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인(貴人)들과의 만남> (2)
조각상이라고 해도 믿을만큼 백옥같이 흰 피부에 살짝 올라간 눈꼬리. 적당하게 오똑 선 코와 아무것도 바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윤기가 나는 현의 앵두같은 입술은 그녀의 외모를 한껏 더 매력스러워 보이게 해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업무용 안경이 그녀의 인상을 샤프해 보이게 해주었다.
'어떻게 사람 얼굴이 이렇게 생길수가 있지..?'
현재 에샨은 자신의 방까지 자신을 안고 들어와서 간단하게나마 응급처치를 해주고 있는 현을 바라보았다. 현은 자신의 다리에 에퓰러를 바르고 발등에 능숙하게 붕대를 감아주었다. 에샨은 현이 붕대는 감아주는 실력에 짐짓 놀라며 중얼거렸다.
"와..붕대도 잘 감고..도데체 너는 할줄 모르는게 뭐니."
"..아니에요, 그래도 할줄 모르는거 많아요. 이런것만 잘 할 뿐이지."
현이 쓴미소를 짓고 에샨을 바라보며 말하자 에샨은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어색하게 웃었다.
"그..그나저나 이제 일하러 가봐야 되는것 아냐? 도련님께서 기다리고 계시겠다."
에샨의 말에 현은 방의 벽에 걸려있던 시계를 힐끔 바라보곤 발등을 치료하느라 꺼내놓은 약들을 다시 약상자에 넣으며 몸을 일으켰다.
"치료는 이만하면 됬고 왠만하면 무리하게 움직이진 말아주세요. 가벼운 부상이라곤 하지만 그래도 조심해야 합니다."
현이 예의 잠잠한 눈빛으로 에샨을 바라보며 당부하자 에샨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류."
"아니에요. 뭘 이 정도 가지고..아무튼 편히 쉬세요."
현이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하자 에샨의 얼굴은 다시 한번 더 빨게졌으나 현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약상자를 제자리에 두고 그녀의 방문을 닫고 나갔다. 그녀가 나간 방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혼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 그냥 레즈비언 될까봐.."
현이 나가자마자 위험한 발언을 하는 에샨이었다.
한편 에샨의 방을 나간 현은 몸이 좀 쑤신지 잠시 멈춰서서 허리에 손은 얹고 어깨를 돌렸다. 잠시 어깨운동을 하고 스트레칭으로 몸의 이완된 근육을 적당히 풀어주었다. 그렇게 아주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을때 누군가가 자신의 어깨를 잡았다. 그에 놀란 현은 반사적으로 자신의 어깨를 잡은 손을 잡아 꺾어 발로 정강이를 차서 몸에 무게를 실어 상대방을 내리눌렀다.
그리고 살기어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냐."
"억...나야...류....."
상대방이 신음소리를 내며 하지만 어색하게나마 웃으며 말하자 현은 놀라 눈을 크게 뜨며 황급히 르안을 압박하던 손을 풀었다. 자신의 몸을 내리 누르면서 숨을 못 쉬게 목을 압박하던 손이 떨어지자 르안은 기침을 토해냈다.
"콜록!!콜록..!!!"
"아..르안..미안해요. 괜찮아요..?"
현이 미안한 눈빛으로 기침을 계속해서 토해내는 르안을 바라보며 묻자 르안은 손을 들어 조금은 진정된 목소리로 말하였다.
"...어..괜찮아..콜록..!!"
"..죄송해요..이게 습관이 되가지고..저 함부러 놀래키면 안되요.."
현은 그의 등을 쓸으며 걱정어린 목소리로 말하였다. 그러자 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함부러 건들면 안되겠어..괜히 에릭의 시종이 아니야..쿨럭.."
약간은 장난스러움이 묻어나는 투로 르안이 말하자 현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르안이 3분 내내 기침을 하는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과거 현은 운동 선수로써 운동을 배워온것이 아니라 타인의 목숨을 취하는 운동을 배워왔기 때문에 그녀의 체술 하나하나가 상대방에게 위험하기 그지 없었다.
"..아무튼 진짜 죄송해요."
더군다나 르안은 가끔 이렇게 기척도 없이 나타나서 현은 언제나 자신의 살의를 내리눌러야 했다. 현이 보기 드물게 안절부절한 모습으로 사과를 하자 르안이 씨익 웃었다. 그 웃음에 불안함을 느낀 현은 등뒤로 식은땀이 흐르는것을 애써 모르는체 하고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우리 류가 나한테 그렇~게 미안하다며언...."
"...면..?"
현이 침을 꿀꺽 삼키며 자신도 모르게 그의 끝말을 따라하자 르안은 재빠르게 현의 손을 낚아채고 그녀를 저택 밖으로 이끌며 한껏 신이 난 목소리로 말하였다.
"나랑 데이트 하자!!!"
* *
"......."
30분이 지나고 1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는다. 자기 혼자서 처리할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지만 일주일 넘게 그녀와 업무를 하다가 혼자 하니 부담감이 배로 다가왔다.
"..나참.."
'그녀가 없게 되면 도데체 어쩌려고..'
깃펜을 쥐고 있던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그는 속으로 자책했다. 그때 테라스의 아이보리빛의 커튼이 바람에 휘날리며 한 인영이 나타났다.
"...주인님,"
"..이른."
자신의 테라스에 나타난 한 인영이 나타나자 에릭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번에 나타난 인영을 여태껏 온 몸을 검은색으로 도배했던 사내들과는 달리 편한 민간인의 복장에 복면을 써 가리워진 얼굴의 사람이 나타났다. 잘록하고 보기좋게 나온 가슴이 그녀가 여자라는것을 증명해주었고 요염한 걸음걸이가 또 한번 그 사실을 증명해주었다.
검은 복면을 쓴 이른이라는 여자가 그에게 다가가자 에릭이 입을 열었다.
"이른."
"네, 주인님."
이른은 눈웃음을 지으며 대답하자 에릭이 물었다.
"동쪽의 동태는?"
"아무 이상이 없었습니다."
이른이 한쪽 손을 가슴에 대고 허리를 숙이며 고하자 에릭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중얼거렸다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이른에게도 들렸다.
"...그렇군..동쪽을 관장하는 헤이퍼른 가(家)와 미베른 가(家)는 청렴백결한 사람들이니.."
그러곤 뭔가를 생각하는듯 하더니 놓았던 펜대를 다시 쥐었다. 하지만 그는 10초동안 서류 뭉치들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자신의 옆에 서있는 이른에게 말했다.
"이른,"
"네, 주인님."
이른이 절도있는 몸짓으로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자 에릭이 입을 열었다.
"...서류 처리 할줄 아나?"
"..네..?"
몇분동안 기다렸다가 들은 물음 치고 상당히 자신의 주군답지 않을 것이었다. 그 물음에 이른은 자세가 삐끗할뻔한걸 간신히 넘기곤 깨어진 표정으로 자신의 주군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자신의 주군은 이내 고개를 설레설레 젓더니 깃펜을 내려놓으며 한숨섞인 목소리로 말하였다.
"아니..아니. 됬다네..내가 실언을 했다."
"......."
"..이만 가보도록."
"네, 알겠습니다. 그럼."
가라는 그의 말에 이른은 황망한 기분으로 재빨리 저택을 빠져나갔다. 자신의 주군에게 무슨일이 있었나? 평소와는 다른 모습에 이른은 이상함을 느꼈다.
'가만...듣자하니 이번에 보좌관을 들이셨다는데..'
정확히 말해선 시종이었지만 하는 일은 거의 보좌관에 가까웠다. 자신과 현재 같은 일을 하는 센과 웨인이 그런말을 했던것 같기도 하였다. 특별한 빨간 머리칼에 그것에 잘 어울리는 특별한 금안. 들리는 소문으로는 엄청난 미인이라고 하였다.
'흥, 어차피 여자 얼굴이 예뻐봤자 거기서 거기겠지. 보나마나 귀족 여자들만 하거나 그보다 못할지도.'
그 생각에 이른은 기분이 나빠지는것을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손에 쥔 종이 한장을 우그러뜨리며 생각하였다.
'..주군을 미인계로 꼬시고 있는건가? 보좌관이란 직업을 핑계로 주군을 괴롭게 하는것이 분명해..낮이며 밤이며 주군께서 싫어하는 알랑거리는 말을 속삭이는것이겠지..'
그러고 보니 주군이 좀 피로해보이기도 하였다. 과한 충성심이 도리어 화를 부른다는 사실을 그녀는 어디 집 구석에 짱 박혀 놨는지 완전히 오해를 하며 이를 갈았다. 그리곤 살기어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가만두지 않겠어.."
어차피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동쪽은 워낙 폐하께 충성심 어린 신하들이 관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얼마동안 자리를 비운다고 해도 별로 크게 달라질건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이른은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이 당시에 그녀는 몰랐다. 그녀의 이 선택이 얼마나 무모하였는지 또 이 사실을 만약 자신의 주군이 알게 된다면 가만 두지 않게 될것은 바로 그녀라는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