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歸還)> (1)
기절한 그녀를 왕성의 병동으로 데려온 레이른 왕세자는 왕족들만 이용할수 있는 특실로 가서 그녀를 침대에 뉘였다.
"어떻게 하실겁니까."
에릭이 그에게 묻자 레이른이 말하였다.
"당연히 능력을 써서 그녀를 치료할것입니다."
"..하지만 그 능력을 쓰기 위해선 대가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에릭이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레이른이 말하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살려내기 위해서야 제 수명 3년쯤은 포기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이 나라의 왕세자이십니다. 다른 좋은 방법이 있을것입니다."
에릭이 말하자 레이른 왕세자는 그를 노려보며 말하였다.
"그럼 언제 깨어날지도 모를 상태로 그냥 두자는 말씀이십니까?? 스피니아 경, 다른 무슨 방법이 있다는것입니까?"
"왕세자 전하만을 희생시키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서 한 말입니다. 그녀도 만약 당신이 수명을 줄이면서까지 능력을 써서 자신을 고쳐줬다는것을 알게 되면 기뻐 하지 않을것입니다."
그가 나지막히 말하자 레이른은 머리를 감싸쥐고 침대 옆에 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에릭 또한 굳은 얼굴로 누워있는 그녀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바로 그때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역시 이스와 아른을 뺀 나머지 인간들은 무력하군."
"이스!!! 이게 어찌 된 일이에요!!"
"..빨리 가서 약초를 구해와라."
"그렇게 말할줄 알고 미리 구해왔지~"
갑자기 나타난 이프리트는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인간들의 무력함에 대해서 한탄하였고 엘라임은 창백해진 얼굴로 누워있는 현을 부둥켜 안으며 엉엉 울었다. 셀리어스는 굳은 얼굴로 자신의 옆에 있는 노아스에게 상태를 호전시킬수 있는 약을 구해오라 명하였고 그것을 예상했던 노아스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약초들을 꺼내서 보여주었다.
화려한 인물들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어안이 벙벙해진 그들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당신들은..?"
"당장 그녀에게서 떨어져라. 너희들 따위가 감히 만질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레이른이 묻자 셀리어스는 살기어린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였다. 그리고 이프리트가 말하였다.
"레이른 왕세자..였던가? 능력을 썼어도 수명만 아까웠을거야. 경미한 부상이라면 통할진 몰라도 지금처럼 심각한 상태에서는 그녀에게 너의 능력이 통하지 않을거거든."
"그게 무슨.."
레이른은 믿기 않는다는듯이 말을 흐렸고 그에 에릭이 그들에게 물었다.
"..당신들은 누구십니까."
"그건 네가 알바 아니고 우리가 답해줄 권리도 없다."
이프리트는 그에게 단호하게 말하고 엘라임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
"잘 되가고 있어?"
"네,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큰일이 났을거에요."
엘라임이 애써 웃으며 대답하자 이프리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고개를 돌려 에릭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이내 긴가민가한 말투로 그에게 말하였다.
"너..내가 아는 누군가랑 닮았군. 무뚝뚝한것도 똑같고."
"...누굴 닮았다는 겁니까."
에릭이 예의 무뚝뚝한 목소리로 묻자 이프리트는 이내 알아챈듯이 말하였다.
"흐음..알겠군, 그 외모와 무뚝뚝한 어투와 행동. 네가 '그놈'의 아들이었군?"
이프리트가 흥미로운 목소리로 말하자 에릭은 인상을 찌뿌렸다. 그리고 그녀에게 물었다.
"말해주시면 안됩니까?"
"안돼. 방금 말했다시피 우리에겐 그 어떤것도 말할수 있는 권리도 없고 의무도 없어. 무엇보다도 애초에 그럴 마음 또한 없지만 말이야."
이프리트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하자 에릭은 그저 말없이 서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프리트는 살짝 생각이 바뀐건지 입꼬리를 올리며 그에게 말하였다.
"뭐, 너는 '그놈'의 아들이니 특별히 한가지를 말해주지. 만약 이 아이가 모든것을 기억해냈을때 물어봐봐. 내가 말해도 된다고 하고 말이야. '그놈'을 대신해 너한테 은혜를 갚은거니 그리 알아."
"도데체 당신이 말하는 '그놈'이 누구인지 말해주실 생각은 없는겁니까?
에릭이 묻자 이프리트는 담담하게 말하였다.
"나머지는 니 알아서 잘 찾아내봐. 뭐, 찾아낼수 있다면 말이지. 너 차기 공작 가주라며? 그럼 정보원들은 널려 있겠네."
"이프! 다했어요!"
"나도 다했어!!"
엘라임과 노아스가 일제히 말하자 이프리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결 안색이 나아진 현에게 다가가 잠시동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뒤를 돌아서서 에릭과 레이른에게 말하였다.
"그럼 나머지는 분하지만 너희들에게 맡기지. 상처 치료는 다했고 용한 약들을 다 먹였으니 안정만 취하게 하면 될거야. 아마 30분 내외로 깨어날것 같군. 그럼 잘 부탁한다."
그 말을 끝으로 감쪽같이 모습을 감춘 네명의 화려한 그들은 병실에 남아있는 둘에게 혼란만 안겨주고 떠났다.
"이..이게 대체 무슨..도데체 뭔지.."
"..그러게 말입니다."
레이른 왕세자는 병실의 의자에 앉아서 당황한 모습으로 눈을 깜박이고 있었고 에릭은 굳은 얼굴로 그녀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서있을 뿐이었다. 붉은 머리의 여자가 말한 '그놈'이 신경 쓰였다. 그녀가 말한 '그놈'이 혹 아버지라면 돌아가서 물어봐야겠다고 결심하고 한결 안색이 나아져 색색 숨을 내쉬는 현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아무래도 아까 그 사람들이 그녀의 정체를 쥐고 있는 중요한 열쇠인것 같았다. 알면서도 알려주지 않는것이 정말 사람 답답하게 하였다.
"..빨리 깨어나라."
그가 다정하고도 걱정스러운 말투로 현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나직히 말하자 맞은편의 의자에 앉아 있던 레이른 왕세자가 툴툴거리며 말하였다.
"...지금 그러면서도 인정하지 않는다니..이거 참 독하다고 해야하는지 아님 멍청하다고 해야하는것인지 모르겠군요."
"비꼬는겁니까."
"네. 비꼬는겁니다. 스피니아 경."
레이른 왕세자가 단호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하였다. 그러나 에릭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고 그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말하였다.
"..지금 부럽다고 말하고 있는것입니다. 스피니아 경. 저는 끝내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아닙니다, 왕세자 전하는 쓰러진 그녀를 안고 재빨리 병동으로 와주셨습니다."
"네, 하지만 그뿐이죠. 결국 저희 누님을 노린 암살자들에 대해서 알아낸것도 없고 칼에 찔릴뻔한 그녀를 놀라서 그저 멍하니 바라보는것 밖에 할수 없었습니다..당신이 빠르게 검을 날려서 다행이었지요 안 그랬다면 지금 이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겁니다."
"......"
레이른 왕세자가 씁쓸한 모습으로 자책하며 말하자 에릭은 어떤 말도 해줄수 없었다. 위로 같은것을 잘 해주지도 못할뿐더러 여기서 자신이 무슨 말을 해봤자 왕세자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을거라 생각하고 그저 가만히 앉아있었다.
"누구보다도 빠르게 달려가 그녀의 안전을 확인한 당신을 보고 그녀를 좋아한다는 저의 마음에 의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저 가만히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볼수밖에 없었죠.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당신처럼 생각도 하지 않고 검을 날렸을텐데. 그리고 재빨리 그녀에게 달려가 그녀의 안전을 확인하며 안도를 하였을텐데.."
"...죄송합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에릭이 나지막히 사과를 하였고 그에 레이른 왕세자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하였다.
"그러니 이제 그만 솔직히 지라는 말입니다, 스피니아 경.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 마음을 인정하는것 부터가 먼저이니깐요."
레이른 왕세자가 애써 웃으며 그에게 말하자 에릭은 혼란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레이른 왕세자는 그러던지 말던지 말을 이었다.
"스피니아 경, 당신이 그녀를 대하는 태도와 바라보는 시선부터가 누가봐도 사랑에 빠진 남자라는것을 확실하게 증명해시켜주고 있거든요? 그러니 이제 제발 인정하라는 말입니다. 오죽하면 똑같은 여자를 좋아하는 제가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겠습니까."
"그....죄송합니다."
에릭이 무슨 말을 하려다가 말을 흐리며 사과를 하자 레이른 왕세자가 말하였다.
"인정을 해야 정면승부로 페어하게 대결할수 있는것이죠. 지금 이 시점에선 뭐 진심으로 할 마음도 안납니다."
레이른 왕세자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하자 그는 그녀의 머리칼을 정리해주던 에릭의 손이 멈추는것을 보았다. 레이른은 그 모습을 흥미롭게 쳐다보다가 이내 자신이 아는 스피니아 경이라 생각할수 없는 다정한 목소리를 들었다.
"...이런게, 좋아한다는 기분이었군요."
에릭이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말하자 레이른 왕세자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왕세자의 시선을 무시하고 말하였다.
"이런게, '사랑'이었군요."
상대를 아껴주고 싶다는 마음. 없으면 불안한 마음. 무엇보다 그녀를 보면 당황하여 떨리는 마음. 자신의 가슴안에 퍼즐처럼 흩어져있던 조각들이 그로 인해 맞춰진듯한 느낌이 들었다. 줄곧 알수 없었던 미묘한 감정의 정체를 찾았다.
에릭은 누워있는 현의 손을 조심스레 잡고 눈을 들어 레이른 왕세자를 바라보며 말하였다.
"..후회하시면 안됩니다. 시작은 당신이 먼저 한것입니다."
"비겁한 수 쓰지 말고 페이플레이로, 정당하게 말입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에릭의 단호한 눈빛에 레이른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