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인(貴人)들과의 만남> (3)
한편 르안에게 억지로 손을 붙잡혀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저택 밖으로 따라나오게 된 현은 상당히 당황한 상태였다. 자신의 주인이자 상사인 에릭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터인데 르안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신 흥얼거리며 거리를 돌아다녔다.
"저.."
"혹시라도 가봐야겠다고 말하려면...류, 내 목을 봐줬으면 좋겠어."
머뭇거리며 한마디만 꺼내려고 했다가 본전도 못찾았다. 현은 빨갛게 손자국이 난체 부어오른 르안의 목을 보며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신이 조심했어야 했는데 상대가 기척도 없이 나타나서 방심한 탓이었다. 현은 밀려오는 조급함에 연신 마른 세수를 하며 처리해야 할 서류들을 머리속으로 읇었다.
'웬델슨 지방의 식수 해결 문제와 도라스 지방의 흉년 구제 요청. 그리고 또 왕궁으로부터 온 사신 단체의 방문 요청 허가서와 이번달의 군사비 확인 요청서랑 또.....'
"......류..?"
처리해야될 서류가 상당히 쌓여있는 상태였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자 르안은 그녀에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더 큰 목소리로 불렀다.
"류--우--!!!"
"으힉..!!!르..르안.."
르안의 곱상한 얼굴이 자신의 눈앞에 확대되서 보이자 현은 흠칫 하며 몸을 뒤로 뺐다. 그때 르안이 말하였다.
"류, 에릭 때문에 신경 쓰이는 거야?"
"아니..그냥.."
정확히 따지자면 엄청난 업무량을 소화하고 있을 에릭을 걱정하고 있었지만 현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하였다. 그러자 그때 르안은 애처로이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하였다.
"딱 1시간만."
"어?"
"딱 1시간만 같이 있다가 들어가자..내가 류 스트레스 풀어주려고 일부러 무리해서 데리고 나온 건데..그렇게 불안해 하니 어쩔수가 없네."
"아..아니에요, 전..괜찮아요.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르안님."
현은 그가 철없는 애처럼 자신과 함께 놀려고 데리고 나온줄 알았으나 에릭과 함께 업무를 처리하느라 스트레스가 쌓인 자신을 신경 써주느라 일부러 데리고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그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지었다.
'두근'
"응...?"
전에 느꼈던것처럼 빠르게 뛰기 시작한 심장 박동이 선명하게 울리는것을 다시 한번 느낀 르안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길을 가다가 갑자기 멈춰선 르안을 불렀다.
"르안?"
자신의 귓가에 현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정신을 차린 르안은 몇차레 눈을 깜박이다가 이내 다시 예의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였다.
"응?아무것도 아니야. 그럼 우리 이번에 저기 새로 생긴 찻집에나 가볼까?"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현 또한 그를 마주보고 웃으며 대답하였다. 르안은 처음 느껴보는 이질적이나 기분 나쁘지 않은 감정에 눈꼬리를 더욱 휘며 생각하였다.
'..앞으로 종종 이렇게 나오는 것도 좋겠네.'
* *
르안을 따라 깔끔하게 장식된 찻집 안에 들어오게 된 현은 내부를 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건...지구의 카페랑 비슷한..아니, 거의 똑같은데?!도데체 이걸 누가...'
"류, 왜 그래?"
"아니요..여기 찻집이 마치 제가 옛날에 살던 곳의 카페랑 완전 똑같아서요..."
신기한듯이 찻집 내부를 이리저리 둘러보는 현의 입에서 낯선 단어가 나오자 그는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카페?"
"여기 찻집이랑 똑같은 개념이에요."
현이 능숙하게 자리를 찾아 앉으며 대답하였다. 그에 르안 또한 그녀를 따라 앉으며 말하였다.
"'리아의 찻집'이라고 요즘 분점이 많이 생기고 있어. 주로 중산층들에게 인기가 많은 곳인데 가끔 귀족들도 여길 찾아오더라구. 요즘 그래서 이런 찻집이 떠오르는 추세이긴 한데 어떤 뭣도 모르는 평민 하나가 출세하겠다면서 '리아의 찻집' 비스무리한것은 만들었었는데 그게 잘 되기는 커녕 모방했다고 사람들한테 욕 엄청 얻어먹었다는 사건도 있었어."
"그렇군요, 뭐든 저작권이 중요한것이니깐 만든 사람의 허락없이 침해하면 범죄죠."
현이 고개를 끄적이며 대답하자 르안이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였다.
"참고로 여기가 본점이야. 주인인 아리아가 여기서 시작해서 몇달 전에 여기서 가까운 지방 몇몇에 분점을 열었고 지금은 그 땅값이 비싸다는 수도에도 하나 열었다고 하더라고. 현재 다른 왕국의 진출도 노리고 있데."
"배포가 장난 아니게 큰 여자네요. 그나저나 르안님은 뭐 드실거에요?"
"나는...음..근데 뭐가 뭔지 모르겠다."
탁자에 놓여진 메뉴판을 훑어보던 르안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하였다. 그러자 현은 그에게서 메뉴판을 건네받고 메뉴를 훑어보았다. 그리고 눈을 크게 떴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카라멜 마끼아또, 카라멜 프라푸치노, 그린 라떼, 그린 티에...이거 완전 지구판인데..?'
르안이 이해 못하는것도 당연했다. 잠시 머리가 뭐에 맞은듯한 충격을 받은 현은 눈을 깜박이며 찻집 안을 둘러보았다.
'설마..이 찻집 주인이 지구인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내부나 메뉴 종류가 이럴리가 없다. 현은 르안에게 기다리라고 한뒤 한 종업원에게 가서 물었다.
"저기, 이 찻집 주인 지금 여기 있나요?"
현이 다급한 음성으로 종업원에게 따지듯이 묻자 파란 머리의 남자 종업원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였다.
"아니요..죄송하지만 리아님은 현재 출장중이십니다. 워낙 멋대로이신 분이라 언제 돌아오실지는 저희도 잘..."
"하..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자신 말고 또 다른 지구인을 만날수 있다는 희망을 느꼈었으나 이어지는 다소 절망적인 소식에 현은 인상을 찡그리며 자리로 돌아왔다. 평소와는 달리 와락 구겨진 인상에 르안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류...?"
"..아무것도 아닙니다, 르안님."
이런 문제는 고민한다고 답이 나오는것이 아닌것을 알기에 현은 복잡한 머릿속을 애써 정리하며 메뉴판을 집었다.
그리곤 습관적으로 이미 묶여져있는 머리를 쓸어올리며 한결 부드러워진 음성으로 그에게 물었다.
"르안님은 단것을 좋아하시나요, 아님 쓰나 깊은 맛이 나는것을 좋아하시나요?"
"난 쓴것 보단 단게 더 좋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여기요!"
그 말에 현은 메뉴판을 탁! 소리 나도록 덮고 익숙한 몸짓으로 서있는 종업원을 불렀다. 그러자 대기를 타고 있던 종업원이 현과 르안이 앉아있는 자리로 다가와서 말하였다.
"주문 도와드리겠습니다."
한국과 똑같은 주문 방식에 갑자기 콧등이 시큰거렸으나 애써 무시하고 주문을 하였다.
"..차가운 카라멜 마끼아또 크림 올려서 한잔 주시고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 주세요."
"알겠습니다, 주문 받았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요."
종업원이 교육 받은데로 절도있는 몸짓으로 살짝 허리를 숙이고 자리를 뜨자 르안은 놀란 눈빛으로 현을 쳐다보며 말하였다.
"나..여기 처음 와보는데..류는 여기 몇번 와봤어?여기 처음 온 사람들은 되게 버벅 거리는데."
"글쎄요..와봤달까나.."
현이 씁쓸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며 대답하자 르안은 심상치 않은 그녀의 분위기에 입을 다물었다. 잠시나마 침묵이 이어졌으나 그 침묵은 오래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현이 자신을 향해 날아온 나이프를 살짝 고개를 트는것으로 피하였기 때문이었다.
'푸욱-!!!'
목표물을 맞추지 못하고 갈곳을 잃은 나이프는 벽에 꽃히고 말았다. 현은 자신의 뒤에 있는 벽에 꽃힌 나이프를 싸늘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일어나려고 하였으나 르안이 더 빨랐다. 르안은 벽에 단단하게 꽃힌 나이프를 무슨 케잌에 박힌 포크를 빼내는것 마냥 간단하게 빼내고 자리에 일어나서 찻집을 얼려버릴것처럼 싸늘하게 웃으며 말하였다.
"겁도 없이 이거 던진 사람, 자수해서 광명 찾기 전에 빨리 나오는게 좋을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