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쌍한 어린아이> (4)
하성과 하루 형제를 만나고 몇달 후, 그동안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던 한진이 나타났다. 한진이 느닷없이 하루와 하성, 그리고 이제는 현까지 살고 있는 집에 나타나자 두 형제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당황하며 인사를 하였다.
"보..보스!!그간 안녕하셨습니까!!"
하루와 하성이 이구동성으로 외치듯이 인사를 하자 한진은 그 둘에게 신경도 쓰지 않은체 현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하지만 현은 불안한듯이 요동치는 그의 기운을 보고 그를 바라보았다.
"...아저씨."
불안했지만 반갑게 웃어보이며 그를 부르자 한진은 부드럽게 웃으며 현에게 물었다.
"..그동안 잘 지냈어?"
"덕분에요."
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한진은 만족했는지 현의 머리를 다시 한번 쓰다듬으며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현은 자신을 쓰다듬는 손길이 떨리는것을 느끼고 그를 올려보았다. 나름 다정해보이는 둘을 보고 하루와 하성은 다시 눈을 동그랗게 뜬체 입만 뻐끔거렸으나 한진은 그 둘에게 다가가서 말하였다.
"갈치."
"네..넵. 보스. 편하게 말씀하십시요."
우락부락한 하루가 허리를 푹 숙이며 한진에게 말하자 한진은 현을 잠깐 바라보다가 이내 그녀에게서 눈을 떼고 하루에게 말하였다.
"내일부터 훈련장에 데려가서 훈련시켜라."
"네...?"
그 말에 당황한것은 하루뿐만이 아니었다. 하성 또한 놀란 눈빛으로 한진을 바라보았으나 한진은 냉정하게 고개를 돌리며 현관으로 향하면서 말하였다.
"주간에는 갈치, 네가 가르치고 주말에는 내가 가르치겠다."
"아..보스..그렇지만.."
하루가 그답지 않게 곤란하다는 어투로 한진에게 말을 흐리며 말하자 한진은 차가운 눈으로 하루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지금 내 말에 토를 달겠다는거냐."
"아..보스..후..아닙니다. 알겠습니다."
한진이 살기어린 목소리로 하루에게 말하자 하루는 몸을 움츠리며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한진은 여전히 싸늘한 눈빛으로 하루를 바라보며 말하였다.
"어린 여자아이라고 봐주지 말아라. 최대한 혹독하게 굴려라. 알겠나?"
"네..보스."
냉정한 한진의 말에 하루는 힘없이 대답하였고 그제서야 한진은 현관에 벗어둔 윤기나는 구두를 신고 정장의 옷깃을 매만진 뒤 집을 나갔다. 한진이 나가자 거실에는 적막만이 흘렀고 현은 굳은 얼굴로 자신을 걱정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는 둘을 바라보았다.
"..그 훈련이 뭐 길래 다들 그렇게 얼굴이 굳었어요?"
현이 묻자 하루는 힘없는 모습으로 땅이 꺼져라 한숨만 푹푹 쉴 뿐이었고 하성은 걱정어린 얼굴로 현을 바라볼 뿐이었다. 두 사람이 좀처럼 입을 열지 않자 현은 인상을 찡그리며 둘의 색의 기류를 잘 살펴보았다. 두사람의 색의 기운은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었고 그 모습에 현 또한 한숨을 쉬며 생각하였다.
'..불로 위협할수도 없고...왜 저러는거야.'
그 둘이 불안해하자 현 자신 또한 불안해지는것을 느끼며 인상을 찡그렸다.
"지금 말 안해도 언젠간 알게 될거잖아요."
현이 단호하게 말하자 계속 한숨만 쉬던 하루가 그녀에게 물었다.
"우리가 왜 한진이 형을 보스라고 부르는지 알아?"
"그거야..회사 상관이라서 그런거 아닌가요..?"
현은 자신이 고아원에 있었을적에 책에서 가끔 회사 상관을 '보스'라고도 칭한다는것을 읽었다는것을 생각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하루는 고개를 저으며 현에게 말하였다.
"한진이 형은..아니 보스는 뒷세계에서 유명한 조직계의 두목이야."
"조직계의 두목..?"
그 말에 현의 동공이 흔들리자 하루가 이어서 말하였다.
"우리 조직이 사실 킬러를 양성하는 조직이거든..아, 킬러가 뭐냐면..의뢰를 받고 전문적으로 사람을 죽이는..사람이야."
하루가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자 현은 머리가 혼란스러워짐을 느꼈다.
'그렇다면 그때 달맞이 꽃밭에서 했던 말 뜻이 이거...?'
몇일 전에 한진을 처음 만났을때 자신에게 손을 내밀며 했던 말이 뇌리를 울리자 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깐..보스는 네가 그냥 걱정되니깐 너를 임시로 강하게 키우시려고 그런걸거.."
"그렇군요."
"응..?"
현이 담담한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그답지 않게 횡성수설하게 변명을 늘어놓던 하루는 현을 바라보았다. 현은 자신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하루를 쳐다보며 말하였다.
"저는 괜찮아요. 킬러가 되든 암살자가 되든 아님 하녀가 되든."
"......."
대가 없는 친절은 없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 현은 오히려 한진의 명령이 다행이라고 느끼며 말하였다.
"그저 아저씨가 저를 한 사람 몫을 하게끔 도와주겠다는 사실이 오히려 기쁜걸요. 그리고.."
현이 말끝을 흐리자 하루는 현을 바라보았다.
"훈련을 하는 동안엔 힘들지도 모르죠. 하지만 이곳에는 저를 걱정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무척 많은걸요. 저는 그걸로도 충분히 기뻐요. 그러니 둘 다 그런 표정 하지 마세요."
현이 환하게 웃으며 말하자 둘의 표정이 더 일그러졌다. 그러나 현은 그런 둘의 얼굴을 못 본체 하고 자신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이미 한번 죽여본 적이 있는걸요..이 손으로..이 쓸데없는 능력으로.'
방문을 닫으며 아이답지 않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둘에겐 들리지 않게끔 중얼거렸다.
* *
다음날부터 킬러가 되기 위한 훈련을 시작한 현은 여지껏 경험해보지 못했던 끔찍한 근육통을 겪었다. 훈련도 힘들긴 했지만 무엇보다도 힘든것은 훈련을 끝낸뒤 악몽처럼 밀려오는 근육통이었다. 다음날 자고 일어나면 몸을 움직일수 없을 만큼 무겁고 아팠으나 근육통은 운동으로 풀어내란 한진의 냉정한 말에 현은 이를 악 물고 꾹 참아냈다.
하루는 그 나름대로 현을 배려하며 한진이 당부했던것보다 강도를 좀 더 줄였지만 그마저도 현에겐 고역이었다. 하지만 현에게는 이 강도높은 훈련이 양육되었을때와 고아원에 있었을때만큼 지옥이란것을 느끼진 않았다. 왜냐하면 훈련이 끝난뒤엔 엄격했던 하루는 현을 위해 마사지나 파스를 붙혀주는둥 나름 신경을 써주었기 때문이었다. 하성 또한 피곤한 나머지 거실에서 잠이 든 그녀를 안아서 뉘여주는둥 나름 친절을 베풀어주었었다.
그렇게 몇달뒤, 현은 처음 훈련을 시작했었을때보다 근육통의 아픔이 감소되어가는것을 느끼며 뿌듯해지는것을 느꼈다. 왠지 그동안의 노력이 결실을 맺은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현의 근육통이 줄어들을수록 실력 또한 날로 일취월장하게 성장해나갔다. 하지만 현의 실력이 늘면 늘수록 훈련 시간 또한 늘어갔고 기술 또한 늘어갔다.
그렇게 모두의 사랑을 받으며 운동-혹은 훈련- 또한 꾸준히 해나가자 깡마르고 왜소했던 현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그 대신에 보기좋을만큼의 탄탄한 몸매를 가질수 있게 되었고 주위 사람들의 무던한 노력으로 사랑스럽고 자신있는 소녀로 성장해나갔다.
"좋아, 휴식시간이다!!"
하루가 땀을 닦으며 기분좋은 목소리로 말하자 현은 훈련장의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그러자 하성은 그런 그녀를 발로 툭툭 치고 입을 삐쭉이며 말하였다.
"야야..다 큰 숙녀가 왜 그렇게 바닥에 드러눕는걸 좋아해..빨리 일어나."
"싫어."
현이 단호하게 대답하자 하성을 못 말린다는듯이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하성의 모습은 3년전과는 달리 멋진 청년으로 변해 있었다. 햇빛을 받으면 갈색빛이 도는 머리칼에 사나워보이기는 하나 현과 자신의 형에게 만큼은 장난스럽고 따듯한 눈을 가진 그는 소위 말하는 '미남(美男)'의 모습으로 성장해있었다. 들려오는 말에 의하면 하성에게 대쉬하거나 고백하는 여자들이 한 둘이 아니라고 하였으나 현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잔소리하는걸 좋아하는데다가 집에서는 영락없는 애인데 어떻게 인기가 많다는것인지..'
그러나 하성이 자신의 주위 사람들 한테만 친근하게 군다는것을 알리없는 현은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지난 3년간 현은 훈련을 받으면서 한진이 운영하고 있는 회사의 이름이 'J 기업'이라는것과 조직의 이름이 '진한파'라는것 또한 알게 되었다.
진한파는 암살자를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조직으로 대부분의 기업들과 정치판의 뒷세계에서 은밀하게 애용되는 조직이었다. 그 때문에 평범한 조직들과는 달리 조직원들은 거의 킬러로 구성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그날 하루 훈련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현과 하성은 갑작스러운 한진의 호출에 그의 회사로 향하였다. 한진이 보내준 차를 타고 회사에 도착하자 현은 익숙한듯이 맨 꼭대기 층인 30층의 버튼을 누르고 하성을 불렀다.
"하성오빠."
"왜,"
"아저씨가 왜 부르신걸까?"
현이 엘레베이터 벽에 기댄체 하성을 바라보며 묻자 그 또한 알수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하였다.
"글쎄."
그 말을 끝으로 둘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고 마침내 30층에 도착한 둘은 엘레베이터에서 내려서 조심스럽게 사장실 문을 노크하였다.
"들어와."
그러자 약간은 피곤한듯한 한진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둘은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섰다.
"안녕하셨습니까, 보스."
하성이 예를 갖추며 인사를 하자 한진은 됐다는듯이 손을 들어 휘휘 젓더니 이내 사장실의 안락한 바퀴의자에 앉아서 바로 본론을 말하였다.
"의뢰가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