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물토벌은 게임이 아니다> (8)
익숙한 하늘색 머리칼과 새하얀 피부. 그리고 뻔뻔하게 웃는 얼굴. 르안이었다. 문 밖으로 에샨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르안은 개의치 않고 방글방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현~나 안 보고 싶었어?"
"네."
그가 자신에게 다가와 웃는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지만 현은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으며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와 서류를 분류해놓으며 단호하게 대답하였다. 100 퍼센트 진심이 섞인 그녀의 대답에 르안은 입술을 삐쭉이며 말하였다.
"으우..혀언..나에 대한 애정이 식은거야.."
"그 말, 저번에 에릭님한테도 똑같이 했던걸로 아는데요."
현이 책장에 정리되어 있는 문서 파일들을 뽑아들며 말하자 르안은 투덜거리기 시작하였다.
"..에릭이나 현이나 둘 다 나한테 너무 매정해, 쳇쳇.."
그가 방 구석에 쪼그려 앉아 침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실 현이 최근에 르안을 놀리기 시작한 이유는 조금 귀찮은 이유도 있었지만 오뚝이처럼 일어나 웃는 얼굴로 장난을 치는 모습이 보기 좋았기 때문이었다. 또 지금처럼 침울해 하는 모습을 볼때마다 괴롭히는(?) 재미가 쏠쏠했기 때문이었다.
르안이 혼자 암울한 기운을 폴폴 풍기며 음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을때 에릭이 서류를 책상에 내려 놓으며 입을 떼었다.
"현..?"
아, 이런 젠장.
딴 생각을 하고 있던 현은 그의 음성에 정신이 돌아오는것을 느끼며 그를 바라보았다. 일부러 그에게 말하지 않은것은 아니었다. 다만 말할 틈이 없었을뿐. 변명 같이 들리겠지만 르안에게 먼저 말하고 그에게 말하려고 하였으나 경황이 없었다.
절로 죄송한 마음이 들어 현은 그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하였다.
"..죄송합니다, '현'이 제 본명입니다."
"본명?"
"네, 그렇습니다. 성은 '류'이고 이름이 '현'입니다. 어느때에서도 밝게 빛나라는 의미에서 어떤분이 지어주신겁니다."
현이 그렇게 말하자 그는 미간을 찌뿌리며 그녀에게 말하였다.
"왜 바로 말하지 않았지?"
"..죄송합니다,"
이러쿵 저러쿵 말하면 변명으로 들릴지 모르기에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사과를 하였다. 현의 사과에 그는 한동안 인상을 찡그리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속인건가?"
"예?"
그의 물음에 당황하여 현은 바보같이 되물을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내 그는 관자놀이에 손을 짚고 고개를 내저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아니다, 잠깐 나갔다 오지."
그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현은 그 자리에서 굳어서 업무실에서 나가는 그를 멀뚱히 바라볼수밖에 없었다.
"어? 야, 야!! 아이씨..현, 잠깐 나갔다 올게."
르안 또한 당황하여 거칠게 방문을 열고 나가는 그를 따라 나섰다. 멍하니 서있는 그녀를 뒤로 하고 르안은 소리를 지르며 방을 나갔고 혼자 덩그러니 남은 현은 멍한 얼굴로 방문을 바라보았다. 방문이 닫히고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자 현은 들고 있던 서류 뭉치들을 가슴에 안으며 벽에 기대었다.
"..이게..그렇게 화낼 일인가..?"
갑작스레 일어난 일에 힘이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으나 대답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에 현은 한숨을 쉬고 서류와 방문을 번갈아 보다가 발을 옮겨 방문으로 다가갔다.
문고리를 잡는 순간 굳은 그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고개를 젖는것으로 떨쳐버리고 문을 열어 밖으로 나섰다.
'벌컥-'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적막만이 주위를 가득 메웠고 양옆을 둘러보다가 발을 떼었다.
속인것이라고 생각하여 화가 난것일수도 있다. 자신이 수상한 이방인이라는것에는 변함이 없는데 이름을 속였다는 점에 대해서 더욱 신뢰성을 잃은 것이다.
현이 자신의 아둔했던 행동을 후회하며 복도를 거닐고 있을때 앞에서 두런두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르안님이랑 에릭님 큰소리로 싸우시는것 같던데.."
"분위기가 너무 살벌해서 무서웠어..."
"저기요,"
현은 조그만 목소리로 속닥거리는 두명의 하녀들을 불렀다. 그러자 하녀들은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현은 겁을 먹은 하녀들의 태도에 신경 쓰지 않고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에릭님이랑 르안님 어디로 가셨는지 아나요?"
"아..이 복도의 모퉁이를 돌아서 가셨어요.."
"감사합니다."
갈색 머리칼의 하녀의 말에 현은 고맙다고 한뒤 서둘러 몸을 돌려 모퉁이 쪽으로 달려갔다. 등 뒤에서 감탄어린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개의치 않고 뛰어갔다. 그러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요세 이상한거 알아?"
"......"
"그렇게 질문을 회피하는것도 너답지 않아. 정말 왜 그러는건데? 아까도 그냥 넘어갔으면 되었잖아."
하지만 에릭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가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자 르안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둘의 심각한 대화에 현은 감히 끼어들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가만히 우뚝 서서 둘의 대화를 들었다.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는데 너 설마.."
"...일부러 화내려고 한것은 아니었다."
르안의 의심이 섞인 목소리에 드디어 에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뒤로 그의 한숨소리와 함께 낮은 미성이 들려왔다.
"..그저, 나도 모르게 화가 났을뿐이다."
"분노조절장애냐, 누구나 다 예상하고 화를 내진 않거든?"
르안의 빈정거리는 말투에 에릭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좋아해서."
"....."
"그녀에게 연민을 품어서, 내가 아닌 다른 남자에게 먼저 마음을 열었다는 사실이 괴로워서 그녀에게 화풀이를 한것이었다."
담담하게 이어진 그의 말이었으나 그 의미에 현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말았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녀가 누군지 모를리가 없다. 자신을 지칭해서 말한것을 확실히 안 현은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하지만 그때 팔에 힘이 풀린것인지 안고 있던 서류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촤라락-'
종이가 중력의 법칙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흩어져 소음을 내자 두사람은 뒤를 돌아봤다. 그때 현은 그의 보라빛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아.."
당황하여 뒷걸음을 쳤다. 그러나 이내 그대로 몸을 돌려 반대쪽을 향해 달려갔다. 달려가며 머릿속이 여러가지 생각들로 인해서 뒤엉키는것이 느껴졌다. 이거저것이 겹쳐 혼란스러운 기분에 사고회로가 어지러워지는 느낌이었다.
눈치채지 못했던것은 아니었다. 몽쉐르 왕국에서 그의 부드러워진 행동에 현은 어렴풋이 짐작을 하였으나 제국에 돌아온뒤 다시 예의 딱딱한 모습에 착각이었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니..
하지만 그때 누군가의 얼굴이 강하게 떠올랐다.
"...하성오빠.."
지나가던 모기도 들을수 없을만치 작은 목소리였으나 현은 익숙하고도 아련한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바쁘게 살다보니 잊어버렸다. 아니 일부러 바쁘게 해서 잊으려고 노력하였다. 몽쉐르 왕국에서 조금은 변한 그의 행동에 새로운 사랑을 시작해볼까 하고 생각해보기도 하였다.
하지만 지난번 레이른 왕세자의 갑작스러웠던 고백 후에 잊은거라 생각했던 그의 얼굴이 강하게 떠올랐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잠깐..!!!"
뒤에서 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현은 그 자리에서 우뚝 서서 외쳤다.
"오지마세요!!!"
"..류, 잠깐.."
"..오지..말아주세요.."
흐느낌이 뒤섞인 목소리로 뒤돌아선체 말하자 그가 멈춰서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그때 현은 깨닫고 말았다.
'아아, 나는 참 바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