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물토벌은 게임이 아니다> (9)
잊을수 없다는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바보같이 잊으려고 발버둥을 쳤다. 그의 따스함에 잠시나마 흔들린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자신은 아직 그를 잊지 못한것이었다. 잊기는 커녕 시간이 지날수록 부드러운 하성의 얼굴과 그의 특유의 푸른 기운이 더욱 또렷하게 떠올랐다.
"..오늘은..아파서 쉬겠습..니다.."
울음을 삼키느라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고 터덜터덜 걸어서 앞으로 나아갔다.
이 기분은 뭘까. 여러 감정들이 이리저리 뒤섞여 알수없는 복합적인 감정이 형성되었다. 그리움에 인한 슬픔이 감정의 비중을 차지하였다.
산더미처럼 쌓여있던 업무들과 마물토벌에 대한것들을 생각할 여유따윈 그녀에게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지금은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이었다. 잠시 아무도 없는 한적한 곳으로.
그의 웃는 얼굴. 힘들때마다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었던 다정한 손길. 그리고 그와의 달콤하고도 부끄러웠던 첫키스. 이러한 추억들을 그리며 혼자서 조용히 살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평범하게 살지 못할것이란것을 진작에 깨달았기에 이왕이면 남들을 도우면서 살기로 마음먹었다.
복잡한 마음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어느새 저택을 나와 거리에 서있었다. 아무생각 없이 그저 멍하니 서있을때 누군가와 어깨가 부딪혔다.
"아, 죄송합니다.."
"..아뇨, 괜찮습.."
자신과 어깨를 부딪힌 남자의 말이 끊기자 현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2 황자님?"
"...류 양이군요,"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에메랄드 빛의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자 현은 숨을 들이켰다. 하필이면 이때 만나게 되다니. 현재 자신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그중에 특히 만나고 싶지 않았던 자가 바로 하성과 거의 똑같은 색을 가지고 있는 2황자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중에 가장 만나고 싶지 않던 자를 이리 만나게 되다니.
에릭과는 또다른 낮고 부드러운 음성에 현은 저도 모르게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2황자는 살짝 벗겨진 후드를 다시 눌러쓰며 입을 열었다.
"근처 지역에 마물의 피해를 입은 마을이 있다는 보고를 받아서요, 직접 시찰을 나온것입니다."
"...구로브 지방, 말씀이시군요."
현이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감추며 말하자 2황자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아시는군요."
"....."
"아니, 대 스피니아 가(家) 후계자의 보좌관이니 당연히 이정도는 알아야 겠죠."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거죠?"
그의 알수없는 표정과 알수없는 말에 현은 눈을 날카롭게 치켜뜨며 위협적으로 물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뒤에 있는 벽에 등을 기대며 입을 떼었다.
"이번에 스피니아 가(家)에서 보낸 참가 서신, 잘 받았습니다."
"...그게 뭐 어쨌다는거죠?"
여전히 여유로우면서 능글거리는 자태를 지켜보던 현이 송곳처럼 날카로운 목소리로 묻자 그는 훗 하고 웃으며 말하였다.
"그냥..하루라도 늦게 보냈다면 접수가 마감됐을지도 모르니깐요."
"....호위는 어디있는거죠?"
그의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것을 느낀 현이 위협적인 목소리로 묻자 그는 여전히 미소가 띈 얼굴로 대답하였다.
"글쎄요, 지금쯤이라면 저를 찾으러 이 마을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있겠군요."
"이봐요, 일국의 황자가 함부러 그래도 되는건가요?"
"주위 사람들을 따돌리는게 저희 황가의 전통이라."
얄밉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하는 2황자의 모습에 현은 그만 할말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생각하였다.
'..내가 미쳤지..이런 사람을 하성 오빠라고 생각했다니. 색과 기운 빼고는 닮은게 하나도 없잖아!!'
"이런, 당황하신것 같군요. 물이라도 얻어와 드릴까요?"
"..됐습니다. 그냥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어지는 그의 정중한 말에 현은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힘이 빠진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여기서 대화를 더 이어나가봤자 피곤해지는것은 자신이었다. 그러자 그는 후드를 더욱 깊게 눌러쓰고 벽에서 등을 떼며 말하였다.
"저도 그럼 이만 가봐야겠군요. 시간을 많이 지체해서는 안되는지라."
"..네, 조심히 가세요."
그렇게 말을 하고 뒤를 돌아 발을 떼려는 순간 2황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 그럼 다음주에 있을 마물토벌때 봐요."
"네..?"
그의 말에 귀를 의심하며 다시 뒤를 돌아섰을때 그의 모습과 기척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없었다. 그에 이상함을 느낀 현이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남아있는것은 벽에 있는 약간의 온기뿐이었다.
"..이상해."
그가 기대었던 벽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닮은것 같으면서 닮은것 같지 않았다. 이렇게 순식간에 기척을 숨기며 사라지는것은 하성의 특기며 자랑이었다. 간간히 기척과 모습을 숨겨 자신을 놀래켰던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던것을 기억해내고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얕게 저으며 생각하였다.
'..마법을 쓴것일수도 있어, 스크롤이라던가. 이 세계에는 지구의 상식으로 이해할수없는것들이 많으니깐 말이야.'
"..이제 돌아가야 하나..?"
2황자가 기대었던 벽에 등을 기대며 몽실거리는 구름이 있는 푸른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에릭에게 살짝 끌렸던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그 끌림은 하성에게 느꼈던 설레었던 감정이 아니라 처음 느껴보는 친구사이의 우정이라는 감정일것이다. 말로 표현하긴 어려웠으나 지금 상황에서는 그를 받아줄 마음이 없었다.
거절해야겠지. 괜히 질질 끌면 그의 마음에 미련을 남겨놓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에 현은 몸을 떼고 기지개를 핀 후 발걸음을 옮겼다.
걸어가면서 이런저런 생각들이 들었지만 애써 떨쳐내고 저택의 대문 앞에 섰다. 그리고 숨을 들이마시고 문을 열었다.
'끼이익-'
대문 앞에 있는 정원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에 현은 다행이라 생각하고 저택의 안에 들어섰다. 건물 안에 들어서자 익숙한 하녀들과 하인들이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고 에샨과 리아 또한 바쁜것인지 온데간데 보이지 않았다.
'그 두명이 있었다면 아마 더 시끄러웠겠지.'
그 사실 또한 다행이라 생각하며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이어진 복도를 주욱 걸어 그의 업무실 앞에 섰다.
"......"
문앞에 섰지만 막상 열어 그의 얼굴을 마주 보려니 기분이 껄끄러웠다. 문의 손잡이에 손을 갔다 대었다. 하지만 이내 손을 거두고 두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어우.."
이런 일에는 영 서툰지라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어쩔수 없이 매일 봐야하는 얼굴임을 깨닫고 얼굴을 감싼 두손을 살짝 떼고 뺨을 찰싹 떼렸다.
"..정신차려, 류현. 가만히 있는다고 되는것은 없어."
그렇게 자신에게 최면을 걸고 얼굴을 굳히며 손잡이를 잡아 문을 열었다.
'달칵-'
"......"
"......"
그는 자신의 예상답게 평소와 같이 책상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었다. 다만 예고도 없이 문이 열린터라 고개를 들어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
다짐을 하고 왔지만 막상 얼굴을 마주치니 머리가 새하얘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내 다시 얕게 숨을 들이 마시고 입을 떼려는 순간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대에게 부담을 안겨주려는 생각은 없었다."
"......"
떨리는 목소리에 현은 아무 말도 할수가 없었다.
"그대의 마음이 나를 향해 있지 않은것도 안다."
"......"
좋아하면 그런것이 다 보이는것인가. 애절한 목소리에 현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포기하라고 하지 말아줬으면 한다."
"......"
"그대에게 천천히 다가가고 싶다."
"......"
"그리..알아줬으면 좋겠군."
그의 낮은 목소리에 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수밖에 없었다. 그 음성이 드물게 너무나도 간절했던데다가 진실성이 담겨있었기 때문이었다.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을때에 그가 서류로 눈을 돌리며 말하였다.
"..오늘은 쉬도록. 몸을 회복하고 내일 다시 와라."
떨림을 숨기려는 목소리에 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가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현은 고개를 숙이고 업무실을 나왔다.
그녀가 눈앞에서 사라지자 그는 들고있던 서류를 책상에 내려놓고 의자에 깊게 몸을 기대었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하지만 그의 한숨소리는 불어오는 미풍과 함께 섞여 사라졌다.
* *
"..어딜 가셨던 겁니까?!"
드디어 나타난 2황자에 그의 호위기사인 렉스가 드물게 목소리를 높이며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2황자는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였다.
"제 인생에서 너무나도 중요한 누군가를 만나러 갔다 온것입니다."
"하아..그게 누군지 물어도 대답을 하실 생각은 전혀 없겠죠..누가 형제 아니랄까봐 단독행동을 하는것은 어찌 그렇게 미하엘님과 똑같습니까."
"칭찬, 고맙군요."
그의 한숨이 섞인 말에 아헨은 능청스레 웃으며 대꾸하였다. 그러자 렉스는 기어이 뒷목을 잡으며 벽에 등을 기대었다. 하지만 아헨은 그런 렉스에게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어 푸르른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현아, 드디어 만났네.."