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너스 외전: Morning moon and growing heart
'사각사각'
적막함이 감도는 고풍스러운 방안. 깃펜으로 종이에 휘갈겨 쓰는 소리만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
지금 시각은 새벽 6시. 전날에 미처 처리하지 못한 급한 안건이 있었던 탓에 그는 새벽 5시부터 일어나서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도장을 찍는 소리와 사인을 하는 소리만이 울려퍼졌고 그는 허리도 피지 않고 쉴세 없이 서류들을 읽고 정리하였다.
'휘이잉-'
그때 강한 바람이 나부끼는 소리와 함께 검은 인영이 모습을 들어냈다.
"주인님."
"...네르,"
에릭이 자신의 앞에 모습을 들어낸 인영의 이름을 나지막히 부르자 검은 인영은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알아내지 못한건가."
"..송구합니다."
"됬다, 아무래도 알아낸다는것 자체가 불가능한것 같군."
"....죄송합니다. 다시 한번 제대로 조사를 해보겠습니다."
"괜찮다, 그만 해도 된다."
그의 단호한 어조에 네르는 송구스럽다는듯이 고개를 떨궜다. 그러나 에릭은 읽고 있던 서류와 손에 쥐고 있던 깃펜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걸음을 옮겨 조그마한 화분이 놓여있는 선반 앞으로 다가갔다.
"..아무래도, 수상한 자는 아닌것 같다."
"..그렇습니까,"
"...그렇다."
화분에 심겨져 있는 꽃을 옅은 미소가 담겨진 얼굴로 바라보는 그는 행복해보였다. 물론 그는 자신이 미소를 짓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네르는 그가 이런 얼굴을 한다는 것 자체가 좀처럼 드물다는것을 잘 알고 있었다.
황당하게도 자신의 집 난방 창고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녀. 온몸에 먼지가 가득했지만 이 세상 사람이 아닌것처럼 아름다웠다. 더 놀라웠던 사실은 그녀의 당당함이었다. 위압감과 살기로 둘러싸인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호위기사를 하겠다던 그녀.
'그럼 당신, 어둠속에 몸을 숨긴 자객들을 대적할수 있나요?그것도 여러명이라면요.'
할수 있다. 자신은 소드마스터니깐. 다만 전문 암살자들에 비해선 아주 조금은 버겁겠지만.
'나는 할수 있어요. 당신을 노리는 자객들이 몇명이던간에 헤치울수 있을만한 능력이 충분히 있어요. 어때요, 그래도 나같은 인재가 탐나지 않나요?'
아찔한 미소를 지으며 당당하게 자신에게 제안을 하던 그녀. 마지못해 전문시종으로 받아들였지만 어디서, 뭘하던 사람인지 몰라 불안했었다. 그래서 자신의 비밀조직인 네우스를 통하여 정보를 수집했으나 어떠한 정보도 얻을수 없었다.
다소 황당한 모습도 많이 보여줬었다. 테라스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뛰어내린다던가 혼자서 허공을 바라보며 대화를 한다던가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놀라는 모습들을 많이 보여줬었다.
업무중에는 지극히 사무적인 태도를 취하는 그녀였으나 이따금씩 창밖을 바라보며 아련한 미소도 짓곤 했었다. 사무적이었으나 그만큼 순진하며 깨끗했었다.
그렇다. 그녀는 도무지 종 잡을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만큼은 처음부터 마음을 열어주고 싶었다. 정체가 불분명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이유없이 믿고 싶었다.
"...주군..?"
"아.."
네르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자 생각에서 깨어났다.
'이런..'
화분을 바라보며 그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언제 이렇게 허물없이 사람을 받아들였을까.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라는 뒷말을 나지막히 내뱉곤 네르는 어슴푸레 빛이 새어들어오는 창밖으로 모습을 감췄다.
이제는 수상하다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녀에 대해서 좀더 알고 싶을뿐.
이제 좀있으면 그녀가 문을 두드리겠지. 그리고 그녀만의 깨끗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에게 인사를 하겠지.
그는 그러한 생각을 하며 자신도 모르게 테라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점점 밝아져오는 새벽하늘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어라?에릭님?"
아래에서 갑자기 미성이 들려왔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붉은머리의 그녀가 동그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물었다.
"에릭님도 동트는것을 보시려고 일찍 일어나신건가요?"
"......."
그는 자신도 모르게 얕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그것을 본건지 더욱 진한 미소를 지으며 하늘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저는 말이지요..이 새벽 하늘이 좋아요. 뭔가 아련하고 저를 아껴주신듯한 누군가가 생각나려 하거든요.."
"......."
"하지만 원망스러울때도 있죠. 내가 이렇게 괴로운데 매일매일 햇님은 똑같은 하늘에, 똑같은 시간에 아무렇지도 않게 뜨니깐요."
"......."
"어렸을적에는 하늘이, 특히 이 동트는 새벽 하늘이 가장 미웠는데 지금은..좋아해요..저를 마치 위로해주는것 같거든요..어제 하루도 잘 버텼어. 어제 하루도 잘 참았어. 어제 하루도 잘 지냈어. 그러니 오늘 하루도 포기하지 말고 내가 주는 오늘의 따뜻한 빛이 네 마음에 위로가 되어주었으면 해. 하고 말해주는것 같거든요."
"........"
해는 해고 달은 달이다. 하늘은 하늘이고 꽃은 꽃이다. 어렸을때부터 굳게 닫았던 마음 탓에 모든것에 신경을 끄고 살았다. 자신의 주위에 생명력을 빛내며 살아가는 생물들조차 마음에 둘 틈없이 일부러 바쁘게 살이왔다. 그러니 정말 모든것이 자신의 눈에 무채색으로 비춰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의 주위에 있는 색들과 생물들이 보인다. 그건 아마 그녀의 덕분이겠지.
"..그렇군."
정원의 나무밑에 쪼그려 앉은 그녀가 빛나보였다. 새벽 햇빛을 받아서 그럴지도 모르나 그의 눈에는 그녀가 그 어느것보다 더 빛나보였다.
"...그렇군."
그는 서서히 밝아오는 새벽 하늘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