼만 원씩 저축하기 시작한 돈이 그새 꽤나 많이 불어있었다. 역시나 울며 씨를 뿌리는 자의 대가는 기쁨이 틀림없었다.
‘이대로 가면 이 년쯤 뒤엔 작은 오피스텔 하나 정도는 얻어서 나갈 수 있을 거야.’
통장을 보며 야무진 꿈을 확인하는 윤지의 귀에 끼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토바이의 급정거 소리에 놀란 윤지가 대뜸 수철의 어깨를 내리쳤다.
“오빠!”
“하하하, 자식, 놀라긴.”
“어디 가는 길이야?”
“우리 언년이, 마을금고 갔다고 해서 데리러 왔지.”
“아하!”
“타시지, 공주님.”
수철이 평소 배달통을 싣고 다니는 뒷좌석을 가리키자, 윤지가 키득거리며 올라탔다.
“앗싸, 공주님 배달이요!”
“인마, 다 큰 자식이 창피한 것도 모르고.”
“창피하긴 뭐가 창피해. 오빠나 나나 배달의 민족인 건 온 동네가 다 아는 사실인데.”
“하하하.”
“오빠, 배 안 고파?”
“중간중간에 형만 삼촌이 먹을 걸 줘서 계속 먹었더니 괜찮아.”
“그랬구나.”
“넌?”
“음, 난 오빠가 사 주는 오뎅이 먹고 싶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지만, 피를 나눈 형제보다 더 가깝게 지낸 두 사람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스물다섯 살의 어엿한 숙녀이지만, 수철에게 윤지는 늘 막대사탕을 입에 물고 있는 초등학생과도 같았다. 쓰고 있던 헬멧을 벗어 윤지에게 씌워주며 수철이 말했다.
“꽉 잡아, 알았지?”
“오케이, 근데 헬멧 걸리면 어쩌지?”
“자식, 우리가 불법을 하루 이틀 저지르나. 안 걸리면 되지.”
길 하나만 건너면 시장인데, 하는 표정을 지으며 수철이 이내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자, 윤지가 그의 허리를 힘껏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