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알 차원이동인건가요> (7)
"웨인."
"..부르셨습니까."
촛등 몇개로 방을 밝힌 업무실 안에서 온몸을 검은색으로 무장한 사내가 나타났다. 그러나 에릭은 저번과 마찬가지로 전혀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익숙하다는듯이 입을 열었다.
"서쪽의 동태는?"
"....노예와 마약등을 거래하는 상인들이 포착되었습니다."
웨인이라 불린 사내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고하자 에릭의 얼굴에서 표정이 없어졌다. 아니 원래도 무표정을 고수하던 그였지만 눈빛에 냉기와 살기가 미약하게 깃들었다. 그 모습을 본 웨인은 그 모르게 숨을 들이켰으나 에릭은 서류에 사인을 하다가 깃펜을 펜대에 꽃고는 입을 열었다.
"그런가."
"...네."
의외로 차분한 주군의 태도에 웨인은 살짝 놀란 기색을 숨겼다. 자신의 주군은 누구보다도 이성적이고 냉철한 성격을 가진 자이지만 그 누구보다도 노예상을 경멸하였다. 그 소식을 듣고 불 같이 화내는것 까진 예상하지 않았지만 최소한 무언가 명령을 내릴줄 알았다.
겉으론 들어나지 않았지만 나름 당황한 웨인이 자신의 주군의 명을 기다리고 있었을때 다시 서류를 훑어보던 에릭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웃어...?'
"웨인."
"네."
"정확한 배후를 알아내어라."
"..알겠습니다."
웨인은 예의 자세로 허리를 숙여 대답을 하곤 몸을 감췄다. 그러나 그는 저택을 빠져나가는 내내 생각을 하였다. 자신의 주군이 그 배후가 누군지 모를리가 없다. 하지만 저렇게나 태평한걸 보니 뭔가 믿는 구석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어둠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크고 장엄한 저택을 빠져나갔다.
웨인이 사라지자 계속해서 서류를 검토하던 에릭이 나름 안락한 업무실 의자에 몸을 기대고는 흥미어린 눈빛으로 들고있던 서류 한장을 업무실 바닥에 휘날리며 중얼거렸다.
"...무(無)정보라..재밌군."
그가 휘날린 서류 한장의 맨 윗자리에는 굵은 글씨로 '이스타샤 류'라고 적혀 있었고 그 밑에는 '정보 없음'라고 씌여져 있었다.
* *
저택과 영지의 구조를 익히고 도서관에 박혀서 역사집을 완독한 그 다음날, 현은 에릭과 약조했던데로 그의 집무실 방문 앞에 섰다. 현은 긴장한 몸짓으로 자신의 앞에 있는 고풍스러운 문을 바라보다가 이내 손을 뻗어 조심스레 방 문을 두들겼다.
'똑똑-'
"에릭님..?"
"...들어와라."
현이 떨리는 목소리로 노크를 하자 방안에서 무뚝뚝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 말에 현은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방문을 열고 집무실 안에 들어섰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에릭님."
"......"
그러나 그는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반응을 예상했던 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들고왔던 쟁반을 그의 책상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활짝 웃으며 말하였다.
"아무리 일이 급하시다지만 그래도 아침은 드셔야 기운이 더 나지 않겠습니까."
"나는 아침을 먹지 않는다."
에릭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자신의 책상에 내려놓은 쟁반 위에 차려진 소박한 아침상들을 밀어내며 말하였다. 그러나 현은 미소를 지우지 않은체 그에게 말하였다.
"무릇 사람이란 삼시세끼를 먹어야 건강을 유지한답니다. 불규칙한 식습관은 몸의 균형을 어지럽힐뿐더러 각종 질병에 노출되게 한다죠. 건강을 생각하신다면야 아침식사는 필수지만 만약 거르게 된다면 빈속으로 있어야 하는 시간이 길어지기 때문에 몸의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습니다. 고로 아침을 굶으면 그만큼 대뇌 활동에 큰 지장을 받습니다.
아, 더 명확하게 설명해드려야 하나요?뇌가 활동하려면 포도당이라는것이 필요한데 포도당은 식사를 하고 나서 약 12시간 정도 지나면..."
"......됬다, 먹도록 하지."
장황하게 이어지는 그녀의 아침식사의 중요성론에 에릭은 질린다는듯이 인상을 찌뿌리며 밀어냈던 쟁반을 가까이 가져오며 말하였다. 그의 빠른 행동력에 현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하였다.
"그럼요, 아무래도 건강이 최고죠. 돈은 다시 벌수야 있지만 건강이란 한번 무너지면 돌아오기 어려운것이잖아요."
그러나 그는 대꾸없이 묵묵히 쟁반에 놓인 홍차를 마셨다. 현은 딱히 대꾸를 바란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별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속으로 쓴 웃음을 지으며 생각하였다.
'..내가 당신같은 성격을 처음 겪어보는것이 아니라서 말이지. 한진보스가 딱 이런 성격이었는데..'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집무실 안을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몸을 움직여서 조금 어질러진 그의 집무실을 정돈하기 시작하였다. 바닥에 널브러진 서류들을 주워 모아 분류를 하여서 책상에 올려놓았고 흩뜨러진 두꺼운 책들도 책꽃이에 꽃아놓았다.
그렇게 정리를 하는 동안 현은 몇번씩 에릭을 돌아보았다. 의외로 그는 현이 준 아침 식사를 잘 먹고 있었다. 먹는 와중에 서류를 훑어보며 서명을 하거나 도장을 찍곤 하였지만 그의 책상에 쌓여있는 서류량에 현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서류를 저 책상에 올려놓아라."
"네."
에릭이 홍차잔을 내려놓으며 말하자 현은 대답을 하며 약 5 센티미터 두께정도 되는 서류 뭉치들을 깔끔하게 정리해서 그의 책상 옆에 있는 또 다른 책상에 내려놓았다. 그러곤 다시 할일이 없어진 그녀는 멀뚱히 서서 에릭이 일을 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
"......"
업무실 안에는 조용한 적막이 흘렀다. 에릭은 물론, 현 또한 말이 많은 성격이 아니었기에 둘 사이에는 침묵만 흐를 뿐이었고 그 누구도 입을 열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할일이 없어 무안해진 현이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저..에릭님. 에릭님께서 처리하실 서류들을 제가 분리해 놓아도 되겠습니까?"
"그래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허락이 떨어지자 현은 그의 책상으로 다가가서 산처럼 쌓인 서류들을 다른 한쪽에 옮겨서 분리해 놓기 시작하였다. 영지민들이 보낸 탄원서들과 각 귀족들이 보낸 허가 서류를 비롯해서 문제점들이 적힌 서류들까지 현은 모든 서류들을 꼼꼼히 읽으며 분류하였다.
'앞으론 아침 일찍 나와서 서류들을 처리하기 쉽게 분류하고 보고해야지. 일정들 같은것도 에샨한테 물어봐서 메모해놓고 끼니는 부담스럽지 않게 준비해놓아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현은 서류들을 처리하기 편하게 분류하던 중에 서류들의 틈 사이에 금빛 테두리로 장식 된 고급스러운 편지를 발견하였다.
'셀리아 백작가(家)로부터..?'
편지 봉투는 그 가문을 상징하는 인장(印章)의 씰로 봉해져 있었다. 척 봐도 귀족 가문이 보낸 편지답게 고급스럽고 세련된 디자인을 뽐내고 있었고 현은 그 편지를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에릭에게 어떻게 처리할지를 물었다.
"에릭님, 셀리아 백작가로부터 온 서신이 서류 사이에 끼어 있었는데요, 그냥 보관해둘까요?"
현이 편지봉투를 들고 묻자 순간 그의 펜놀림이 멈췄다. 하지만 그건 잠깐이었고 다시 서류를 살펴보며 사인을 하기 시작한 그가 입을 열려하였으나 누군가가 말리는듯한 소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요란하게 업무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나의~사랑스러운 친구, 에리이익~지겹게 일만 하지말고 나랑 놀자. 응?"
벌컥 열린 문 사이로 르안이 깡총깡총 뛰며 들어왔고 이내 업무를 처리하고 있는 에릭에게 찰싹 달라붙어서 방해를 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에릭은 그런 르안의 행동에도 묵묵히 일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떨어져라."
"너와 나의 우정이 그 '떨어져라' 란 말을 할 정도 밖에 안되진 않았잖아?그러니깐..."
"내가 언제나 검을 지니고 다닌다는것을 잊었나 보군. 쳐맞기 싫으면 그 징그러운 몸 빨리 떼."
에릭이 차가운 목소리로 르안에게 말하였으나 르안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 광경을 계속 지켜보고 있던 현이 르안을 바라보며 짐짓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르안님, 지금 에릭님은 업무중이십니다. 정 놀고 싶으시다면 업무실 밖에서 놀아주십시요. 그러다가 정말 한대 쳐맞을것 같습니다."
현은 자신이 내뱉은 과격한 언사에 아차 하였고 르안은 현의 말에 눈을 껌벅였다. 한국에선 업무를 하는 와중에 이렇게 요란스럽게 찾아와서 대놓고 방해를 하는 광경은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터라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당황스러움도 잠시 르안의 개념없는 행동에 잠시 욱한 현은 그만 조직내에서 쓰던 익숙한 말버릇을 상사의 앞에, 그리고 상사의 친우분께 쓰고 말았던 것이다.
생각없이 말을 내뱉은 자신의 언사에 현은 자책하고 있었으나 그때 에릭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웃어..?'
한국에서라면 분명히 무례한 행동이었다. 처벌까지는 아니지만 이곳 귀족 세계에선 입을 함부로 놀리면 아주 주옥되는것이란걸 판타지 소설에서 숱하게 접해왔던 그녀는 당황하여 눈을 크게 떴다.
놀란것은 르안 또한 마찬가지였다. 현과는 다른 의미로 놀란것이었지만 그는 에릭이 남들보단 잘 웃지 않는 편이기에 두 눈을 연신 깜박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두사람이 각자 다른 의미로 당황스러워 하고 있었을때 에릭이 깃펜을 내려놓고 르안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한쪽 입꼬리만 올린체 자신을 바라보는 에릭의 행동에 르안은 침을 꿀꺽 삼켰고 이내 에릭이 입을 열었다.
"그녀도 한대 쳐맞을것 같지 않다는가. 그러니 당장 나가."
"네,넵."
그 말을 끝으로 르안은 아연실색하며 업무실을 나갔고 에릭은 한손으로 자신의 허리춤에 달린 검을 매만지다가 이내 현을 쳐다보았다. 그가 갑자기 자신을 쳐다보자 잔뜩 긴장한 현은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는것도 깨닫지 못한채 그를 바라보았다. 그때 그가 입을 열었다.
"잘했다."
"네?"
"잘했다. 앞으로 저 자식을 잘 쫓아내주길 바란다."
그가 드물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현에게 말하였고 그 말에 또다른 의미로 당황한 그녀는 멀뚱히 자리에 앉아서 다시 서류에 도장을 찍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서류를 훑으며 말하였다.
"아, 그 편지는 불 태워 버리도록."
이날 현은 깨달았다. 그의 시종의 의무란 르안의 출입을 막는것이라는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