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볼 거, 생각해요?”
쟁반에 과일과 홍삼차를 담아내 온 말봉이 수첩에 무언가를 끼적이는 남편 석구에게 말을 건넸다.
“거, 대성 말이야, 너무 오래 거래를 했나 봐.”
“왜요, 뭔가 속이는 것 같아요?”
“장끼(장부)하고 물건이 가끔씩 차이가 나.”
“저런, 그러면 안 되지. 거래한 시간이 얼만데.”
“전 사장은 안 그랬는데 바뀐 사장이 영 사람이 진득하지가 못해.”
“사람들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네. 믿고 거래를 하면 끝까지 믿게끔 해 줘야지. 이거 마시고 나서 해요.”
아내가 내민 홍삼차를 받아든 석구가 물었다.
“언년이는?”
언년이란 말에 대번 말봉의 눈초리가 위로 치켜 올라갔다.
“아, 거 언제까지 언년이, 언년이 할 거예요!”
“언년이보고 언년이라는데 왜 언성은 높이고 그래?”
“멀쩡한 이름 두고 그러지 말아요. 안 그래도 배달통 들고 다니는 거 보면 가슴이 짠해 죽겠는데.”
“아이고, 짠하긴 뭐가 짠해?”
“그럼 당신은 한참 고운 애가 배달통 들고 온 동네를 다니는 게 아무렇지도 않단 말이에요?”
“시커먼 사내들 눈길 받으면서 어디 가서 커피 심부름이나 하는 것보다, 백배는 나아.”
“이럴 줄 알았으면 공부나 더 시키는 건데.”
“일없이 경제 풀 일 있어? 제가 공부할 머리가 있었으면 진즉 했지.”
“당신, 이럴 때 보면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 같은 거 아우?”
“나만큼만 새끼 생각하라고 해. 당신은 모르면 잠자코 있어. 우리 언년이, 저 녀석이 공부 머리는 남들보다 덜한지 모르지만, 경제 개념만큼은 똑 부러지는 놈이야. 두고 봐, 한두 해만 바짝 고생하면 야무지게 제 갈 길 찾을 녀석이니까.”
“난, 우리 윤지 이 년씩 배달통 들고 다니는 꼴 못 봐요.”
“그러니 당신이 여자지.”
“아, 그럼 내가 여자지 남자유!”
“사람이 좀 넓게 볼 줄을 알아봐.”
“좋겠수, 꽃 같은 딸내미 손에 배달통이나 안겨주고. 그래놓고도 나 잘했다 믿는 당신이 존경스럽네요.”
“제가 하겠다고 한 일이야.”
“그야, 윤석이가 있을 때 얘기죠.”
“하여간 내 말을 믿고 두고 보기나 해.”
“휴, 모르겠어요……. 저건 왜 제 손으로 제 무덤을 팠나 몰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막내딸에 대한 안쓰러움이 사무치는 말봉이 남편에게 과일 조각을 건네며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시간에 누구야…….”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문갑 쪽으로 다가간 말봉이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엄마, 나야.]
“윤형이니?”
[응, 별일 없지?]
“그렇지 뭐, 넌 잘 지내고?”
[강 서방, 논문 쓴다고 바쁜 것 빼곤 괜찮아.]
“얘, 공부도 좋지만 애는 가져야지?”
[그게 뭐 사람 마음대로 되나.]
“그게 무슨 소리야?”
[머리 아픈 얘긴 나중에 하고, 엄마, 언년이 뭐해?]
“아니, 얘가 정말!”
[호호, 우리 엄마 히스테리 또 나오네. 엄마, 언년이가 얼마나 정겨운 이름인 줄 알아?]
“뒀다가 네 새끼 낳으면 언년이라고 불러!”
[엄마, 진짜 화났나 보네?]
평생을 말봉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그녀에게 막내딸에게 붙여진 언년이라는 이름은 대(代)를 잇는 한(恨)과도 같았다.
‘아무짝에도 쓰지 못할 계집이 이름은 무슨 이름! 언년이도 감지덕지지!’
내리 딸만 여섯을 낳은 그녀를 지독히 미워한 시어머니가, 던지듯 막내딸에게 붙여준 이름은 죄인의 심정으로 살아온 말봉의 이성을 무너지게 만들었다.
여자가 치댄 밀로 반죽을 해서 성(性)을 그려 넣는 장인(匠人)도 아니고, 숙명처럼 떠안은 자식들의 성 때문에 죄인 취급을 받다 못해, 그 자식에게까지 미치는 영향을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탯줄도 떼지 않은 핏덩어리를 강보에 안고, 달랑 보따리 하나를 들고 더는 못 살겠다며 집을 나선 그녀를 붙든 건 다름 아닌 남편이었다.
‘당신이 귀가 있고 눈이 있으면 봐요. 윤석이, 윤남이… 얘들이 무슨 아들 무녀리인 줄 알아요? 이젠 그것도 안 돼서 언년이라구요! 아들 못 낳은 죄는 내가 받아요. 이 어린 것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이름 하나도 변변히 못 얻고 살아요! 남의 집에 들어와서 대 이을 손을 낳지 못한 죄로 내가 나가요, 내 발로 나간다고요! 눈치 살피느라 젖 한 번 내 마음대로 물리지 못한 새끼들, 내가 다 데리고 나가요! 여한 없이 내리 아들만 낳아줄 수 있는 여자 만나서 잘 사시구려!’
핏빛에 물든 그것처럼 선뜩하던 말봉의 눈자위를 떠올리면, 세월이 지난 지금도 가슴이 짠한 석구였다.
‘아들 낳아달라고 당신하고 결혼한 게 아니야! 두 번 다신 어머님이 그러시지 못하게 할 테니까, 당장 짐 풀어!’
아내의 쌓인 한을 풀어주듯 석구는 당장 다음 날, 유명세를 자랑하는 작명소를 찾아가 떡하니 막내딸의 이름을 지어왔다.
하지만 진한 아픔의 기억도 흐르는 시간 속에 점차 희화화되는 법. 식은땀이 흐르던 기억이 묻혀진 자리에, 그저 웃음으로나 기억되는 ‘언년이’의 추억은 어느 사이 막내딸에 대한 석구의 애칭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말봉에겐 죽었다 깨어나도 피식 웃어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살아생전 끝내 막내 손녀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은 시어머니에 대한 한 때문이었다.
‘맹추 같은 년, 그 흔한 것 하나 못 달고 나온 배추 버러지 같은 년!’
[엄마, 그러지 말고 막내 좀 바꿔줘.]
“오밤중에 언년이는 왜 찾아!”
[엄마, 진짜 화… 났어?]
“윤지, 제 방에서 컴퓨터 만지고 있는데 걘 왜 찾아?”
[물어볼 게 있어서.]
남편의 석고대죄 한 번에 내리 딸만 수두룩하게 낳은 죄인의 수의(囚衣)를 훌훌 벗어낸 말봉이었다. 친정어머니의 희노(喜怒)에 따라 상황이 얼마나 극명하게 달라지는지를 여실히 알고 있는 윤경이 대뜸 꼬리를 내렸다.
“기다려 봐.”
상한 마음을 감추지 않은 채 말봉은 무선 전화기를 들고 안방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고얀 것들 같으니라고, 놀려 먹을 게 없어서 애 이름을 가지고 놀려 먹어…….”
구시렁대며 윤지의 방문을 열자, 책이며 노트 따위가 즐비하게 늘어진 방이 그녀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돼지우리가 따로 없군.”
“엄마, 노크 좀 하고 다녀.”
컴퓨터 책상 의자에 앉아있던 윤지가 부스스한 몰골로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늘어놓은 책 몇 권을 집어 들었다.
“전화나 받아, 이것아.”
“누군데?”
“어떤 년이 오밤중에 전화해서 언년이를 애타게 찾는다.”
“우띠!”
이상하게도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언년이와 어머니의 입에서 나오는 그것의 의미가 다르게 느껴지는 윤지였다. 대번 볼멘 표정을 한 윤지가 수화기를 받아들었다. 결코 좋은 소리가 나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누구야?”
[셋째 언니야.]
“언년이 죽고 없는데요.”
[호호호, 삐쳤구나?]
“언닌 결혼을 해서도 철이 안 드니?”
[어머, 이 계집애, 말하는 것 좀 보게.]
“그러게 누가 유치하게 이름 갖고 장난하래?”
[어휴, 진짜 한 대 때려줄 수도 없고.]
“간절하면 쫓아오시던가.”
[일없네요. 그건 그렇고 일은 할 만해?]
“물으나 마나 한 소릴 왜 물어?”
[호호, 그러게 말릴 때 듣지. 후회막심이지?]
“소년 괄시하지 않는 거래.”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앞날 창창한 사람한텐 함부로 단언하지 않는 거래.”
[호호호, 은근히 무섭네.]
“왜 전화했어?”
[참,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너 혹시 장재하라고 아니?]
“장재하? 그게 누군데?”
[몰라?]
“당근 모르지.”
[그럼 장인 건재는 알지?]
“거기야 알지.”
[장인 건재 안에 건축사무소 있잖아.]
“아!”
[누군지 알겠나 보네?]
“그 어설픈 네 가지는 왜?”
[호호호, 어설픈 싸가지야, 걔가?]
“언니, 그 싸가지 알아?”
[걔 언니 동창이잖아.]
“헐…….”
[반응이 왜 그래?]
“화이부동이라 했거늘.”
[막내, 너 요즘 국어 공부하니?]
“……! 원래부터 국어 잘했어.”
[나야말로 어이가 없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오늘 그 녀석한테 전화가 왔는데, 은근슬쩍 너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더라.]
“미친…….”
[맞아, 걔 많이 미친 애니까 절대 상대하지 마. 알았지?]
“미쳤어, 그 사람?”
[걔 대한민국에 둘도 없는 용알이야.]
“용알?”
[그래, 더 드래곤 에그(The dragon egg)야, 아니다, 슈퍼 드래곤 에그야.]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지 집에서 용알처럼 떠받드는 자식이라고. 그러니까 각별히 조심해.]
“아하, 근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얘 진짜 말귀 못 알아듣네. 아들을 용알처럼 떠받드는 엄마가 주변 정리를 어떻게 하겠니?]
“듣다 보니 기분 나빠지려고 하네. 자기 자식이 용알인 게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내가 조심까지 해야 한다는 거야? 내가 보기엔 메추리알도 안 돼 보이던데.”
[괜히 사는 거 심란하답시고 남자 허우대에 빠지면 인생 쪽박 차는 거야, 언니 말 무슨 소린지 이해하지?]
“내 눈이 발바닥에 붙은 줄 알아?”
[넌 절대 아니다, 이거지?]
“그 네 가지보다 언니 말이 더 기분 나쁜 거 알아? 사람을 어떻게 보고.”
[어쨌든 다행이다. 절대 그 네 가지한테 빠지면 안 된다, 언니 말 명심해. 어머, 네 형부 왔나 보다. 다시 통화하자, 끊는다, 언년아.]
“야!”
오늘따라 귀에 거슬리는 언년이라는 이름에 발끈한 윤지가 소리를 버럭 질렀지만, 이미 전화는 끊어진 뒤였다.
“무슨 얘길 했기에 그렇게 발끈해?”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긴, 장인 건재가 뭘 어쨌다는 거야?”
여태 방을 치우고 있던 말봉이 윤지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
“장인 건축인지 뭔지 하는데 언니 동창이 있는데, 그놈 조심하라고.”
“뭐?!”
“뭘 그렇게 놀라?”
“장 사장 집 아들 말하는 거지?”
“장재하라고 했나……. 맞나 보네.”
“절대 안 돼!”
들고 있던 노트를 책상 위에 내려놓은 말봉이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뭐가?”
“너, 그 집 아들하고 알아?”
“아니.”
“근데 윤형이가 왜 그 집 아들 얘기를 해?”
“아, 그 네 가지 없는 인간이 언니한테 전화를 했대.”
“뭐라고?”
“나한테 관심 있다고.”
“헐!”
“살짝 맛이 간 인간이라며?”
“맛이 가긴 그 어미가 갔지.”
“?”
“하여간 절대 그 인물 옆엔 가까이 가지도 마. 알았지?”
“다들 왜 이런대.”
“근데 네 가지가 없다는 게 무슨 소리야?”
“싸가지 없다고.”
심드렁하게 대꾸한 윤지가 책상 의자에 걸터앉았다. 간에 기별도 안 가는 남자를 두고 언니나 어머니가 갑작스레 왜들 이러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